60대를 위한 논어 -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지혜의 말 100가지
사이토 다카시 지음, 김윤경 옮김 / 타인의사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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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읽어야겠다는 결심은 없었다. 도서관 하반기 인문학 강연으로 ‘논어와 친구하기’라는 함께 읽기 프로그램이 열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게다가 이권우 교수님께서 매주 일산에서 이 먼 곳까지 와주시는데 코앞에 있으면서 듣지 않는다는 게 사람 된 도리가 아니라는 건 자명했다. 주섬주섬 찾아본 책은 아이가 5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학급생 모두에게 선물한 홍익출판사의 오세진 번역본이었다. 일단 먼지를 털어냈다. 논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무척이나 아름다운 경구, 노래처럼 암송하는 문장이 떠오른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로 시작하는 학이편 첫 문장은 공부 의지를 상승시킨다. 공자가 직접 말씀한 가장 중요한 문장이기도 하다.

사이토 다카시의 『60대를 위한 논어(김윤경 옮김, 타인의사유, 2023, 240쪽 분량)』는 예상 독자층을 분명히 하고 그에 최적화된 문장을 선별한다. 저자는 예순 살 고개를 넘을 무렵이 되자 다른 풍경이 보이는데 “올라가야 할 길이 돌연 없어진 듯”(p.5) 하다고 차이를 전한다. 선뜻 이해되기보다는 과연 그럴까 싶으면서 온전히 믿기지는 않는다. 올라가야 할 길이 완만해질 뿐 아니라 끊어진 길이 없나 살펴야 하는 시기에 <논어>의 어떤 가르침은 깊이 있게 다가올 것이다. 사이토 다카시는 메이지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교육학을 전공했다. 지식과 실용이 결합된 글쓰기로 발표하는 책의 대부분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저서로 『혼자 있는 시간의 힘』, 『교양의 힘』, 『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 『어른의 말공부』 등이 있으며 『논어』를 번역했다.

『60대를 위한 논어』는 전체 다섯 개 장으로 구성하여 장마다 열 편의 문장을 소개한다. 한자 원문과 의미 해석, 두, 세 편의 부연 설명을 곁들여 이해를 돕는다. 이해는 저자의 실제 적용사례나 다양한 예시를 살펴봄으로 독자 스스로 실천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아침에 참된 이치를 깨달으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p.26)는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는 이인편 8장에 나온다. 저자는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무언가를 추구해 나가는 기쁨을 욕망 충족에서 오는 행복과 비교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2장 위령공편 23장에서 공자는 실천해야 할 평생의 과제를 “서(恕)”라고 꼽는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남의 고통을 짐작하고 덜어준다는 도덕적 상상력이 필요한 개념이다.

3장은 ‘존경받는 어른이 되기 위한 가르침’에서 인간관계의 필수조건을 최소한의 예의에서 찾는다. 육포를 가장 싫어하는 음식으로 꼽았던 공자는 거칠고 저렴한 음식인 육포라도 사오는 제자의 열정을 확인하고 싶어 했으며, 최소한의 예를 보이면 누구에게나 개방된 곳이 공자학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4장, ‘세대를 넘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가르침’은 학이편 15장 자공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시작한다.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의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 저자는 물질적 풍요에 좌우되지 않는 항상심을 노년을 앞둔 이들에게 주요한 덕목으로 세운다. 5장, 행복한 군자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가르침에서는 머리로만 알지 말고 매일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60대를 위한 논어』는 60대에 들어선 저자가 우선은 같은 세대를 위해, 다음으로 모든 세대를 향해 추리고 엮은 논어 명문장이다. 논어 번역도 했던 저자이기에 공자의 말씀을 음미하며 새로 문장을 고르는 진심이 전달된다. 『60대를 위한 논어』는 한 번에 읽고 완독 체크할 책은 아니다. 책을 덮은 후에 더욱 마음을 울리는 글이 있고, 사례를 적용하고 싶은 곳도 있으며, 낭독하거나 필사하고 암송하고 싶어질 수도 있겠다. 독자층을 정하고 집필한 만큼 만듦새도 적절하다. 활자 크기나 여백, 피로도를 줄이는 배치도 배려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50개 구절은 해설과 함께, 부록으로 실은 50개는 일종의 처방처럼 상황별로 제시하고 있다. 논어가 2500년이라는 긴 시간과 한학이라는 벽까지 이중으로 접근을 차단하는 난공불락의 고전이지만 지금 각각의 형편에 맞는 한 문장이라도 새길 수 있다면 귀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런 쓰임에 적합한 개략적 입문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낼 것이다.


(출판사 도서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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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청소년판)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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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다즐링, 2023, 308쪽 분량)』는 사랑받았지만 느끼지 못하는 아이와 간절히 원하지만 사랑받지 못한 아이를 그린다. 둘의 결핍 지점은 엇갈리고 이는 갈등의 원인이 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는 투명한 창처럼 사람들을, 관계를, 현상을 있는 그대로 통과시킨다. 안전장치는 개인이 해결할 문제다. 편 가르는 선, 비난의 시선, 날아오는 무기를 자기 능력껏 막아내고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는 안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미션은 클리어해야 하는 법이다. 작가 손원평의 등단작이자 제 10회 창비 청소년 문학 수상작인 『아몬드』가 새로운 옷을 입고 재출간되었다. 뒷모습을 담은 성인판과 소년의 옆모습인 청소년판, 두 개의 선택지 중에서 아련해 보이는 청소년판을 선택했다.

손원평은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서른의 반격』 『프리즘』 『튜브』등 장편소설과 소설집 발표 외에 영화 각본 집필과 연출을 했다. 『아몬드』는 아시아권 최초로 일본 서점대상 1위에 오른 책이기도 하다. 절판 후 재출간된 다즐링 판본의 최대 강점은 추가된 단편 외전 <상자 속의 상자>다. 윤재가 참담한 비극을 유리창 안에서 바라보고 있을 때 밖에 있던 목격자 중 한 사람의 이야기다. “단속한다.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주먹을 들면 안 되는 것처럼 누군가를 돕기 위한 손길도 내밀어서는 안 된다.”(p.277)라고 마음을 다잡던 남자를 통해 묻고, 동조하고, 결국 정화되는 체험을 선사한다. 바닥에 떨어진 금속조각들의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 금으로 변하는 눈부심 같다고나 할까.

소설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윤재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프롤로그 첫 문장에서 서술자는 이 소설이 “괴물인 내가 또 다른 괴물을 만나는 이야기”(p.9)라고 요약한다.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칭한 이유는 모두에게 있는 ‘아몬드’가 자신에게는 정상 범주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은 아몬드, 즉 편도체의 이상이라는 선천적 결함을 충분한 근거로 확정했고, 가족은 아이가 다르지만 달라 보이지 않는 법을 익혀 눈에 띄지 않고 사회에 수용되기를 최대 목표로 삼는다. 할멈은 윤재의 인생에 갑자기 등장해서 엄마가 잡고 있는 반대편 손을 잡아준다. 굳건한 지지는 외부의 가공할 충격으로 끊어지고 마는데, 이별은 찾아올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다. 혼자 남은 윤재를 돕는 심 박사, 또 다른 괴물이라 부른 곤이, 곤이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도라가 등장한다. 엄마와 할멈은 윤재의 안전 마지노선이었는데 울타리는 깨어져 버렸고, 다른 의미로 괴물인 곤이는 손 잡아주는 엄마를 애초에 잃었다. 대신 평생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p.127)는 신조를 지켜온 아버지 윤 교수가 “왜”라는 의문을 품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이 시선의 의미를 곤이는 안다.

윤재의 성장은 습기를 흡수하지 못하는 습자지가 조금씩 물을 머금게 되는 과정에 견줄 수 있겠다. 물론 급격한 변화의 계기도 마련된다. 반면, 곤이의 상처받은 여린 마음은 거친 행동으로 표면화된다. 일종의 방어기제일 텐데 이를 알아보는 사람은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윤재다. “나는 알고 있다. 곤이가 착한 아이라는 걸. 하지만 구체적으로 곤이에 대해 말하라면 그 애가 나를 때리고 아프게 했다는 것, 나비를 찢어 놓았다는 것, 선생에게 패악질을 부리고 아이들에게 물건을 집어 던졌다는 것밖에 말할 게 없다. 언어라는 건 그랬다. 이수와 곤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거다.“(p.234) 이처럼 소설은 언어의 한계뿐 아니라 ‘역설’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고(p.22) 이에 부합하는 역설적 상황을 곳곳에서 제시한다.

소설은 윤재의 성장담에 그치지 않고 곤이를 비롯한 등장인물 각각의 서사를 고루 조명한다. 빵을 구우면서 자신만의 애도를 실천하는 심 박사,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고 싶다며 눈물을 보이는 윤 교수, 여름 바람 같은 친구 도라를 이야기한다. 성장이 생리적 성장기에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꽤 늦은 시기에 알을, 세계를 깨겠다고 각성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안전의 욕구, 욕구 단계이론의 거의 기반인 2단계, 그러므로 본능에 가까운 욕구를 위해 행동하지 않고, 공감한다고 하지만 쉽게 잊고 마는 사람들도 기록한다.

『아몬드』는 윤재가 과거를 회상하는 구조로 순행과 역행을 반복하며 서사를 쌓는다. 그 안에 다채로운 사유와 질문이 녹아있어 멈추게 만드는데, 정상과 비정상, 평범과 그 안에 담긴 도달하기 쉽지 않은 지점인 평탄함, 다가오는 현실에 눈 감는 자와 눈 감지 않는 자, 비극과 희극 등이다. 무엇보다 주요 공간적 배경인 헌책방을 중심으로 글자, 책, 책과 영화의 비교, 작가 등을 서술하는 대목은 가장 아끼며 찾아보게 만든다. 흥미롭고 가독성 있는 전개, 조바심과 안도를 넘나들 때의 속도감, 세심한 심리 묘사와 빼어난 비유, 위트까지, 장점이 많은 작품이다. 깨야 할 것들을 생각한다. 알, 틀, 프레임, 고정관념, 불치 진단, 상자가 어느 날 깬다기보다 녹을 수 있다. 윤재의 눈물처럼 온도를 잴 수 없는 뜨거움으로 말이다. 초등 고학년 이상, 연령과 상관없이 권할 만하다. 이 책의 행간과 여백에서도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불을 끄고 책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겐 풍경처럼 익숙한 냄새였다. 그런데 거기 무언가 다른 게 실려 있었다. 갑자기 마음속에 탁, 하고 작은 불씨가 켜졌다. 행간을 알고 싶었다. 작가들이 써 놓은 글의 의미를 정말 알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더 많은 사람을 알고 깊은 얘기를 나누고 인간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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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틸라와 해골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302
존 클라센 글.그림, 서남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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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클라센의 『오틸라와 해골(서남희 옮김, 시공주니어, 2023, The Skull, 112쪽 분량)』 은 도망치는 오틸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마도 우연한 탈출은 아닌듯하다. 탈출이라는 게 우연히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일이고, “모두가 잠든” 깊고 긴 밤이 배경이니 누구라도 깨어있다면 시도조차 어려울 수 있겠고, “마침내” 도망쳤다니 몇 번째 시도일지도 가늠케 할뿐더러 타이틀 표지가 나오기 전에 첫 문장이 먼저 나온 셈이니 얼마나 급박한 상황일지도 충분히 짐작할 일이다. 작가는 그 장면을 간략한 인증처럼 그려 넣었다. 책의 결말부에도 인장 같은 그림의 변주가 반복된다. 단지, 밤은 햇빛 받은 아침으로 바뀌었고, 도망은 산책으로 달라진다.

『오틸라와 해골』은 <유령과 도깨비 이야기(1969)>의 의도치 않은 패러디 그림책이라고 작가는 밝힌다. 자꾸 생각났던 이야기를 찾아보니 기억에서 꽤 빗겨있었고,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 낸 원작의 변용을 작품화한다. 새로운 옷을 입는 고전은 언제나 매력적인데 무려 존 클라센의 손을 거쳤으니 정좌하고 펴볼 일이다. 존 클라센은 간결한 표현, 열린 결말, 절제된 색감을 특징으로 하는 캐나다 출신의 그림책 작가로 글 작가인 맥 바넷과 함께 여러 작품을 함께 작업했다.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 《늑대와 오리와 생쥐》를 비롯한 공동 작업을 발표하며 칼데콧상, 케이트 그린어웨이상 등을 수상했다.

숲속에서 자란 오틸라는 깊은 밤, 마침내 도망친다. 울타리 밖으로 쌓인 눈 위에 오틸라 발자국이 찍힌다. 이름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멈추지 않고 달리던 아이 앞에 크고 오래된 집이 나타난다. 문을 열어준 이는 해골이다. 잠시 숨어갈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은 몸이 없어 굴러다니는 자신을 데리고 다니겠다는 약속이다. 해골은 집을 구경시켜 주는데 벽난로 방에는 해골의 예전 모습 초상화가, 정원이 있는 방에는 배나무가 자란다. 벽에 가면들이 걸려있는 방, 지하 감옥과 탑에도 이른다. 아주 큰 무도장에서 둘은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 묵어가기로 한 오틸다에게 해골은 한 가지 비밀을 전한다. 몸통만 있는 뼈다귀가 집에 찾아와서는 해골을 잡으러 쫓아온다고. 많이 느려진 해골은 뼈다귀에게 잡히기 싫다고 말한다. 오틸라는 곰곰이 생각한다.

『오틸라와 해골』은 텍스트와 이미지가 긴밀하게 조응하고 협력하고 상호 보완한다. 글로 한 번 읽고, 그림으로 설명을 듣는 효과를 내면서도 독자를 위한 여백 또한 충분하다. 평면에 얹힌 일러스트는 깊이를 드러내며 공간을 확보하는데 해골이 안내하는 방과 방, 복도와 계단을 따라갈 때 오래 갇혀있던 묵직한 공기와 고성의 서늘한 향, 소리의 울림을 체험하는 듯하다. 오틸라는 어떻게 해골을 도울 수 있었을까? 오틸라는 고통당하는 해골에게 구원자로 다가온다. 오틸라가 먼저 고통당하는 자였고, 연약했지만 무기력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행동했던 경험이 이를 가능케 했다. 소녀는 두려움을 감수하고 탈출하는 자였다. 땅바닥에 넘어지고, “눈과 어둠과 막막한 고요 속에” 엎드려 있다 울음을 터뜨렸을 뿐 아니라 “울음을 다 쏟아 낸” 다음에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갔”던 일련의 고투는 오틸라에게 성장 과정이자 삶을 대하는 태도로 스며들었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오틸라는 해골에게 자신의 공로를 생색내며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감추고, 그럼으로써 상대를 배려한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지만, 오른손 뿐 아니라 제 3의 손이 없는 걸 아쉬워할 때도 있는 소생은 부끄럽다. 앞으로 그들이 함께 맞이할 날들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시간으로 쌓일 것이다. 두려움과 폭력의 굴레를 끊고 자유로운 선택으로 채워질 날들이다. 무엇인들 새롭지 않겠나. 다양한 메타포를 간직한 환상적인 이야기는 독자의 감각을 구체적으로 일깨운다. 우리들의 그날, 그때를 환기시킨다. 긴장과 사랑스러움이 교차하는 그림책이다. 후루룩 읽고, 천천히 읽고, 열 가지 방법으로 다시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이 그림책을 추천한다. 역시 존 클라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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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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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아옌데의 『세피아빛 초상(조영실 옮김, 민음사, 2022, 2020, 452쪽 분량)』은 네루다의 시를 제사로 삼는다. “길만이 가족이라네”라는 마지막 연의 여운이 남아 있을 때 페이지를 넘기면 델 바예 일가의 가계도가 나온다. 어느 여정이 되었건 인간은 가족에게로 이끌리고, 가족은 인간에게 갈래길이자 관문 또는 허들을 제공한다. 스포가 될까 싶어 가계도를 스쳐 넘겼지만 얼핏 보아도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의 부엔디아 집안 가계도와 견주어 간결하다. 저절로 안도가 된다. 『세피아빛 초상(2000)』은 <운명의 딸(1999)>, <영혼의 집(1982)>과 함께 아옌데 소설의 가장 걸작으로 평가받는 삼부작을 완성하는 소설이다. 아우로라의 자전적 기록은 <영혼의 집>의 클라라, <운명의 딸>의 엘리사까지 연결했을 때 4대에 걸친 서사를 완성한다. 이사벨 아옌데는 칠레 출신의 여성 언론인이자 소설가로, 페루 리마에서 태어났다.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가장 뛰어난 작가로 인정받으며 마술적 사실주의의 계보도 잇는다.

침대를 주제로 한 글을 써두고 나서 읽기 시작한 작품인데 아니 왜, 여기에 막강한 침대가 등장하는 거다. 책은 “어마어마하게 큰 침대 사건”, 파울리나 델 바예의 침대로 인상적인 서막을 연다. 가난한 칠레 지주 집안 출생인 파울리나는 천부적인 사업 감각으로 손대는 것을 대부분 황금으로 바꾼다. 여성은 남성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아야 했던 시절, 침대는 남편 펠리시아노의 외도를 겨눈 복수전의 상징물이었지만 부부는 “불한당 패거리 같은 공범 관계”(p.25)로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다. 파울리나는 조카 세베로 델 바예가 센프란시스코에 찾아 왔을 때 차이나 타운에서 유명한 엘리사 소머스의 찻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본 린 소머스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또 몇 년이 흐른다. 칠레 과두계층의 관습대로 결혼이 예정되어있던 사촌은 명석한 니베아 였지만, 이 결혼이 이루어지기까지 세베로는 감정과 육체의 불같은 담금질을 반복하게 된다. 살아있는게 기적인 상태에서도 생은 뜻밖의 선물을 그들에게 내어주고 아이라던가, 또 다른 아이라던가. 축복이라면 축복을 연거푸 허락한다.

엘리사 소머스와 타오 치엔의 사랑은 “얽히고설킨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게 짜인 달콤한 우정처럼”(p.71) 시작되었고, 굳건한 결속은 예기치 않는 이별이 찾아왔을 때 가장 환하게 빛난다. 타오 치엔은 차이나타운에서 착취당하는 소녀들을 구하려 시도하다 쓰러진다. 딸, 린을 잃었던 그는 손녀인 아우로라의 손을 놓지 않고 사라져간다. 다만, 결코 사라지지 않겠다, 계속해서 지키겠다는 약속을 남긴채다. 엘리사는 자기 내부에 있던 사랑의 능력이 영원히 빠져나가고 다시는 옛날의 자신이 되지 못함을 안다. 그녀는 “리밍, 너와 럭키 삼촌 그리고 럭키 삼촌의 아이들에게 애정을 느낀다.(중략) 그러나 사랑은 오직 타오에게서만 느낄 수 있단다. 그가 없으면 나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하루를 살고 나면 그와 만나기 위해 기다릴 날이 또 하루 줄어드는 거야.”(p.426)라고 고백한다. 아우로라에게 고통을 주며 먼 기억으로 묻혀있던 비밀은 무의식의 베일이 걷히며 뒤늦게 돌아오는데, 이는 외할머니 엘리사 소머스의 귀환과 함께 이루어진다.

소설의 화자인 아우로라는 호기심과 의심, 탐색과 발견으로 자신의 성장사 뿐 아니라 가족사, 나아가 칠레 근대사를 기록한다. 아우로라에게는 특별한 조력자가 때에 맞게 등장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도움을 감각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 그녀에게 세상 전부였던 외할아버지 타오 치엔의 이미지다. 사진이라는 예술세계는 아우로라의 펜이 된다. 시력을 잃어가는 스승에게서 보는 법, 보아야할 것(기록할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 표현하고 담는 마음을 배운다. 사진은 아우로라에게 생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이자 거짓을 깨부수고 살아남을 수단인 부표로 작용한다. 사랑으로 축복받았던 그녀는 거짓 사랑에 유린당하지만 결국은 다시 당당히 사랑 앞에 선다. 이 사랑은 영속하지 않겠는가.

소설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칠레의 발파라이소를 배경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화 시기를 그려낸다. 작가는 미국에서의 인종간 대립과 멸시, 차이나타운의 성매매 사업과 숨은 폭력, 페루 등 주변국과 벌인 칠레의 오랜 전쟁, 불안정한 정치 판세의 변화, 여성 참정권을 위한 투쟁 등 다양한 갈래의 테마를 델 바예 일가를 중심으로 담는다. 명민한 여성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이루어내는 최대치의 도전은 소설의 골격을 형성한다. 다채로운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듯이 쏟아지는데 무척이나 조화롭고 필연적이라 한 문장, 한 단어도 간과할 수 없는 몰입을 선사한다. 이는 마치 인간 극장의 축소 무대를 보는 듯한데, 막이 오르자 사람들이 등장해 차례로 일생을 풀어놓는다. 커튼 주름의 돌출 부위와 안으로 접힌 곳 마저도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가는데 필요했다는 걸 비로소 납득하게 된다. 한명 한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도 할 말은 샘솟을지 모른다. “사면받은 권력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고 일깨우는 니베아, 현 정권과 혁명군의 차이를 양쪽 다 “정통성”을 놓고 싸운다는 피네다 양에 비해 “둘다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망나니”(p.229)라 답하는 파울리나는 어떤가. 파울리나 같은 사람은 몇 세대쯤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프레더릭 윌리엄스의 사려깊고 세심한 배려,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아우로라를 넘어 읽는 이에게도 위로를 준다.

에필로그는 작품을 완벽하게 정리한다. 아우로라는 취사선택하는 기억의 작동 오류를 대신해 사진과 글을 무기삼아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p.430)고 밝힌다. 책은 기억과 기억을 붙잡는 기록의 의미를 새긴다. 그녀는 “각자 자기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한 빛깔을 고른다.”(p.431)며, 세피아빛을 선택한다. 이처럼 결말은 독자에게 바통을 넘기며 당신은 어떤 색을 고를 것인지 묻는다. 작가의 “내가 쓰는 모든 작품은 자전적 요소를 갖고 있다. 왜 나는 어떤 것을 쓰려고 작정했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라는 말은 아우로라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아옌데 소설은 감탄하며 읽었던 메리 카의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를 다시 꺼내게 한다. 이 특별한 실용서의 근사한 구현이 바로 『세피아빛 초상』임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숭고한 아우로라의 성장기이자 사랑과 도전, 굴하지 않는 열정으로 점철된 인생에 바치는 찬가를 추천한다. 물론 삼부작은 완독해야 온점이 찍힐 것 같다. 장엄하다. 또한 청량해서 가슴에서 파도가 치는 것만 같다.

책 속에서>

“내가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고 누가 그래, 세베로? 그건 내가 바라는 미래에 제일 어울리지 않는 말이야. 나는 흥미롭고 모험이 넘치는 뭔가 색다르고 열정적인 삶을 원해.”(p.147)

기억은 허구다.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널찍한 융단에 수를 놓는다. 나는 사진과 글을 통해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매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져 금방 과거가 되어 버린다. 현실은 하루살이같이 덧없고 변하는 것이며 순수한 그리움일 따름이다.(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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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세크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인경 옮김 / 꿈꾼문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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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에서 유명한 고리대금업자라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 몇이 있다. 우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계약대로’를 외치며 한 파운드 살덩이의 소유권을 주장했던 샤일록이다. 다음으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속 에브니저 스쿠루지다. 그는 다행히도 과거 현재,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을 통해 캐릭터 변화에 성공한다. 다음으로 <곱세크> 속 동명 주인공을 꼽겠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곱세크(김인경 옮김, 꿈꾼문고, 2020, 1844, 182쪽 분량)』 는 황금만을 절대 가치기준으로 삼고 일평생 매진했던 인물이다. 소설은 과도한 세부묘사가 비현실적일지언정 분명 존재할법한 하나의 표상을 완성한다.

발자크는 “작가는 시대의 비서”라고 했듯이 2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장·단편소설 90여 편을 유기적으로 엮어 총서 <인간희극>을 발표했다. <인간희극>은 크게 ‘풍속 연구’, ‘철학적 연구’, ‘분석적 연구’의 세 계열로 구분되고 90여 편의 소설로 구성되어 약 200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서사시로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인간과 사회를 관찰하는 사실주의의 방식을 확립한 발자크는 소설의 제재를 넓히고 개념을 확대해 사실주의의 시조가 되었고, 자연주의의 선구자로서 플로베르, 졸라, 도스토옙스키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데』, 『나귀가죽』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소설은 소송대리인 데르빌이 드 그랑리외 자작부인의 살롱에서 들려주는 고리대금업자 곱세크에 대한 평이자 물질중심주의 세상에 대한 적나라한 관찰기다. 곱세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에피소드가 고리오 영감의 딸인 드 레스토 백작부인의 애정사건과 이에 심신이 타격을 받고 마지막으로 지키고자 했던 백작의 재산 문제다. 자작부인은 열 일곱 살인 딸 카미유의 마음이 드 레스토 백작부인의 아들에게 기우는 것을 경계한다. 백작부인은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에서 유명하고 또 위험하기 때문이다. 백작부인은 남편이 모든 재산을 차례로 곱세크에게 매각하는 일의 속내를 가늠하며 자녀들을 위해 되돌리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데르빌은 그녀가 죽어가는 남편의 신음을 엿들으면서 민법을 연구한다는 걸 알게 되자 “음모가 정교해지거나, 계획이 형성되거나, 모략이 꾸며지거나 하는 그 동기는 늘 재산”(p.110)임을 재확인한다. 또한 뛰어나다고 알려졌던 사람 안에 깃든, “인간적인 감정을 모두 소거”(p.112)시킨 정신적 괴로움의 파괴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럼에도 데르빌은 젊은 에르네스트 드 레스토 백작이 합법적으로 재산을 보장받게 되었음을 증명함으로 새롭게 시작할 청춘의 앞 길을 터준다.

진정한 주인공인 곱세크 차례다. 곱세크는 데르빌이 성공적인 경력을 쌓는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데르빌은 자기 인생의 소설적이었던 시기, 스물다섯으로 돌아가 곱세크를 불러낸다. 곱세크는 ‘들이마시다’라는 단어를 상기시킨다. 작가가 묘사하는 그의 외모는 내면으로 빚은 물상과 흡사하다. 이름이나 외양이나 심지어 플루트 연주 같은 목소리까지 견고한 틀과도 같다. 모형인간, 어음인간(p.17)이면서 때론 “한 남자가 관여할 만한 확실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물질적인 사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일세. 그 사물은······ 바로 ‘금’이네.”(p.28)라고 황금론을 편다. 금이 아닌 다른 것에 주의를 빼앗기는 자들은 미친 자들, 병든자들, 바보들, 얼간이들, 멍청이들, 즉 “파리 사람들의 삶”(p.30)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내 눈은 하느님의 눈과 같아서”(p.46)라는 선언적 문장으로 권력과 쾌락, 인생을 정의 내린다.

그가 막심 드 트라유 백작을 꿰뚫어보듯 하는 말은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모순적인 양면이 한 사람에게 깃들기에 “양성동물”을 닮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이중성을 열거할 때 인간의 보편성이 떠오른다. 곱세크는 악한 같지만 “볼테르의 동상과 흡사”(p.68)하고 볼테르와 비슷한 미소를 띠고, “외견상 고리대금업자”일지언정 그의 안에는 두 종류의 인간, “구두쇠와 철학자, 왜소한 인간과 위대한 인간”(p.94)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소설은 어떤 면에서 불가사의한 인물인 곱세크에 대해 레스토 백작부인 사건 이후 임종까지를 책의 말미 십 여 페이지로 간략하게 요약한다. 요약보다는 “농축”이 맞는 표현이겠다. 멸하려는 자와 살리려는 자, 썩을지라도 그러쥐겠다는 자와 돕고 나누기 원하는 자를 곱세크와 데르빌에게서 찾을 수 있다.

『곱세크』는 19세기 전반 프랑스 사회의 특권층, 귀족계급, 돈과 권력의 얼굴 뿐 아니라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기록한다. 독자는 첫 문장에서 명시한 시공간적 배경으로 이동하여 하룻밤이라는 소설 속 시간동안 파리의 희로애락을 엿보게 된다.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액자식 구성은 화자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경청하는 인물들처럼 독자의 주의도 사로잡는다. 같은 날, 동일한 장소에서 이야기를 매듭지을 때 까지. 읽는 즐거움은 인물에 이입하고 공감할 때,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마음이 일 때 경험하게 된다. 동시에 입장을 정하고 논리를 펴는 문장의 리듬감, 사례와 근거, 비유와 상징을 통해 숙고하게 만드는 문장 자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곱세크의 마지막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 문학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인간의 죽음 중에서 가히 인상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돈의 지배는 모든 시대의 화두이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극적일 것이다. 매일 열여섯 시간씩 글을 썼던 작가 자신에게도 주요 동기였다. 반드시 재물이 아닐지라도 자기 꼬리를 무는 뱀처럼 어리석게 침몰하는 곱세크가 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탐심은 연막을 뿌리며 늘 새롭게 유혹한다. 한 번만 더, 아직 부족해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겸손에서 비롯하는지 욕망에 근거하는지 살필 일이다. 서평 쓸 시기를 놓쳐 재독한 덕분에 이야기의 유려한 전개에 주목할 수 있었다. 한가지, <곱세크>가 국내 첫 번역 출간되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지만 잘린 책 표지가 개성 있고 아름다울지라도 본문이 훼손될까봐 노심초사다. 그게 중요한 사항인가 싶겠지만 이런 독자도 있다.(와, 모서리 헐었어! 어쩔거냐! 중얼대는) 초독이 좋았다. 역시 발자크! 재독하니 더 좋았다. 그렇고 말고 발자크! 발자크는 전작 읽기로 나아가보자.

책 속에서>

인생이란 돈이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기계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수단들은 언제나 그것의 결과들과 혼동된다는 점을 알아두게. 사실 자네는 결코 감정과 감각, 정신과 물질을 구별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금은 자네들이 사는 현 사회의 정신이라네.(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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