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세크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인경 옮김 / 꿈꾼문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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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에서 유명한 고리대금업자라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 몇이 있다. 우선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계약대로’를 외치며 한 파운드 살덩이의 소유권을 주장했던 샤일록이다. 다음으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속 에브니저 스쿠루지다. 그는 다행히도 과거 현재,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을 통해 캐릭터 변화에 성공한다. 다음으로 <곱세크> 속 동명 주인공을 꼽겠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곱세크(김인경 옮김, 꿈꾼문고, 2020, 1844, 182쪽 분량)』 는 황금만을 절대 가치기준으로 삼고 일평생 매진했던 인물이다. 소설은 과도한 세부묘사가 비현실적일지언정 분명 존재할법한 하나의 표상을 완성한다.

발자크는 “작가는 시대의 비서”라고 했듯이 2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장·단편소설 90여 편을 유기적으로 엮어 총서 <인간희극>을 발표했다. <인간희극>은 크게 ‘풍속 연구’, ‘철학적 연구’, ‘분석적 연구’의 세 계열로 구분되고 90여 편의 소설로 구성되어 약 200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서사시로 세계 문학의 걸작으로 남았다. 인간과 사회를 관찰하는 사실주의의 방식을 확립한 발자크는 소설의 제재를 넓히고 개념을 확대해 사실주의의 시조가 되었고, 자연주의의 선구자로서 플로베르, 졸라, 도스토옙스키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데』, 『나귀가죽』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소설은 소송대리인 데르빌이 드 그랑리외 자작부인의 살롱에서 들려주는 고리대금업자 곱세크에 대한 평이자 물질중심주의 세상에 대한 적나라한 관찰기다. 곱세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 에피소드가 고리오 영감의 딸인 드 레스토 백작부인의 애정사건과 이에 심신이 타격을 받고 마지막으로 지키고자 했던 백작의 재산 문제다. 자작부인은 열 일곱 살인 딸 카미유의 마음이 드 레스토 백작부인의 아들에게 기우는 것을 경계한다. 백작부인은 바람직하지 않은 의미에서 유명하고 또 위험하기 때문이다. 백작부인은 남편이 모든 재산을 차례로 곱세크에게 매각하는 일의 속내를 가늠하며 자녀들을 위해 되돌리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데르빌은 그녀가 죽어가는 남편의 신음을 엿들으면서 민법을 연구한다는 걸 알게 되자 “음모가 정교해지거나, 계획이 형성되거나, 모략이 꾸며지거나 하는 그 동기는 늘 재산”(p.110)임을 재확인한다. 또한 뛰어나다고 알려졌던 사람 안에 깃든, “인간적인 감정을 모두 소거”(p.112)시킨 정신적 괴로움의 파괴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럼에도 데르빌은 젊은 에르네스트 드 레스토 백작이 합법적으로 재산을 보장받게 되었음을 증명함으로 새롭게 시작할 청춘의 앞 길을 터준다.

진정한 주인공인 곱세크 차례다. 곱세크는 데르빌이 성공적인 경력을 쌓는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데르빌은 자기 인생의 소설적이었던 시기, 스물다섯으로 돌아가 곱세크를 불러낸다. 곱세크는 ‘들이마시다’라는 단어를 상기시킨다. 작가가 묘사하는 그의 외모는 내면으로 빚은 물상과 흡사하다. 이름이나 외양이나 심지어 플루트 연주 같은 목소리까지 견고한 틀과도 같다. 모형인간, 어음인간(p.17)이면서 때론 “한 남자가 관여할 만한 확실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물질적인 사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일세. 그 사물은······ 바로 ‘금’이네.”(p.28)라고 황금론을 편다. 금이 아닌 다른 것에 주의를 빼앗기는 자들은 미친 자들, 병든자들, 바보들, 얼간이들, 멍청이들, 즉 “파리 사람들의 삶”(p.30)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내 눈은 하느님의 눈과 같아서”(p.46)라는 선언적 문장으로 권력과 쾌락, 인생을 정의 내린다.

그가 막심 드 트라유 백작을 꿰뚫어보듯 하는 말은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이다. 모순적인 양면이 한 사람에게 깃들기에 “양성동물”을 닮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이중성을 열거할 때 인간의 보편성이 떠오른다. 곱세크는 악한 같지만 “볼테르의 동상과 흡사”(p.68)하고 볼테르와 비슷한 미소를 띠고, “외견상 고리대금업자”일지언정 그의 안에는 두 종류의 인간, “구두쇠와 철학자, 왜소한 인간과 위대한 인간”(p.94)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소설은 어떤 면에서 불가사의한 인물인 곱세크에 대해 레스토 백작부인 사건 이후 임종까지를 책의 말미 십 여 페이지로 간략하게 요약한다. 요약보다는 “농축”이 맞는 표현이겠다. 멸하려는 자와 살리려는 자, 썩을지라도 그러쥐겠다는 자와 돕고 나누기 원하는 자를 곱세크와 데르빌에게서 찾을 수 있다.

『곱세크』는 19세기 전반 프랑스 사회의 특권층, 귀족계급, 돈과 권력의 얼굴 뿐 아니라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기록한다. 독자는 첫 문장에서 명시한 시공간적 배경으로 이동하여 하룻밤이라는 소설 속 시간동안 파리의 희로애락을 엿보게 된다.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액자식 구성은 화자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경청하는 인물들처럼 독자의 주의도 사로잡는다. 같은 날, 동일한 장소에서 이야기를 매듭지을 때 까지. 읽는 즐거움은 인물에 이입하고 공감할 때,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마음이 일 때 경험하게 된다. 동시에 입장을 정하고 논리를 펴는 문장의 리듬감, 사례와 근거, 비유와 상징을 통해 숙고하게 만드는 문장 자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곱세크의 마지막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 문학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인간의 죽음 중에서 가히 인상적으로 꼽을 수 있겠다.

돈의 지배는 모든 시대의 화두이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극적일 것이다. 매일 열여섯 시간씩 글을 썼던 작가 자신에게도 주요 동기였다. 반드시 재물이 아닐지라도 자기 꼬리를 무는 뱀처럼 어리석게 침몰하는 곱세크가 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탐심은 연막을 뿌리며 늘 새롭게 유혹한다. 한 번만 더, 아직 부족해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겸손에서 비롯하는지 욕망에 근거하는지 살필 일이다. 서평 쓸 시기를 놓쳐 재독한 덕분에 이야기의 유려한 전개에 주목할 수 있었다. 한가지, <곱세크>가 국내 첫 번역 출간되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지만 잘린 책 표지가 개성 있고 아름다울지라도 본문이 훼손될까봐 노심초사다. 그게 중요한 사항인가 싶겠지만 이런 독자도 있다.(와, 모서리 헐었어! 어쩔거냐! 중얼대는) 초독이 좋았다. 역시 발자크! 재독하니 더 좋았다. 그렇고 말고 발자크! 발자크는 전작 읽기로 나아가보자.

책 속에서>

인생이란 돈이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기계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수단들은 언제나 그것의 결과들과 혼동된다는 점을 알아두게. 사실 자네는 결코 감정과 감각, 정신과 물질을 구별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금은 자네들이 사는 현 사회의 정신이라네.(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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