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피아빛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06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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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아옌데의 『세피아빛 초상(조영실 옮김, 민음사, 2022, 2020, 452쪽 분량)』은 네루다의 시를 제사로 삼는다. “길만이 가족이라네”라는 마지막 연의 여운이 남아 있을 때 페이지를 넘기면 델 바예 일가의 가계도가 나온다. 어느 여정이 되었건 인간은 가족에게로 이끌리고, 가족은 인간에게 갈래길이자 관문 또는 허들을 제공한다. 스포가 될까 싶어 가계도를 스쳐 넘겼지만 얼핏 보아도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의 부엔디아 집안 가계도와 견주어 간결하다. 저절로 안도가 된다. 『세피아빛 초상(2000)』은 <운명의 딸(1999)>, <영혼의 집(1982)>과 함께 아옌데 소설의 가장 걸작으로 평가받는 삼부작을 완성하는 소설이다. 아우로라의 자전적 기록은 <영혼의 집>의 클라라, <운명의 딸>의 엘리사까지 연결했을 때 4대에 걸친 서사를 완성한다. 이사벨 아옌데는 칠레 출신의 여성 언론인이자 소설가로, 페루 리마에서 태어났다.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가장 뛰어난 작가로 인정받으며 마술적 사실주의의 계보도 잇는다.

침대를 주제로 한 글을 써두고 나서 읽기 시작한 작품인데 아니 왜, 여기에 막강한 침대가 등장하는 거다. 책은 “어마어마하게 큰 침대 사건”, 파울리나 델 바예의 침대로 인상적인 서막을 연다. 가난한 칠레 지주 집안 출생인 파울리나는 천부적인 사업 감각으로 손대는 것을 대부분 황금으로 바꾼다. 여성은 남성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아야 했던 시절, 침대는 남편 펠리시아노의 외도를 겨눈 복수전의 상징물이었지만 부부는 “불한당 패거리 같은 공범 관계”(p.25)로 확고하게 결합되어 있다. 파울리나는 조카 세베로 델 바예가 센프란시스코에 찾아 왔을 때 차이나 타운에서 유명한 엘리사 소머스의 찻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본 린 소머스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또 몇 년이 흐른다. 칠레 과두계층의 관습대로 결혼이 예정되어있던 사촌은 명석한 니베아 였지만, 이 결혼이 이루어지기까지 세베로는 감정과 육체의 불같은 담금질을 반복하게 된다. 살아있는게 기적인 상태에서도 생은 뜻밖의 선물을 그들에게 내어주고 아이라던가, 또 다른 아이라던가. 축복이라면 축복을 연거푸 허락한다.

엘리사 소머스와 타오 치엔의 사랑은 “얽히고설킨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섬세하게 짜인 달콤한 우정처럼”(p.71) 시작되었고, 굳건한 결속은 예기치 않는 이별이 찾아왔을 때 가장 환하게 빛난다. 타오 치엔은 차이나타운에서 착취당하는 소녀들을 구하려 시도하다 쓰러진다. 딸, 린을 잃었던 그는 손녀인 아우로라의 손을 놓지 않고 사라져간다. 다만, 결코 사라지지 않겠다, 계속해서 지키겠다는 약속을 남긴채다. 엘리사는 자기 내부에 있던 사랑의 능력이 영원히 빠져나가고 다시는 옛날의 자신이 되지 못함을 안다. 그녀는 “리밍, 너와 럭키 삼촌 그리고 럭키 삼촌의 아이들에게 애정을 느낀다.(중략) 그러나 사랑은 오직 타오에게서만 느낄 수 있단다. 그가 없으면 나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하루를 살고 나면 그와 만나기 위해 기다릴 날이 또 하루 줄어드는 거야.”(p.426)라고 고백한다. 아우로라에게 고통을 주며 먼 기억으로 묻혀있던 비밀은 무의식의 베일이 걷히며 뒤늦게 돌아오는데, 이는 외할머니 엘리사 소머스의 귀환과 함께 이루어진다.

소설의 화자인 아우로라는 호기심과 의심, 탐색과 발견으로 자신의 성장사 뿐 아니라 가족사, 나아가 칠레 근대사를 기록한다. 아우로라에게는 특별한 조력자가 때에 맞게 등장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도움을 감각하는데 이는 어린 시절 그녀에게 세상 전부였던 외할아버지 타오 치엔의 이미지다. 사진이라는 예술세계는 아우로라의 펜이 된다. 시력을 잃어가는 스승에게서 보는 법, 보아야할 것(기록할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 표현하고 담는 마음을 배운다. 사진은 아우로라에게 생의 가치를 실현하는 도구이자 거짓을 깨부수고 살아남을 수단인 부표로 작용한다. 사랑으로 축복받았던 그녀는 거짓 사랑에 유린당하지만 결국은 다시 당당히 사랑 앞에 선다. 이 사랑은 영속하지 않겠는가.

소설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칠레의 발파라이소를 배경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화 시기를 그려낸다. 작가는 미국에서의 인종간 대립과 멸시, 차이나타운의 성매매 사업과 숨은 폭력, 페루 등 주변국과 벌인 칠레의 오랜 전쟁, 불안정한 정치 판세의 변화, 여성 참정권을 위한 투쟁 등 다양한 갈래의 테마를 델 바예 일가를 중심으로 담는다. 명민한 여성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이루어내는 최대치의 도전은 소설의 골격을 형성한다. 다채로운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듯이 쏟아지는데 무척이나 조화롭고 필연적이라 한 문장, 한 단어도 간과할 수 없는 몰입을 선사한다. 이는 마치 인간 극장의 축소 무대를 보는 듯한데, 막이 오르자 사람들이 등장해 차례로 일생을 풀어놓는다. 커튼 주름의 돌출 부위와 안으로 접힌 곳 마저도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가는데 필요했다는 걸 비로소 납득하게 된다. 한명 한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도 할 말은 샘솟을지 모른다. “사면받은 권력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고 일깨우는 니베아, 현 정권과 혁명군의 차이를 양쪽 다 “정통성”을 놓고 싸운다는 피네다 양에 비해 “둘다 하나도 다를 게 없는 망나니”(p.229)라 답하는 파울리나는 어떤가. 파울리나 같은 사람은 몇 세대쯤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프레더릭 윌리엄스의 사려깊고 세심한 배려,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아우로라를 넘어 읽는 이에게도 위로를 준다.

에필로그는 작품을 완벽하게 정리한다. 아우로라는 취사선택하는 기억의 작동 오류를 대신해 사진과 글을 무기삼아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p.430)고 밝힌다. 책은 기억과 기억을 붙잡는 기록의 의미를 새긴다. 그녀는 “각자 자기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한 빛깔을 고른다.”(p.431)며, 세피아빛을 선택한다. 이처럼 결말은 독자에게 바통을 넘기며 당신은 어떤 색을 고를 것인지 묻는다. 작가의 “내가 쓰는 모든 작품은 자전적 요소를 갖고 있다. 왜 나는 어떤 것을 쓰려고 작정했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어떤 진실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라는 말은 아우로라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아옌데 소설은 감탄하며 읽었던 메리 카의 『인생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를 다시 꺼내게 한다. 이 특별한 실용서의 근사한 구현이 바로 『세피아빛 초상』임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숭고한 아우로라의 성장기이자 사랑과 도전, 굴하지 않는 열정으로 점철된 인생에 바치는 찬가를 추천한다. 물론 삼부작은 완독해야 온점이 찍힐 것 같다. 장엄하다. 또한 청량해서 가슴에서 파도가 치는 것만 같다.

책 속에서>

“내가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고 누가 그래, 세베로? 그건 내가 바라는 미래에 제일 어울리지 않는 말이야. 나는 흥미롭고 모험이 넘치는 뭔가 색다르고 열정적인 삶을 원해.”(p.147)

기억은 허구다. 우리는 부끄러운 부분은 잊어버리고 가장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만 선택하여 인생이라는 널찍한 융단에 수를 놓는다. 나는 사진과 글을 통해 내 존재의 덧없는 상황을 이겨 내고 사라져 가는 순간들을 붙들어 과거의 혼돈을 벗겨 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매 순간은 순식간에 사라져 금방 과거가 되어 버린다. 현실은 하루살이같이 덧없고 변하는 것이며 순수한 그리움일 따름이다.(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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