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직 언론인이자 전 정권의 고위 관료였던 인물이 자택에서 체포를 당했습니다. 이 사람은 기사에서, 그동안 6차례의 경찰 출석 요구에 불응한 것으로 나왔고, 그로인해 법원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다른 혐의도 수사중이거나 곧 수사가 진행될 것으로 아는데요. 그런 것들은 차치하고 최근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정치적 발언으로 인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는 취지로 더불어민주당 소속 과방위 위원들이 고발했던 점이 이번에 수사가 되면서 이어진 일로 위 사건을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 독서 모임에서 만난 어느 국회의원 비서관 분과의 몇가지 대화가 떠오릅니다. 그는 국민의힘이 새누리당이던 당시, 모 의원의 비서관을 하고 있던 분이었는데요. 자신이 생각하기에 국회의원을 비롯, 소위 고위 공무원들, 법조인들에 대한 가장 큰 문제를 거론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사회에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고 직무가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사사건건 법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아무리 법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따른 고려가 필요하다."는 식의 '들은 얘기'를 이야기해 주더군요. 저는 앞선 제목처럼 이 '법의 지배'가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아주 중요한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위 잘나가는 양반들이 (물론 일부겠지만)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고위 공무원이나 요직의 법조인들, 혹은 정치인들의 생리를 전부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사고 과정과 인식의 범위 자체 뿐만 아니라, 소위 '특권'으로 읽혀질 수 있는 문제 의식에 있어 아무런 죄의식이 없다는 것은 엘리트들의 도덕적 기준 및 법의 평등이라는 관념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많다는 점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과거 존 듀이는 시민 각자가 '정치적 분별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래쉬 또한 시민들이 분별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갖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얼마전에 읽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인용하던 크리스토퍼 래쉬의 사례가 문득 떠오릅니다. 사실 저는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 시점부터, 포퓰리즘이 어떤 정치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조로 자리매김하면서, 극단의 정치가 암세포처럼 자양분을 얻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마누엘 카스텔이 예견했던 '온라인의 혁명'이 정치적 발전에 기여했던 것이 아니라, 결국엔 사익 추구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정치의 음울한 추락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신들의 발언을 쏟아낼 수 있는 매체들이 기술적으로도 발전했고 심지어 이를 기반으로 경제적 이익 추구가 가능하게 됩니다. 마크 트웨인이 자신의 짧은 단편을 통해, 껍데기에 불과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정치 혹은 사회 전반을 냉소했던 장면도 떠오르는데요. 어떠한 왜곡된 '스피커'를 사회의 정화작용으로 마땅히 도태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발언과 심지어 그 사람의 경제적 이익까지 챙겨주며, 그의 뒤를 봐주는 '분별력을 잃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은 그만큼 이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위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선 그 사람은 자신의 '예의 발언'이 표현의 자유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개인의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에 있어 매우 중요하죠. 표현의 자유가 없는 사회는 그야말로 죽은 사회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의 표현이 법이 인정한 '제한과 의무'에 저촉되지 않는지, 한 개인의 위치로서가 아니라, 그가 맡고 있는 직위에 따른 '제한과 의무' 범위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었는지, 이를 법적으로 판단해 보는 것은 체제의 안위와 정치의 온전을 위한 그 대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법정에서 판사가 자리에 들어설 때, 법정의 모든 사람들이 몸을 일으켜 판사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나, 그의 말에 경청하고 그가 조직하는 법정에 기꺼이 수복하려고 하는 것은 그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법의 공정한 대리를 맡고 있는 '대리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판사가 심리하는 법정의 판단을 그 고위직도 아무런 사심없이 응할 의무가 있으며, 이것은 시민의 의무이자, 그야말로 법의 평등을 존중하는 자신의 마음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정치의 범위 안에서 벌어진 일들은 왠만하면 정치의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때론 정치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들은 무엇보다 시민들이 아닌 당사자들의 의견에 따라, 법의 판단을 받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 정치적 당사자들이 시민들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아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또한, 정치에 속한 인사들이 정치적 이익과 경제적 이익 두 양자를 엄격히 분리하고, 도덕적으로 관리하거나, 스스로 그 양자가 협력하게 되는 일은 지양해야 했으나, 실상은 이 모든것이 권력의 행태로 변질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면에서 법의 판단은 더 가혹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심각한 정치적 대결구도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의 '동업자 의식'처럼 그러한 동조 의식이 결여된, 작금의 정치 무대는 그야말로 정치적 독립이 흔들리는 양상으로 자초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 이 당사자들에 의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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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없는 사회 - 무한한 욕망의 세계사
다니엘 코엔 지음, 박나리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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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코엔은 1953년 6월, 튀니지의 튀니스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약사인 어머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프랑스 중남부의 오트루아르 주의 생디디에앙벨레에서 기초 교육을 수료한 후, 1973년에 프랑스에 소재한 그랑 제꼴 가운데 가장 명문이라고 볼 수 있는 노르말 쉬페리외에 입학합니다. 이후 1976년에 수학 전공으로 학위를 수여 받고, 3년 뒤인 1979년에는 경제학으로 프랑스 국립 박사 학위 (DND)를 취득합니다. 또한 그는 1986년에도 파리-낭테르 대학에서 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데요. 동시에 1981년부터 1982년, 1983년부터 1984년까지 미국 하버드 대학의 방문 교수로도 재직했습니다. 그는 앞선 교수 이력 이외에도, 1997년부터 2012년까지, 총리와 함께 경제 분석 위원회 (CAE)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국가 부채 전문가로서 라자드 은행의 고문으로 그리스 총리와 에콰도르 대통령에게 국가 부채 협상에 대한 조언으로 유명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프랑스아 올랑드의 지지자로서, 프랑스 내 수많은 경제학자들의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사회적 족적을 남긴 코엔은 2023년 7월, 혈액 질환으로 한창 활동할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e monde est clos et le désir infini"로 지난 201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일독했던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현대'에서 다니엘 코엔이 수차례 인용되었기에 이번에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국내에 번역된 그의 논저 가운데, '악의 번영'은 꽤 많은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는데요. 이번에 소개할 이 글은 인류와 함께 시작된 생산과 그 수단의 증대 그리고 그로 인한 비약적 인구 증가를 바탕으로 한 경제사의 개요로, 경제학이 익숙치 않은 독자들이 보기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비교적 수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코엔은 자신의 논증을 위해 '인간의 역사' 가운데 시기 별로 요약하고 있고, 더욱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로베르 카스텔과 같은 많은 학자들의 글을 직접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책을 단순히 광범위한 경제사나 혹은 사회사를 축약한 내용으로만 보기에는 어폐가 있기도 한데요. 단지 인간의 합리성이라는 주제로 경제적 사회발전사에 국한되지 않고, 계몽주의가 어떻게 경제적 인간에 기여했는지를 논하면서, 인간이 이룩한 생산의 발전과 사회적 부의 증대의 과정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상세히 고찰해 보는 것이 주된 출판 의도로 볼 수 있겠습니다.

합리성의 체계적 경쟁으로 말미암아, 저자인 코엔의 분석대로 서양과 동양의 격차는 소위 칭기즈 칸의 제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판단됩니다. 여기서 그는 이 '유목민 제국'의 이상하리 만큼 비정상적인 영토적 야욕과 서쪽으로의 진출이 상대적으로 중국의 경제를 초토화 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유목민의 약탈 경제에 그동안 중국 왕조가 구축해 왔던 농경 경제를 비롯, 사회적 경제가 가히 뿌리 뽑혔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더욱이 유럽의 경제 변혁을 이끌어 낸 주요 사건들 가운데, 14세기의 흑사병은 당시 봉건제도에 기반한 유럽의 사회 경제를 대혼란에 빠뜨렸다고 진단하는데요. 일종의 흑사병이 유럽의 임금 노동 체계를 아예 재설정하기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급격한 노동 인구의 감소는 그런 여파를 초래할 수 있겠죠. 즉, "흑사병의 위기는 유럽 전역에서 임금 인상을 촉발했고 평균 임금은 평소 수준에 비해 두 배로 뛰어올랐다"고 그는 뒤이어 서술합니다. 또한 저자는 이렇게 수세기에 걸쳐, 인간의 노동 가치라는 소위 임금 상승이 영국의 산업 혁명에 영향을 끼쳤다고 논의를 확장하여,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단편적으로 대부분 당시의 산업 혁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 혁명'으로 비롯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그 이전의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생산 발전에 이바지했던 분명한 기여와 이러한 체계적 시스템이 기존의 변화된 신념과 함께, 전세대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급격한 인구 증가에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도 중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 연유로 토머스 멜서스의 기존 연구들이 이러한 맥락에서 한때 주목을 받은 이유일 텐데요. 그렇게 알려진 인식은 뒤이어 등장하는 '서구 유럽의 급부상'과 매우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의 논증은 꽤나 정교해서, 어느 정도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전통적 자본이 관여하게 되는 막대한 생산물의 증대는 그전에 볼 수 없었던 기계와 그것이 성공적으로 조합된 산업 혁명의 폭발적 확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노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요. 흔히 '러다이트 운동'이 영국에서 발생한 극명한 사회 운동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기술 발전에 대한 저항'은 사실상, 러다이트를 끝으로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한정적인 세계사적인 측면에서는 말이죠. 이는 한참 후에 등장하는 포드주의에 이르러, 인간의 노동이 사회적 협상과 기업의 권력 경쟁을 통해, 그 사회적 의의가 점차 축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많은 사회학자들은 그저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른 문명의 과실과 삶의 조건이 비약적 개선되었던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는 역설적이에도 인간의 원초적 노동력에 대한 하향적 재평가로 수정될 수밖에 없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차츰 산업 전반에 도입되었던 '기계'들의 존재로 말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이행은 평범한 인간들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파고였고, 이 지점에서 저자인 코엔은 직접 인용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뉴딜 시대의 극적인 사회적 타협을 제외한다면 전통적인 노동 자체는 과하게 말해서, 종속적 지위로 격하당했다고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코엔은 자신의 이 글에서 꽤 신중하면서도 특별한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데요. 과거 프로테스탄트 혁명을 거치면서, 전유럽 사회는 기존의 종교가 분리되는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계몽주의가 세속화와 함께, 세계는 그 전과 다른 무언가를 추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이는 인류에게 있어 본격적인 '진보'의 조건에 대한 사실상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확장된 논증에서 인류가 종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마자 계몽주의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이러한 변화된 상황이 소위 생산 수단의 발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진보'에 대한 감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종교 혁명이 거의 노예 상태에 다름 없었던, 인간에게 종교의 억압을 걷어내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막스 베버가 인식한 프로테스탄트 혁명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뒤이어 나오는 "계몽주의는 전반적으로 물질적 진보 개념을 경계하는 태도를 유지했다"는 코엔의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흔히 (경제적) 합리성과 계몽주의와의 상관 관계를 논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인식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분석이기도 한데요. 더욱이 코엔은 후에 등장하는 걸물인, 애덤 스미스가 이 '진보'의 개념을 정신적 의미로 받아들일 생각을 못했다는 평가에 꽤나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애덤 스미스는 일의 전문화가 노동자들의 도덕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해, 이들을 향한 도덕 교육이 사회적으로 지원되어야 한다고 여겼는데요. 이처럼 스미스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작은 면에서조차 상반된 인식이 존재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굳이 '도덕 감정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스미스에게는 노동이 인간을 예속하게 만드는 여느 '진보'에 대한 도덕적 쇠퇴를 우려했던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코엔은 일종의 동어 반복일수도 있겠지만 후기 자본주의가 구축한 약육강식, 승자독식과 같은 불평등적인 분배에 대해, 비판을 가하면서,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에 놓인 중산층이 과연 '민주주의 이상'에 있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표합니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 이후, 녹록하지 않은 사회 환경에 따라, 점차 중산층의 감소로 이어지고 이들의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과연 민주주의는 온전할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과 동일한 맥락으로 여겨지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핵심 사항으로 발전된 후기 자본주의 이후의 모습이, 시장에서 소비를 해나가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식비, 주거비, 의복비, 교통비"가 소비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에 시민이자 소비자인 우리가 어떠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새삼 깨달을 수가 있었는데요. 이에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를 인용한, 코엔은 "초고소득을 올리는 소수의 인원이 빈민층의 소비재를 무료로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식으로 만사가 진행된다"는 문장으로 '시장의 구매'가 본질적으로 새로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은, 실질적 소비에 대한 허황된 전망으로 가늠해 볼 수 있겠는데요. 이처럼 소비에 대한 진정한 차별, 시장에서의 그런 소비들이 단순히 판매를 넘어,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는 일자리 창출로 매번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일종의 진실을 드러내게 만듭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허망한 구호에 익숙한 현대 사회와 그 양태에 대해, 저자는 르네 지라르를 인용하며, 소위 이중 구속 double blind 을 바탕으로 분석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벌이는 모순된 명령 체계로, 우울하게도 이런 측면의 모순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인간의 욕망과 자아 실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장치로도 읽힙니다. 아버지나 아들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일방적 상황을 자초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결코 앞선 양자를 만족 시킬 수 없는 현실을 콕집어 냉소하는 것을 넘어, 이러한 진술이 오늘날 사회적 인정을 바라는 개인들의 욕구, 그리고 그것이 기반이 된 정체성 실현에 속지 않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를 달리 언급해본다면, "서구 사회를 가로지르는 정치적, 도덕적 위기는 성장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사실에 많은 빚을 지고 있거니와, 시장이 기반이 된 자본주의의 명백한 한계, 이를테면 돈과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코엔은 덴마크 모델을 일종의 검토할 만한 대안으로 보고 있었는데요. 바로 덴마크에 거울처럼 프랑스를 비춰, 자신의 조국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고찰해 보고 있습니다. 과거 프랑스는 유구한 역사에서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국가였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하고, 마치 "보수주의자들이 경제자유주의와 동맹을 맺어 좌파에 대항했던 것"처럼, 프랑스 역시 거듭된 세계화의 주축 국가로 나아갔다고 증명하고 있었는데요. 이들 프랑스인들이 남들과 비견했을 때, 스스로 평등하기를 원하지만, 다른 이기적인 측면에서 남들과 진정 평등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역설 자체는 세계화 시대의 개인주의적 욕망과 이기심의 추구가 그리는 세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저자는 글 후반부에서 프랑스의 퇴직연금제도의 불확실성과 빈민층을 게토화시키는 일련의 사회화 과정, 그리고 '족내혼'이라는 단어로 설명되는 비슷한 계급 간의 동질혼을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 후기 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분리'를 타파하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런 프랑스의 과제는 서구 선진 국가들의 거의 동일한 (어두운) 유산으로 시민 사회가 계층과 계급으로 분리되는 상황을 더욱 고착화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의 파급은 거의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몇 세대에 걸쳐, 그저 자본주의의 당면한 모순만으로는 국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파국'은 입 밖으로 내뱉는 것조차 두려운 일이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정치 또한 한 묶음으로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앞선 '게토화'와 철저히 분리된 계급 간의 영역 고착은 바로 음울한 전망을 대변하는 소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래할 진정한 정치의 위기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예측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최종적으로 코엔이 후반부에 논증하는 소위 '과제들'은 분명 중대한 의미 내지는 의미심장한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지속적인 고성장을 기대하지 않는 자기암시 요법보다는, 장기간의 성장 변화를 예측하는 일은 단 10년의 단위로도 불가능함을 받아들이고, 경제의 파란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고자 행동해야 한다"는 그의 조언은 우리 모두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과거 68혁명의 여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르주 바타유에 대한 향수는 흡사 진보적 프랑스 지식인들의 전형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바타유가 그동안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 이 책을 통해서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 변화에 떠밀려온 인류는 이런 유의 노력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며, 변화의 실질적 의미를 언제나 나중에야 깨닫곤 했다.

18세기 말에 멜서스는 인류 역사를 ‘식량이 풍부할 때 인간은 그 수를 불린다‘는 극도로 단순한 메커니즘으로 요약했다.

수치심의 지배를 받는 사회는 타인의 시선이 가하는 외부적 압력에 속박되기 마련이다.

금리 또한 추락하고, 득을 보는 것은 금융 혹은 부동산 자산뿐이다. 따라서 임금 디플레이션이 자산 가치 상승을 야기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첫 번째 변천은 막스 베버가 말하는, 사회의 주요 조직 원칙으로서 주술 혹은 신앙이 이성에 자리를 내주는 ‘세계의 탈마법화‘에 해당된다.

두 번째 근대성, 탈물질주의적인 근대성을 향한 희망은 더더욱 혹독한 현실에 격파당할 처지에 있었으며, 과거 모욕당했던 산업사회를 향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더는 과거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미래 계획에 따라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처럼 스스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순전히 인간만의 능력, 그리고 세상을 개선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리켜 루소는 ‘개선 가능성‘이라고 일컬었다.

경영자와 피고용자 간의 이익 담합을 일체 막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거버넌스를 제정했다. 경영자를 임금노동자에서 제외한 뒤 그의 보수를 기업의 주식 성과에 연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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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 현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필로소픽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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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1925년, 폴란드 제2공화국의 포즈난에서 유대교를 맹신하지 않는 폴란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939년에 폴란드가 기습적으로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의 가족은 동쪽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바우만은 소련이 통제하는 폴란드 제1군에 스스로 입대하여 정치 간부로 일하기도 했는데요. 그와중에 바우만은 콜베르크 전투와 베를린 전투에도 참전하게 됩니다. 이런 군사적 공로로 1945년 5월, 바우만은 용맹십자훈장을 받습니다. 폴란드 국가기록연구소 (IPN)에 따르면, 그는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우크라이나 반군과 폴란드 국토군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군사 정보 부대인 내부 보안대 (KBW)의 정치 장교이기도 했는데요. 이때의 이력은 평생동안 그를 따라다니게 됩니다. 이미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에도 자신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고 밝혔는데요. 이때의 이력은 어느 정도 베일에 가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가 내부 보안대에 근무하는 동안 부친이 이스라엘로 이주하기 위해 바르샤바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에 접근한 후, 갑자기 불명예 제대에 이르게 되는데요. 바우만은 부친의 시오니즘적 성향을 공유하지 않았고, 실제로 강한 반시오니스트였기 때문에 갑자기 군에서 쫓겨난 이후,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이 시기 동안, 그는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54년에는 바르셔바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68년까지 대학에 머무르게 됩니다. 언급된 1968년에는 폴란드에서 큰 정치적 위기가 발생하게 되는데요. 결국 같은 해, 3월 바우만은 교수직을 잃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1968년에 그는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조국인 폴란드를 떠나게 됩니다. 2년 뒤인, 1970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리즈 대학에서 석좌 교수로 임용되고, 몇 차례의 논문 발표로 인해 영국 학계에서는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런 그의 학문 활동으로 말미암아 199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반세계화 운동과 그의 대안으로써의 정치철학적 요구에 바우만은 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바우만은 평생에 걸쳐, 금융 자본주의에 따른 노동자 계층의 붕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 공동체 개념의 공동화, 전반적 사익 추구에 따른 사회의 식민화에 큰 사명을 갖고 연구를 지속해 나갔는데요. 바로 그의 사상적 원류가 된 '액체 근대', 혹은 '유동하는 근대'를 잇게한 이 논저는 원제, "Liquid Modernity"로 지난 200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초도 번역은 같은 해인 2000년에 이뤄졌으나 현재는 절판되었고, 최근인 2022년, 다른 출판사에 의해 개정판이 나오기에 이릅니다. 다만 개정판 역시, 역자는 동일합니다.


2012년에 나온 개정판 서문이 실려 있는 이 논저는,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본질적 고찰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계몽주의적 함의가 포함되었던 예전의 '단단한 근대' 혹은 '고체 근대'가 상실한 사회적 기반 등을 설명한, '액체 근대'라는 설명은 당시 어느 사회학자들조차 개념화하지 못한 이론이기도 한데요. 예전의 근대가 어느 정도 인간 해방의 목적성을 자의반 타의반 갖고 있었다면 보다 추상적이고 복잡해진 인간 해방의 담론과 더불어, 자본주의가 우리 일상으로 녹아들면서, 스스로 노예가 되는 삶에 대한 바우만의 비판적 접근은 충분히 우리 시민들에게 깨달음을 전해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점은 앞선 자본주의적 이행 내지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의 구축이 도출한 "모든 책임은 개인의 문제다"라는 전지구적 엘리트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원했던 사회 체제적 이행에 이익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전반적 인식은 그 자체로 불행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총체적인 사익화 과정과 그에 따른 개인주의와 개인화가 뉴딜 이후의 복지 국가를 철회하면서 더 많은 자본의 이익을 거두기 위해, 국가에 로비를 한 자본가의 책임인지 아니면 자유주의가 보수주의와 결탁해,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이라는 변형된 자유주의의 맥락 때문인지는 단언을 내릴 수는 없는데요. 다만, 오늘날의 이 첨예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모순과 이것의 대안이 원천적으로 '개인'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막혀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바우만의 집중적이고 누군가 보기에 따라 편집증적으로 느껴지는 대다수의 진술들이 얼마나 설득력을 갖고 있는지 누구나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엘빈 토플러의 축약된 주장처럼, 이런 거대한 흐름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과거의 유산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인식했던 것처럼 근래의 '액체 근대'는 가벼움과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뉴딜 시대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결합을 유기적으로 더 강화한 큰 정부의 존재도 그렇거니와, 기존의 체제가 차츰 후퇴하게 됨으로써, (경제적 요소를 포함한) 사회적 우위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명확해 졌다고 봐야 합니다. 즉, 바우만의 분석대로라면 부와 권력을 가진, 소위 상위 계층 혹은 지배 계급은 여전히 자신들의 자원을 바탕으로 '딱딱하고 균질한, 거의 흔들리지 않는 근대'를 몸소 체험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다른 계급과 일반 시민들은 과거 근대가 약속했던 사회적 이행과 그에 따른 공동체적 이익, 그리고 삶의 온존이 전반적으로 철회된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앞선 엘리트들의 면모는 2장의 '개인성'에서, "자원을 갖춘, 선택의 기술에서는 가히 장인이라 할 엘리트들의 사는 방식"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던 밀턴 프리드먼이 보기에도 저런 모습은 가히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바우만은 1장에서, "개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당신이 인생을 살고 일을 수행할 때 따를 만한 범례를 다른 개인들에게서 가져올 수 있을 뿐이며, 다른 예들이 아닌 바로 그 예를 신뢰하여 선택함으로써 얻은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이 온전하게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고 에둘러 증언하고 있는데요. 바로 이 지점에는 1장에서 주요한 관점으로 논증되어, "오늘날의 현대는 해방 작업을 중간 계층과 밑바닥 계층에게 넘겨주는 의무 말고는, 그 어떤 '해방' 의무도 짊어지지 않은, 일종의 머리가 가벼워진 근대이다."라고 설명하는 이유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 사회적 지배 계급은 인간 해방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철저하게 자신들의 자원을 유지하고 사용하여, 자본주의가 원치 않게 초래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유동성을 방지하는 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금 여기서 강조할 만한 것은 개인화는 하나의 정해진 운명이지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본주의가 만든 일종의 신념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물론 이 진술은 어느 정도 디스토피아적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이는 "법률상으로 개인이 된다는 것은 그 개인의 비극에 책임을 질 다른 사람이란 없고, 개인의 실패는 오직 그 자신의 방만함과 태만에 원인이 있으며, 죽어라 노력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뼈저린 깨달음"으로 귀결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개인성과 개인화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합리주의이며, 근본적으로 강고했던 이런 메커니즘은 지금도 역시, 흔들림이 없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뒤이어 나오는 '사익에 의한 공익의 식민지화'라는 표현이 실질적으로 크게 와닿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2장에서 보여지는 액체 현대의 진면목이자 큰 본질인, '마거릿 대처의 저 악명 높은 구호'도 빼놓을 수가 없을 텐데요. 그녀의 '사회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은 바우만의 분석대로, 변화하는 자본주의 속성에 대한 기민한 통찰인 동시에 의도성이 있는 선언이자 자기 실현적 예언이라는 목적에 비로소 이어지게 됩니다. 우스개 소리로 과거 마거릿 대처가 얼마나 루퍼트 머독의 영향력 하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선 논리들을 그저 정치적 풍문으로만 치부될 수는 없을 겁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념이 대처와 레이건에게 얼마나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바우만의 통찰대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결탁'임은 거의 분명해 보이니까요.


이미 슬라보예 지젝도 예견했던 바대로 우리가 지나온 이 시대는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강력한 자본주의적 소비 사회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바우만의 유작으로 여겨지는 '레트로토피아'에서도 그랬고, '소비하는 삶'을 비평한 다른 논저에서도 그렇듯, 이미 시민으로서의 삶과 소비를 하는 개인으로서의 소비 중심주의의 양 경계가 무너졌고 오로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가치 실현과 소비적 덕목에만 집중하는 오늘날 개인들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앞서, 침중한 의미의 "공익이 사익의 식민지화'에 이르렀다는 것을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도 여겨지는데요. 이를 다른 시선에서 봤을 때, 콜린 크라우치가 경고했던대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의 시녀가 되었다는 점은 명백하고, 이렇게 도출되는 결론도 앞선 진술과 거의 일맥상통합니다. 이런 소비적 시대의 메타포이기도 한, "소비적 세상에서는 인간에게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고, 매물로 나와 있는 매력적 목표들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메시아적 일례들과 연결된 이 다음의 논증들은 우리가 얼마나 일방적이고 무비판적인 시대에 몸을 담고 있는지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데요. 우리가 겪는 삶의 경주에서 소비가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자본주의가 더 강한 권력을 유지한다는 점,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본이 이익을 산출하고 있다는 부분은 앞으로 미래의 수십 세대가 여전히 맞이할 세계로도 읽힙니다. 일전에도 바우만 소비와 개인의 자아 실현이 자본주의 하에서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논증한 바가 있었는데요. 이처럼 사적인 영역에서의 자아 성취가 삶의 주요 목표가 되었으며, 이러한 맥락의 발전 과정은 시대를 넘어 더욱 강화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소비 그 이상으로 말이죠.


이처럼 정복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근대, 그것이 주가 된 근대의 유동성은 그저 외연을 가진 허울 좋은 실체로만 작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수의 개인들에게는 역설적이게도 쫓고 쫓기는 게임이 되는 것은 분명 예정된 일이고, 2장과 3장에 걸쳐, 증명되는 가운데, 소비와 소비주의가 이끄는 일종의 '게임의 룰'이 인간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하는 것을 넘어,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매달리게 된다는 점은 꽤나 두려운 모습입니다. 원칙적으로 이렇게 점철되어 왔던 체제의 확고한 이행은 아마도 정치가 제자리를 지키고 제 역할을 해내었다면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공익에 대한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여 인간이 그저 소비 만능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재교육에 나서는 등의 여러가지 대안을 토론할 수는 여지는 충분했는데요. 그렇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의 회의적 시선처럼, 심지어 "우리 주변에는 이미 자신의 지갑 사정에 따라 투표를 했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이는 자본주의 하에 놓여진 민주 정치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보여주는 지표이자, 액체 근대가 왜 현실 정치를 붕괴시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인데요. 뒤이어 나오는 공동체와 민족주의에 대한 진술에서조차 오늘날 힘을 얻고 있는 '극단주의 정치', 그 예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오늘날 정치가 예전만큼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점도 우리는 주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바우만의 말대로 개인과 개인주의에 대한 사실상의 교조주의화와 이것을 아우르는 사익 추구와 함께 맞물린 소비주의 전반의 결합이 자본주의의 필연적 요소로 몰고 가는 것은 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사회적 이행이든 간에 비판을 막을 것은 없고, 또한 마땅한 비판이 있어야만 기본적 사회라든지 혹은 공동체에 대한 인식, 더 나아가 공익에 대한 관념이 제자리를 찾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우리가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사회 전반에는 무엇보다 '비판의 성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시금 불행한 모멘텀이긴 하지만, 우리가 동굴 안의 원시인처럼, 스스로 자기 혐오에 빠져 이러한 액체 근대가 초래한 실상에 눈을 감게 된 것은 하나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대처가 이러한 사회적 현실에 몸을 담고 있는 시민들을 보고 무덤에서 크게 웃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대가 추구했던 건전한 공동체주의가 근본적으로 내파되었다는 진술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의 엘리트들이 오로지 자신만 잘살면 된다는 이데올로기를 확신하며, 그러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비웃을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공동체 관념이 무너졌기 때문일겁니다. 과거 데일 카네기의 언급대로 돈을 가진 부유층들이 도덕의 문제에서 자유로워진다면 그 자신에게는 불행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이것이 드러나는 일상을 원천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는 일부 계층들의 태도는 순진할 정도로 위험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소수의 지역에 거대한 장벽과 무장한 경비를 세워, 또 다른 사회를 만드려는 계획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안위에 도움이 될지는 거의 자명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러한 행동들이 이미 선진국의 여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고 이렇듯 바우만의 경고대로, 빈민층을 과거 게토로 몰아내는 식의 파시즘이 사회 곳곳에서 대두할 가능성도 그만큼 배제할 수 없을 겁니다. 이는 액체 근대가 드러내는 가장 파멸적인 측면의 모순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어지는 5장의 도입부이기도 한, "결국 민족국가의 성공은 자기 주장을 하는 여러 공동체들을 억압한 덕택이다"는 문장은 액체 근대에서 도드라진 민족주의의 어긋난 면을 드러내는데요. 이에 바우만이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역사의 뒤안길에 놓인 공동체주의는 현대 삶의 가속화되는 '액화'에 대한 지극히 예상 가능한 반응, 개인의 자유와 안정 사이의 깊어만 가는 부조화에 대한 반응"으로 사실상 귀결되었습니다. 그동안 액체 근대화의 상황에서 인간 사이의 유대는 가혹하리 만큼 유리되어 왔는데요. 단순히 같은 이웃인 시민에 대한 책임의 부재를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개인화된 신자유주의 시대에 다시금 공동체주의가 주목 받고 있는 현실 자체는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를 캘리니코스식으로 풀어보면, 예를 들어 인종과 종교와 같은 교집합으로 구성된 공동체, 그리고 이를 기조로 확산된 민족주의가 유럽에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부터, 심각한 변화를 맞게 되었습니다. 물론 과거 세계 2차 대전 중에 보였던 참혹한 전체주의적 망령은 아니라 하더라도 지금 지속적으로 보여지는 저들의 모습은 우려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기존 사회에 이민으로 촉발된 이질적인 공동체의 등장과 더이상 공화주의적인 공동체 담론으로 섞이지 못하는 한 국가 내의 성질이 다른 여러 개별 공동체의 등장은 캘리니코스의 말마따나, 자본주의의 모순이자 심각한 문제였던 경제적 불평등의 분노를 다른 집단에게 돌리게 되는 폭력이 되었는데요. 만약 우리에게 몇 세대에 걸쳐 이식된 근대성이 유동하는 그것이 아니라, 사유하고 행동하는 삶이 기반이 된 고체의 근대성이었다면 어느 정도 조정과 분별이 가능했을 겁니다. 저는 개인주의와 그런 개인화로 촉발된 사회 체제의 변혁이 마치 사익에 의한 공익의 식민지화를 맞은 것처럼, 공동체주의 자체가 철지난 이상주의로 취급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신자유주의자들이 읊듯, 타인을 위한 공동체나 그런 인식 전반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것을 넘어, 자유 시장에 해가 되지 않는 자본의 유연성을 위한 '사회 대개조'에 전자가 확연히 방해가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일전에 읽은 한스베르너 진의 '카지노 자본주의'의 비평대로 바우만 역시, 소위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카지노 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가볍게 말한다면 인생을 한방의 잭팟에 맡기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세계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가 인간을 그저 소비의 주체로 몰아간다면 흥청망청 살아가며 이상을 잃은 삶의 자체는 누구에게는 천국이고, 다른 누구에게는 지옥과 다름 없을 겁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1장 말미에서, "진보주의자를 비롯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그 진정한 해방에 '공적 영역'과 '공적 권력'이 더욱 요청된다고"고 강조했는데요. 이제는 사적 영역 만큼이나 공적 영역을 되살리는 일에 시민들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요청되고 이를 지원하는 것이 정치의 새로운 사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지리멸렬했던 진보주의를 여기서 새삼 꺼내고 싶지는 않지만, 과거로부터 이어진 진보주의 운동 자체가 공적인 영역의 책임을 잃어버린 점이 진보가 사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된 연유일 겁니다. 이와는 별개로 바우만은 우리에게 한 가지 경고를 하고 있었는데요. 전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는 전지구적 엘리트들이 국가의 경계나 사회의 다양성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소유한 돈과 권력의 힘으로 세계를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5장 이후의 현실적 논증들은 중대한 정치적 의미로 여겨집니다. 자유 진영의 필연적인 세계화 운동은 바로 이러한 이면을 애초에 내포하고 있던 게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처럼 바우만의 핵심 사상이 잘 담겨 있는 이 논저는 문제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파헤치는 동시에, 우리에게 진지한 각성을 요구하고, 이후 정치가 붕괴되어 발생하는 배타적 민족주의 다음의 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들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그가 바라보는 현실 인식은 대체로 암울한 측면이 있지만 그만큼 더 많은 시민의 각성과 권력과 시스템의 대안이 필요하다는 후반부의 요지는 충분히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액체 근대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스스로 현실을 숙고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설명한, 자본주의적 대안 찾기에 바우만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근본 이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점점 더 공급이 부족해지는 것은 우리가 순응하고 안정적 지향점으로 선택할 수 있는,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인도해줄 수 있는 행동 유형들, 규약들, 규칙들이다.

우리는 영토권과 정착의 원리에 가해지는 유목주의의 복수를 목격하고 있다. 유동적 근대 단계에서는 다수의 정착한 사람들이 유목적이고 탈영토적인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을 근심케 하는 더욱 암울한 예감은, 자유를 실행하는 데 야기될 법한 여러 곤경을 놓고 볼 때, 사람들이 자유로움 자체를 싫어하고 해방의 전망에 오히려 분노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에밀 뒤르켐은 그러한 홉스주의적 관점을 하나의 포괄적 사회철학으로 발전시켰는데, 그 철학에 따르면 가장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만든, 가혹한 형벌체제가 뒷받침하는 ‘규범‘이, 가장 끔찍한 두려움과 대상이었던 노예 제도로부터 인간을 진정으로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사적인 것들‘을 식민지화하여 ‘공적인 것‘이 시작된다는 말은 이제 옳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적인 것들이야말로, 사적 관심과 사적 걱정, 사적 추구의 언어로 온전히 표현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내몰아버리면서 공적 공간을 식민화하고 있다.

오늘날 진정한 해방에는 ‘공적 영역‘과 ‘공적 권력‘의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 요청된다. 사적인 것들이 침해하지 못하도록 보호가 절실해진 쪽은 이제 공적 영역이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합리적 능력이라는 것이 감정적 영향들과 또 그만큼 비합리적인 성향 때문에 끊임없이 침식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목적에 대한 이의 제기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의혹을 던질 수도 있겠다.

정체성의 헐겁고 ‘연합적‘인 위상, ‘쇼핑하고 다닐‘ 기회,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고르고 나눌 수 있는 기회,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오늘날 소비자 사회에서는 자유를 의미하게 되었다.

타인의 악의적 의도와 사악한 음모를 탓하며 자신들의 불행과 수치스러운 패배, 삶의 좌절을 설명하는데 열심인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늘 넘치도록 많았다.

동질성에 대한 지향이, 차이를 척결하려는 노력이 효과적일수록, 이방인들에 대할 때 편안함을 느끼기 어렵게 되고 차이는 더욱더 위협적이 되며 이것이 낳는 불안은 더욱 깊어지고 강렬해진다.

사회 분화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 영구적이고 파괴할 수 없게 된 사회 분화의 핵심적 토대는 즉시성에 접근하는 데서의 차별성이다.

계몽주의 유산을 자유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사태를 잘못 파악한 것이거나 오도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은 언제나 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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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20대는 학교와 동기들, 그리고 술 보다는 오로지 '헌책방'에 있었습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는 서울에도 제법 많은 헌책방들이 존재했습니다. 제가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좀 특별한 사연이 있는데요. 당시에 헌책방 모임에서 만난 어느 분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중으로 저보다도 그저 몇 살 위였지만 정말로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아주 다방면의 지식을 갖고 있었죠. 그래서 그때는 "저 형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헌책방을 다니기 시작한 초기에는 다 읽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책을 사 모았습니다. 알바비와 용돈의 거의 대부분이 책을 사모으는데 쓰였죠. 덕분에 옷도 면 티셔츠 한장과 면바지 딱 하나로 충분했고, 돈 천원도 귀한 그 시절에 매우 궁핍한 시간을 웃으며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끔찍합니다. 후후.


갓 성인이 된 무렵부터 책을 잡다보니 쉽게 그만 둘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책을 읽으셨던 것도 아니고 가정 분위기도 책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때 친구들이 책 좀 그만 읽고 밖에 좀 나가라고 핀잔을 주던 기억도 나고, 군 입대를 했다가 훈련 중 부상으로 군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조정래의 아리랑 전권이 눈에 보여 반가운 나머지 미친듯이 읽었던 기억도 납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그럼에도 책은 항상 저와 함께였습니다.


얼마전 부산 여행을 갔을 때, 보수동 책방 골목을 들르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헌책방은 20대의 젊은 시절을 고스란히 바친, 집보다 가까운 존재였죠. 그렇게 퀘퀘한 냄새와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책방의 서가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책 주인장 분들께 몇 권의 책을 보여주며 책값을 여쭤보니, 알라딘 중고서점의 책값과 별반 차이가 없더군요. 보수동을 처음 방문했던 2003년만해도 만원이면 몇권이나 살 수 있었는데,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판매하는 책값이 비싸서가 아니라 예전에 경험했던 헌책방의 모습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비즈니스적 측면의 그 자체였기 때문일겁니다. 그러니까 그 돈이면 그냥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주문을 해야겠다는 현실적 절충이라고 해야할까요.


예전에 주변 지인들이 저에게, "그렇게 많은 책을 읽어 너의 삶이 바뀌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제법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무엇보다 세상에 눈이 떴다고 해야할까요. 누군가에 이익으로 이용당하는 지식과 그 본질에 대해 이제는 그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머리가 명민하고 영리한 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익히 알게 되었죠. 무엇보다 어느 사람의 기름칠이 된 언변에 쉽게 넘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교적 친밀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중하고 겸손을 표명하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일겁니다. 요약하자면 그동한 읽었던 글줄 때문에 저는 그야말로 음흉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 SNS를 하지 않으니 카페에서 책을 읽던 중에,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들이 있어 제 서재에 몇자 적어 보게 되었습니다. 글을 다 쓰고 읽어보니 얼핏 부끄러운 마음도 듭니다. 시간이 좀 지나서 지금보다 더 낯뜨거운 생각이 들면 글을 없애 버릴 수도 있지만 옛 추억을 떠올리는 기분으로 올려 봅니다. 저의 20대가 따뜻하고 아름다웠는지는 불확실하지만 헌책방을 다녔던 기억 만큼은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기억을 반추하며 오랫동안 단물을 빠는 것이 인간의 고집적인 측면이라고 하지요. 저 역시 그런 범주에 하등 벗어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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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5-09-06 0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을 참 좋아하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긴 힘들더군요. 책은 읽었으되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의지도 능력도 없으면서 주절주절 말만 앞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적벽의 제갈량 앞에서 넌 무슨 책을 읽고 뭘 배웠길래 그다지도 자신만만하고 오만하냐고 몰아붙이는 백면서생들 보는 느낌입니다.

베터라이프 2025-09-06 15:10   좋아요 1 | URL
간혹 글을 많이 읽는 사람들중에는 오만한 경우도 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책과 가까운 분들은 대부분 겸손한 편이었습니다. 쓰신 내용보다는 현대 사회에서도 부와 권력을 가진 계급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책과 깊은 사고를 경험하는 것을 별로 원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기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자유주의적 이행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뿌리깊은 지식과 그 활용에
대한 폐쇄적 사고가 저들에게 있는 것이죠. 그래서 책을 읽는 사람들과 그런 연유로 통찰에 가까워지는 비권력층에 대한 분노는 단순히 음모론과 같은 것이 아닐겁니다. 저도 우드로 윌슨의 사례를 알고 있어 책만 읽은 편협한 이상주의자들에 대해 연민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과 성찰, 그리고 이 세계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글을 읽으셨으면 합니다 ^^

Comandante 2025-09-07 12:01   좋아요 1 | URL
전 앞으로도 책을 꾸준히 읽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세상을 단 한치도 낫게 바꿀 순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 굶는 사람들, 나이 들어 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실천이지요. 본인이 뭘 말하고 쓰는지도 모르면서 나불거리는 사람들은 정말 혐오스럽습니다.

베터라이프 2025-09-07 19:24   좋아요 1 | URL
모두가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으면 이 세상은 그나마 살만 했겠죠. 인식과 행동의 괴리는 인간의 근원적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내가 남들과 더 많이 알아서 그런 지적 우월 보다는 글이 분명 마음을 두텁게 만들고 눈을 개안시키는 건 분명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교육한 사람이 더 많아지고 이제는 행동해야겠다는 결심이 많아지면 세상은 좋아지는 거겠죠. 그런 연유로 이제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아야하는 시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응산 옮김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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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는 1956년 2월,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납니다. 그녀의 가족은 헝가리계 유대인과 러시아계 유대인 혈통으로 특히, 외할머니 가계쪽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모친은 정통 유대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보수주의자가 되었고, 부친은 개혁주의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데요. 어린 시절 버틀러는 히브리 학교에서 유대교 윤리와 연원을 배웠고, 그곳에서 최초의 철학 교육을 받게 됩니다. 버틀러는 청소년기 교육을 거쳐 예일대에 편입하기 전, 버몬트주 베닝턴에 위치한 사립 리버럴 아트 칼리지인 베닝턴 칼리지에서 수학합니다. 이후 그녀는 예일대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영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대략 1년간, 독일 관념론과 현상학을 공부했습니다. 1993년 버클리 대학의 교수진에 합류하기 전에 웨슬리언 대학,조지 워싱턴 대학,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미국 내에서 저명한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젠더 연구학자로, 정치 철학은 물론, 제3세대 페미니즘, 퀴어 이론, 문학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런 그녀의 작업 전반은 보수주의적 기독교 문화에 대한 비판과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전환과 권리 보장에도 적잖은 기여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버틀러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법적으로 레즈비언의 삶을 살고 있고, 파트너 역시 저명한 학자이자 교수인 웬디 브라운입니다. 이들은 현재 버클리에서 함께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What World Is This?"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3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는 본문에서 수차례 등장하는 질문입니다. 이 글의 주요 배경이 되는 지난날 전세계 팬데믹 사태와 그 세대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당시의 전염병 상황을 주디스 버틀러는 철학적으로 풀어내고 있었는데요. 저는 이러한 논증 가운데 가장 와닿았던 물음은, "과연 처분가능한 인구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라는 소위 비극적 논답이었습니다. 그동안 국제정치학에서 자주 언급된 '부수적 피해'(물론 지그문트 바우만이 자주 인용했던 구조적 문구이기도 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수많은 부수적 피해와 맞물려서 말이죠.)와 오버랩되는 팬데믹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분석과 그 영향을 철학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에 대해 저 역시 동의하는 편인데요. 여기에 저자인 버틀러는 이러한 '극명한 몰락'에서 과연 우리의 삶이 어떻게 살만한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숙고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현상학의 계보 가운데, 특별히 메를리퐁티를 인용하며, 우리 인류에게 몰아닥친 팬데믹 사태를 앞선 수단으로 고찰해 보고 있는데요. 바로 1장에서 이러한 작업이 시도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꼭집어 언급한 '처분 가능한 인구'에 대해서도 '용인 가능한 죽음'이라는 매개로 이를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 국가 의료 보험 체계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의료보험의 유무로 위태로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버틀러의 가정은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아주 명확히 드러내는 사례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녀의 말마따나 이 펜데믹 사태가 그동안 인류가 겪어온 수많은 역사적 부침들과 같이 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어떤 맞이한 현상에 가까운 것이라면, 결국에는 이렇게 마주치는 현실에 있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삶을 온존할 수 있을지 무엇보다 그 부분을 숙고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버틀러는 우리가 거쳐가고 있는 현 세계를 어떤 계층들은 만족스럽고 살만하다 느낄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삶의 절망을 몸소 체험하여 흡사 대비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그레이스 블레이클리가 언급한 것처럼, 코로나는 인간 사회의 격차와 차별을 뚜렷이 드러냈고, 이는 자본주의의 무비판성과 맞물려,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수면 위에 떠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후설이 인용되기도 하지만 그의 특별한 개념인 '시간화'는 팬데믹 사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점이 됩니다. 뒤이어 도출되겠지만 인간과 인간의 상호 연결성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 연결된 사회에서 개인이 다른 개인과 접촉하게 되는 시간화의 과정은 펜데믹이 왜 쉽게 근절되지 못했는가를 밝혀주는 주요 수단입니다. 그런 연유로 여러 현상학의 개념들이 메를리퐁티의 현상에 이르러,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태를 (현상학적으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현상을 우리 인류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것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모든 것들을 우리는 분석하고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철학적이든 사회학적이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두에 등장한 "행복한 자들의 세계는 불행한 자들의 세계와는 다뭇 다른 세계이다."라는 문장은 우리에게 좀더 비상한 철학의 유용을 마련하고 제공해야 한다는 당위를 마치 요구하는 것 같은데요. 이것을 단순히 격차가 있는 삶을 표징하는 문장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혹은 계급주의적 논리로 그저 비하할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처럼 이제는 체제와 세계를 그런 식으로 돌이켜 볼 시기라고 여겨집니다. 


이미 버틀러는 철학이란, "세계를 더 정밀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라고 후반부 논증에서 밝히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우리가 이러한 비극적 사태를 겪고 난 후, "무엇이 우리가 살만한 세계인가, 무엇이 살만한 삶의 조건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물론 이것은 투박한 공리주의의 겉핥기식 논법 만은 아닙니다. 버틀러가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세계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집중하고 있지만, 2장에서 다시 인용된, 메를리퐁티의 '상호 얽힘'과 같이, 세계는 우리가 만지고 접촉해야만 인식할 수 있는 그런 매개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단순히 수용하거나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세계가 이런 현상학적 과정 자체로 작용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타당해 보입니다.

이러한 현실세계의 대체적인 관조에도 불구하고 저는 2장에서 언급된 하나의 모습에 비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를 죽게 하더라도 나는 생계를 유지하게 위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한시도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망각하지 못하게 하는 질문이기도 했는데요.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보험 유무를 체크할 계재는 없는 것이고, 그렇게 삶을 이어가는 생계 수단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 자본주의 체제의 도드라지는 단면일 겁니다. 따라서 버틀러는 우리가 살만한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삶의 조건은 무엇인지에 대해, 아주 반복적인 논법으로 우리의 행동을 요구하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이미 1장에서, 우리는 수많은 도덕적 책무를 감당하고 이행해야 하는 존재이고, 이것이 자유주의적 토대 위에 있는 관념이라고 저자는 강조하기에 이르는데요. 다시 말하자면, 이런 도덕적 책임, 타인에 대한 관심, 세계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 우리 삶에 대한 분명한 확신 등은 결국 우리가 비극을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바라봐야만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1장의 철학적 도출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팬데믹은 저자의 분석대로 우리 세계를 더 정밀하게 볼 수 있는 현미경과 같은 기능을 제공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는 '자본주의'와 '경제'를 더 우선하는 자들이 소위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와 같은 단면을 언급하며 그저 "어떤 이들"이라고 명확히 언급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스티브 배넌과 도널드 트럼프를 그 범주에 포함하고 싶습니다. 혹자들은 팬데믹 시기의 도널드 트럼프를 과거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언스의 조지 W. 부시로 빗대어 말하기도 하지만 팬데믹 시기의 트럼프는 그 태도와 결과물은 완전히 상이했습니다. 거의 최악으로 말이죠. "어떤 이들은 죽어야만 한다고 여기고 그러한 위험성을 계산하고 있는 이들은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경제를 위해서 결국 인간의 생명이 희생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는 소위 언론 기사적 평가는 지난 2019년에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누적되어 온 사회적 불평등이 팬데믹 시기에 차별적인 죽음을 부채질했다는 사실을 놓고 봐도 말입니다.  비록 저자가 지면을 따로 할애하여,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가 인도한 이 '위대한 사회'를 복합적으로 비평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찌됐든 신자유주의가 팬데믹 시대에도 전문가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경제적 인간'이라는 것은 본래 인간의 정체성이나 존엄한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교 우위에 놓여 있는데요. 아마도 이러한 사활적인 분위기에서 저자는 우리의 삶과 살만한 환경을 위해, 3장 이후의 논증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포용"으로서의 사회적 유대라는 이상주의적 관념을 다시금 소개하고 이것이 더 나은 삶과 살만한 사회를 위한 새로운 방향타가 될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2장 이후로, 버틀러는 작금의 세계가 진정한 '공동의 세계'라고 볼 수 없고 명확히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의 삶과 집단적 가치와 욕망을 실행함으로써 저항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미 얼마 전에 읽은 패트릭 J. 드닌 역시, 종래의 개인주의 만으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언급한 점은 새겨들을 만합니다. 아니, 스스로 지각이 있다고 여기는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시장의 자유'만으로 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공동의 삶을 목표로 수많은 개인들이 복잡하게 상호 얽혀 있는 사회의 본질을 인식하고 무엇보다 먼저 자본주의가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될 겁니다. 우리는 소극적으로 그 대안을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이전에 성소수자들의 권리와 인류애를 강조했던 저자 답게, 현상학에서 말하는 이런 얽혀듦을 매개로 우리의 본성과 더 나아가 세계와 지구의 안전을 모색해보는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4장은 바로 이러한 대안 제시로 이어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남성 주도성의 문화'에 대해 완벽히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동안의 사회가 이런 성적 우월주의에 입각한 기계적 합리성에 전도되어 왔고 여기에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하여, 어떻게 보면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과 공동을 위한 삶을 몇십 년에 걸쳐, 상실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저자의 제안대로 펜데믹 시기에 뜻하지 않게 희생 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에 대한 깊은 애도와 주변에 하나하나 모인 이런 개인의 삶이, 곧 사회적 삶의 집합체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므로 우리는 사적인 삶의 중요성을 과거보다 강하게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전부 '살아남은 자들'이지만 '여기 그 가운데, '사람들 사이에 얽혀든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바로 이러한 비극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교훈을 찾는다는 말이 역시나 비정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지난 사람들을 맘 깊이 애도하고, 또한 개인성과 무비판적인 합리성을 극복하여, 우리 스스로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필요한 방법들을 모색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해 보입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 세계가 대체 어떤 세계인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서도 이런 현실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삶이 "그저 견딜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기를 바란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떠한 삶이 우리에게 필요한가에 대한 논증 가운데 들어가 있는 문장이지만, 이것의 의미는 비극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세계의 지분을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공정한 수단은 결코 없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만일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변화시킨다면, 그것은 그저 세계의 한계들만을 변화시킬 뿐 사실이나 언어로 표명될 수 있는 사물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세계가 우연한 접촉에 의해서도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바이러스 전염이 일어날 수 있는 곳임을 깨닫지 못한 채 세계를 거쳐왔는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것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 단수적인 것의 문제이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의 구성 자체에도 관계되어 있다."

국가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주장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으며, 기본소득 보장과 단일 의료보험 부과체계 법안에 대한 심리 가능성은 보다 더 높아졌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그 어떤 제한도 없이 자유롭게 인간의 삶을 살아간다면, 살 만한 삶을 버리는 대가로 자유를 즐기는 것이 된다.

우리는 오히려 계속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우리의 삶 자체가 그저 견딜 만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살기를 바란다.

마치 나는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거나 그들로부터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타자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에서 완전히 고립되고 혼자 지내고 있는 개인들은 가장 위험에 처한 이들에 속한다.

무엇이 삶을 살만하도록 만드는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결코 배타적으로 우리만의 것이 아니며,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삶들, 즉 보다 일반적인 삶의 과정들을 위해 살만한 삶을 만드는 조건들이 보장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절절하게 보여준다.

달리 말해, 팬데믹 상황하에서 노동자는 살기 위해 일하러 가지만 바로 그 일이 바로 노동자의 죽음을 재촉한다.

여기서 확실해 보이는 것은 바로 우리가 더이상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행동할 수 없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신체로 체현된 자아는 이미 사회적으로 자리매김 되어서 주위 환경 및 타자들 안에서 그 자신을 벗어나 영향받고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역할은 감추어진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보다 정밀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매우 가까운 것, 매우 근접한 것, 우리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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