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 - 누가 진보를 죽였는가!
크리스 헤지스 지음, 노정태 옮김 / 프런티어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2010년 ‘Death of The Liberal Class’ 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된 전직 뉴욕타임스 기자이자 현재 비영리 미디어 센터인 네이션연구소에 재직중인 크리스 헤지스의 ‘누가 내 생계를 위협하는가’를 읽었습니다. 국역된 제목이 원래 제목과는 상이한데요. 일종의 ‘리버럴 계층의 죽음 혹은 몰락’ 이라면 번역된 제목은 ‘중산층 시민의 몰락’이 진보 및 리버럴 지식인들과 그 계층의 책임이라고 에둘러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 부분 책임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해보입니다.

1980년대 부터 미국 사회가 이전의 베트남 전쟁과 냉전시기의 국가가 다소 안보를 위해 급격히 정치적인 보수화와 경제적으로는 개인의 이기심과 시장주의에 맡기자는 신자유주의적 입장으로 오늘날까지 이러한 정치경제 기조가 미국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신자유주의적 기조와 그러한 경제 정책이 어떠한 혜택도 답보하지 않는 사기임에 들어났어도 이러한 파워 엘리틀이 견고하게 구축한 정치경제적 시스템에 ‘제도화된 진보주의자들’ 이 이런 흐름에 편승해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의 중산의 시민 계급이 특히 경제적으로 사회에서 이탈하게 된다면 이것은 심각한 상황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는데요. 기본적으로 진보와 (관습적으로 쓰이는) 리버럴 지식인들이 사회 시스템의 모순과 정부의 불합리한 정치 행태, 기업과 한층 가까워진 언론들에 대한 적극적이고 마땅히 해야하는 비판과 견제를 왜 포기하고 등한시했는지에 대한 인과관계 또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헤지스의 이 글이 인상에 남은 것은 그가 언론인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독서를 해 온 것을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원문과 많은 주석의 출처 등이었는데요. 이러한 점은 저자가 언론인으로서 겪은 체험과 거기에 주장하는 근거의 이론 등이 더해져 이런 부분이 전체적인 글의 요지를 일관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번역도 크게 나무랄데가 없어서 저는 읽는내내 편안하게 읽었는데요. 다만 저도 이 책을 구입할 때는 인지하지 못했다가 조금 검색을 해보니 2014년에 ‘진보의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신판이 재출간이 되었더군요. 혹여 책을 읽어볼까 고민인 분들은 신판으로 구입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사회와 관련하여 진보에 요구해 왔던 것은 기득권과 정치 권력 및 경제 엘리트들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견제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진보나 좌파에는 반대에 있는 부류들과는 달리 사회에 대한 소명의식과 건강한 양심이 뒷받침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회전반적으로 자본주의화가 고도로 이행되면서 진보 계층 및 지식인들이 기존의 자신들이 마땅히 비판하고 견제해야 될 대상들의 권역으로 편승되기 위해 소위 ‘제도권 및 제도화되어 공인된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분명 있었습니다. 요즘에는 이러한 경계에 교묘히 오고 가면서 회색 박쥐와 같은 처신을 하고 있는 진보 지식인들이 많은데요. 단순히 양심의 유무와 단순히 맹세를 어겼다는 측면에서 극단의 양면적인 비난을 하기에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개인적 삶’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적극적으로 편승하고 있는 지식인들도 사뭇 많아 그것을 기득권과 권력층이 교활하게 이용하고 있는 상황이 오늘의 현실일겁니다.

이러한 급격한 과정은 특히 미국 사회에서 결정적으로 드라났는데요. 저자인 헤지스도 인정하고 있지만 부시 행정부 때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개입의 명분이 ‘타협할 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문제라기 보다는 일종의 이익 문제의 측면이 컸고, 당시에 미국 사회의 상황은 언론을 교묘히 통제하며 홍보를 지속한 당시 정치권력의 왜곡의 프로파간다였음에도 마땅히 그러한 상황에 침묵한 진보 지식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야겠습니다. 특히 뉴욕타임스와 같은 일부 언론은 기사로 내보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목록을 갖고 있었다는 헤지스의 주장을 접하고 보니 당시의 그런 연결고리가 얼마나 견고했는지 짐작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토크빌은 민주주의 시민 사회에서 개인들의 이기심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하면 그것이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인간들의 브레이크 없는 경제적 팽창에 지구가 병드는 환경 문제라든지, ‘대량살상 금융무기’라고 불러도 무방한 각종 금융시장에서 발휘되는 투기적 증권화와 한도와 제한없는 투기 거래 등과 이렇게 벌어지는 이권의 명백한 당사자들의 돈과 영향력에 굴복해 투쟁하지 않는 진보에 대해 전체적인 일관된 어조로 크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지금에서라도 진보와 좌파는 ‘진실과 아름다움 (아마도 마땅히 지켜야 될 가치)’을 약탈적 이익 계층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특히 강조합니다. 다만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상황의 얼마간 책임이 있는 진보 지식인들이 그들에게 멍청하게 속아 넘어 간 것이라고 비판의 정점을 찍는 발언이었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지식인의 역할이 공화주의를 왜곡하는 이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라고 규정했는데요. 견제하기는 커녕 아예 자발적으로 속아 넘어간 것이라면 지식인의 사전적 의미를 고쳐야될 정도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이것을 확대 해석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이익 사회’의 단면이 아닌가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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