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돈, 거짓말, 신 - 미국 극우는 어떻게 권력을 설계했는가
캐서린 스튜어트 지음, 안효상 옮김 / 책과함께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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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캐서린 스튜어트는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출생연도와 초기 성장 자료는 구글링을 해봐도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그녀와 관련된 저자 파일과 각종 사이트에서는 스튜어트가 시카고 대학을 다녔다는 언급이 나오지만, 취득한 학위나 전공은 공개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기본적인 약력이 전혀 공개되지 않는 저자는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요. (다만, 스튜어트가 미국의 우익 집단과 이들을 지원하는 부유층들을 취재하고 있기 때문에 신변 보호를 위해, 공개를 하지 않은 것으로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그럼에도 짤막하게 공개된 정보는 그녀가 유대인이고, 남편이 카톨릭 교도라는 점 정도입니다. 그녀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 종교적 민족주의의 부상 및 자유 민주주의에 반하는 미국에서의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반동 정치의 부상에 대해 비판적 취재를 하고 있는 언론인입니다. 초기 그녀의 경력에서, 미국 뉴욕시 그리니치 빌리지에 기반을 둔, 뉴스 및 문화지인 『빌리지 보이스 The Village Voice』에서, 탐사보도 전문기자인 웨인 바렛 밑에서 경험을 쌓게 됩니다. 이후 2012년에 스튜어트는 자신의 자녀가 다니는 공립학교에서 기독교 우파 단체의 개입을 목격한 후, <굿 뉴스 클럽 : 미국 어린이에 대한 기독교 우파의 은밀한 공격>을 씁니다. 또한, 2020년 3월에는 『권력 숭배자들 : 종교적 민족주의의 위험한 부상』을 출간해, 포린 어페어스에 관련된 서평이 실렸고,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도 내용이 일부 발췌되어 게재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Money, Lies, and God : Inside the Movement to Destroy American Democracy"로 지난 202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전에 일독한 폴 하이드먼의 『극우의 시대』가 미국 공화당이 어떻게 반자유주의 정당으로 변모했고 미국 정당사에서 의회 로비로 인한 공화당의 극우화를 다뤘다면, 스튜어트의 이 논저는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사회를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의 미국 부유층이 주가 된, 정치 자금 조성과 이것의 대상이 되는 각종 극우 단체와 기금, 및 싱크탱크와 마찬가지로 미국 공교육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을 벌이고 있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극단적 교회 (개신교과 카톨릭을 포함한)들을 주요 타겟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LGBT와 동성애, 및 임신 중단에 대한 끊임없는 거짓 뉴스와 증오를 부추기고 있는 극우 포퓰리스트들과 종래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복귀를 바라고 있는 각계의 인사들의 궤변을 아주 상세히 다루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녀의 이 책은 유럽의 우파 포퓰리즘을 면밀히 조사한 카스 무데와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 내부와 정치 기반에서 조직되어 행동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과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극우적 사고의 추종자들 및 근본주의에 가까운 극단적 종교인들을 분석하고 때에 따라 인터뷰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저자의 신변에 대한 걱정이 들기도 했는데요. 취재를 위한 기자 본연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저들과 관계된 자신의 인맥들을 이용하여 내부 결정권자들과도 접촉해, 이들의 본심을 분석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도 했는데요. 이런 그녀의 노력에 힘입어 르포르타주 형식이 주가 된 논쟁적이고 분석적이 글이 탄생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스튜어트의 이 글은 현재 미국의 정치와 이를 기반으로 한 사회가 현재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거의 가감 없이 드러낸 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저도 크게 수긍하는 부분이지만 미국의 건국 이념이 무엇보다 계몽주의에 근거한 자유와 평등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권력의 압제에 대한 초기 미국 이주민들에 생각과 그리고 자신들이 과연 어떠한 국가를 만들어야 하는지와 같이, 당시 유럽의 전제 왕정 국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아이디어를 중요시 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앞선 계몽주의의 역사는 그만큼 미국이라는 국가에 있어서 하나의 유산이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 루즈벨트 행정부가 구축한 기업에 대한 과세와 복지 정책, 그리고 정부 주도의 공적 기반이 점차 부침을 거치면서, 1980년대 신자유주의로 인한 급격한 경제 기조의 전환은 사실상 저자가 동의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저자인 스튜어트는 이 글의 말미에서, 다른 저명한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경제적 불평등이 결국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등장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누진과세와 폭넓게 공유되는 경제 성장"의 1950년대로, 미국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으로 갈음할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인식 하에, 미국 내부에서는 정치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적 기조가 나날이 퇴출의 압박을 받았는데 이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극단주의자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여기에 얽혀 있는 부유층의 존재였습니다. 일전의 도널드 럼스펠드와 같은 네오콘들이 자유주의의 나약한 측면이 국가를 흔들리게 만든다는 소위 레오 스트라우스식의 서사를 입에 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의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을 비롯한 미국이 온전한 자유주의적 국가를 구축하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물론 냉전의 시기였지만) 자유주의와 자유 시장의 아주 철저한 분리는 어쩌면 문화 전쟁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됩니다. 

도입인 1장에서 이와 같은 사항이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정치와 사회에서 유지되어 왔던 '정교 분리'를 사실상 바꾸려고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문제는 여기에 더해지는 위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 근본주의자들이 문화와 교육을 비롯한 여러 측면에서 정교 분리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주장을 사회에 내비치고 있지는 않지만, 몇 번의 논증을 통해 드러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끝모를 증오는 이들 말대로, 기존의 하나님이 가르친 위계와 복종, 그리고 질서에 아주 위배되는 것들로 이것이 "정교가 분리되었기 때문"이라는 맥락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저들의 저런 주장이 어떠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바라본, 저런 극단주의자들의 논법들 가운데, '대 위선의 시대'에서 알량한 지식이나 혹은 이성의 무결주의가 아니라 '성경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아주 직접적으로 말해, 무신론자들을 복음의 길로 이끄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사회와 자신들과 다른 이들의 인식을 아예 개조해야만 한다는 과격한 목소리로 이어졌습니다. 미국 기독교의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저자인 스튜어트가 바로 '종교의 제한적 기능'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상은 이들 극단적 종교인들이 마침내 정치에 까지 자신들의 영향을 펼치려고 한다는 점이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저자는 이런 미국 사회의 반동적 진행이 자유주의에 대한 배격으로 이어지는 파시즘 사회의 출현으로 디스토피아적으로 서술하고 있었지만, 기본 맥락은 앞으로 미국 민주주의 정치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엄혹한 순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극단주의적 인사들의 논법과 언어 행태가 바로 '돈과 권력을 가진 극단적 소수의 출현'이라는 단순한 서사에서가 아니라, 한 마디로 미국 정치의 위기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2장에서, 연방주의자협회의 막후 실력자인 정치 활동가 레너드 레오를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이렇게 기부자들과 활동가들의 돈이 자신들에게 밀려 들자, 미국 문화 · 정치 지형에서 사법부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수많은 극보수 싱크탱크, 법률 지원 단체, 미디어 조직, 정책 단체와 각종 행동 조직들이 이에 연합"하여 위세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라고 여겨집니다. 연방 대법원의 판사들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고자 하는 연유는 결국에는 이 문화 전쟁에서 저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선 이들을 뒤에서 지원하는 부유층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또한 '사회주의'라는 왜곡된 관념의 지배 하에, 자신들을 향한 어떠한 개혁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이행에서 개인의 이익과 욕망이라는 도덕적 관념의 비판을 '당당한 부자'라는 이미지로 각인 시키고, 많은 선진 국가에서 부유층들이 삼엄한 울타리와 개인 경호원들을 투입해, 일반 시민들과 철저히 삶의 경계를 유지하는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인식과 행위의 근거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이 글의 10장에서 다시 논증되고 있듯이, 이들 부유층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나 모두에게 필요한 민주 정치의 이상 따위도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안전 사회라는 틀 안에 사회를 재조직하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권력을 재조정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따름인데요. 설사 사회가 과두제에 이르더라도 혹은 더 나아가, 폭력적 전체주의에 이르더라도 자신들의 기득권만 보장이 된다면 전혀 상관이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과거 히틀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던 포드와 같은 부유한 기업가의 분리된 인식과 상당히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식과 의지 하에 이들의 돈이 극단주의 세력에 살포되고 있는 상황이 지금 미국 정치가 직면한 상황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일전에 읽은 서맨사 하비의 『궤도』에서 평범한 펍에 모여 술을 나누는 3~40대 흔한 미국 남성들이 우주로 향한 우주 비행사들에 대한 동경과 질투를 보이는 장면은 마찬가지로 아메리칸 드림과 상관없이, 철저히 실패한 인생으로 여기는 많은 남성들이 그 분노의 화살을 민주당과 동성애자들, 심지어 LGBT에 돌리는 모습은 이들 계층의 역설적 자화상으로 이해됩니다. 자신들이 사회와 조직에서 낙오되었고 실패했다고 여기는 분노감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이런 자신의 감정을 향할 수 있는 대상을 찾은 것이 일반 여성과 성소수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저들이 정당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8장에서, 저자는 "반민주적 반동의 자금 제공자들, 사상가들, 하사관들, 파워 플레이어들"이라는 용어로 반동적 극우 조직의 인적 설계를 보여주는 것처럼 앞선 저들은 자발적으로 '조직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는 점을 폭로하기에 이릅니다. 저는 여기 더 노골적으로 말해, 저들은 극단주의 세력에 의해 쓰고 버릴 수 있는 무언가의 취급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더해, 국내의 여러 기사에서 미국 정치가 과거 네오콘을 넘어서는 '냇콘 NatCon'의 대두를 다루기도 했습니다만 여기에서도 '냇콘과 워크 Woke'의 대립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가안보 대변인을 지낸 마이클 앤턴은 반 워크를 집요하게 부르짖은 인물이기도 한데요. 이들 냇콘은 작금의 워크를 핵무기보다도 더 위험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들의 증오는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에 가깝지만 이들이 자술하는 내용들은 쉽게 넘어갈 부분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중대한 위협은 핵보유국도, 기후변화도, 경제침체나 부패도, 악화되는 건강치료나 범죄도 아닌 '워크주의'다"라는 분석은 이들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 깨닫게 만듭니다. 즉, 앞선 앤턴이 이 워크주의가 서방 전체를 삼킬 수 있다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주장한 그 장면은, 글의 2장에서 조심스럽게 언급한 '적대적 정체성 정치'의 진면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글들을 접하지 못했던 독자들은 아니 저런 황망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으냐? 라고 되물을 수 있을 겁니다. 민주당을 악으로 규정하고 전부 일소해야 하는 대상으로 삼은 극우 단체의 인사들이나, 임신 중단에 대한 기존의 헌법적 조치를 무시하고 여성의 신체적 자기 결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임신 중단을 옹호하는 단체나 인사들을 기독교의 적인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거나 혹은 과거의 고분고분했던 여성들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피켓 시위로 옹호하는 실체적 장면은 이 모두를 포함한 사례가 과연 소수에 불과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들게 만듭니다. 저자인 스튜어트가 우려하는 지점은 앞선 열거의 속하는 자들이 조직적으로 정체성 정치와 같은 정신 무장으로 구축되어 있고 이들의 행동에 자신의 이익이 결부되어 있는 부유층의 현금 지원, 그리고 극우를 지향하는 언론인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이들에 앞서서 사상을 강화시키는 싱크탱크의 협력으로 나날이 위세를 더하고 있고, 반면에 미국 내에서 진보주의 운동과 진보적 기독교주의, 그리고 리버럴에 가까운 정치 세력이 가히 지리멸렬한 상황임을 그녀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과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의회를 점령하라고 부추긴 것을 봐도 극단주의자들의 방식은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국 정치는 저자의 말마따나 암울한 "정체성 정치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앞선 장에서 그녀는 이러한 반자유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극우 정치 자체를 우리가 알고 있듯 사상의 스펙트럼 내의 공히 인정받는 정치 사상이 아니라, 반동적 극우 단체 혹은 극우 정치로 강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거의 전세계에서 이 극우 정치를 어떻게 규명하고 분석할 것인가에 대해 각계 각층의 많은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극우 정치는 이들에게 매일 돈이 수혈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파급이 단순한 과두제의 실현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7장에서, "기부자들은 세금을 낮추고, 공공을 보호할 힘은 없지만 자기들의 사적 이익을 지켜줄 정도는 되는 작은 정부만 보장된다면 날달걀 광신, 청동기 시대를 운운하는 기행, 존넨라트, 민주주의의 종말 따위는 얼마든지 감수한다"는 핵심 요점은 충분히 충격적입니다. 더욱이 각 장에서 이들과 관련된 논증에서, "페미니스트는 강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던, 클레어몬트 링컨 펠로십 수혜자 잭 머피와의 인터뷰를 저자가 따로 언급하는 것처럼, 저러한 생각을 머리에 갖고 다니는 인사가 미국 내에서, 특히나 고학력의 백인 남성들에게서 적지 않게 보인다는 점은 이들을 같은 '인간의 범주'내에 두고 설명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듭니다. 또한, 워크주의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증오를 바탕으로 "페미니즘은 이 나라를 약화시키는가", "페미니즘의 해로운 궤적" 등을 아주 무분별하게 내뱉는 언사가 이들 극단주의자들에게 자신의 솔직함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여겨진다는 점은 저에게 비참한 기분을 느끼게 만듭니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함께 획책하고 있는 "동성 결혼 합법화에 대한 반대 정도가 아니라 임금에서 성차별을 허용하고, 이혼법을 70년 전으로 되돌리고, 동성애를 다시 범죄화하려는 시도"까지 나올 정도로 이들은 지극히 반동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2장 서두에서 언급된 패트릭 드닌의 "자유주의는 실패했다"는 복합적 외침은 저자의 비판적 인식대로 유구하지 않은 미국 정치에서 칼 슈미트와 레오 스트라우스의 극단적이지만 반동적인 이념을 떠오르게 합니다. 특히 칼 슈미트에게 매료된 미국 정치인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건전한 정치를 결국은 해치게 만드는 '적과 우리 편'의 대결적 개념은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기업을 일군 경제인들에게도 '아주 후련한 개념'을 도출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스트라우스의 영향력은 지금도 상당히 논쟁적이지만 이와 관련된 적지 않은 책을 읽은 저로서도 왜 이렇게 일부 미국인들이 '자신만 알고, 자신이 우주가 되는 극단주의'로 매몰되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단순히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공공의 의미가 개인주의에 맞서지 못하고 퇴락하고 이들 개인을 둘러싼 선택과 책임의 문제를 오로지 그들 자신의 문제로 획일화 시키는 과정이 교묘하게 중첩되었다고 하더라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근본주의적 성격이 강화된 오늘날의 미국 기독교가 "젠더 질서에 대한 불안, 특히 동성애 의제와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기성질서라고 간주하는 대상에 맹렬히 돌진하게 만드는 로켓 연료"다 라고 기독교적 구원 서사와 맞물려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가 따로 구술한 이 대목은 극우 정치의 이익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폭력적 사회 개조가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특히, 저들이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라는 새로운 단어 채용이 스튜어트의 이 책에 수차례 등장한다는 점에서, 작금의 미국 기독교주의가 어느 지점에 추락하여 망가지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저로서는 현재의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미국 헌법의 유구한 전통인 "정교 분리"를 무너트리려고 하는 의중에는 (캘리포니아 채프먼 대학의 법학전문대학원의 교수이자 전 학장인 존 이스트먼은 "미국 건국자들이 애초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원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사실이 아닌 내용을 공공연하게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불평등하게 태어났고 남녀는 마땅히 차별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근본 시각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적이었던 '자유주의'의 목숨 줄을 끊으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물론 저들이 왜곡해 받아들인 (시장 및 불평등한) 자유주의와 제가 생각하는 계몽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끝으로 '다양성은 미국 사회를 파괴하는 트리거'라고 여기는 극단주의자들의 범람은 그 자체로 미국 민주주의의 위협이자, 오늘날 민주 정체가 당면한 위기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또한, 다수의 미국 부유층들이 배인 우월주의에 사실상 동의하고 있다는 분석에도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고 '동성애의 위협'이라든지, 워크가 핵무기보다 위협적이라는 표현 등 극단적 정체성 정치의 여파가 결국에는 민주주의를 파국으로 이끌 것이라는 점은 결코 상상의 산물이나 허접한 소설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저자인 스튜어트는 글의 결론에서 아직은 저들에 비해 우리가 절대 다수임을 표방하고 었었지만 미국 정치가 공화당의 반자유주의 정당화와 더불어, 이를 기본으로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 그리고 과거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와 미국 내에서 리버럴 등에 의해 점차 요구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아주 극명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경제 엘리트들 및 부유층의 이합집산 등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미국 정치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과거 공화당이 로널드 레이건을 앞세워, 민주당과 진보, 및 리버럴 과의 문화 전쟁에 최종적으로 승리하고자 몇 십 년에 걸쳐 설계했고, 여기에 공교육에 대한 거부와 기독교 민족주의에 의한 이민자 배척 및 소수 성적 그룹에 대한 증오는 로버트 달이 강조했던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다원주의를 악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에 저자는 거듭 선거 제도를 건전하게 보존하고 극단주의 시대에 자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어떤 조직을 이뤄, 사실상 사회 연대에 나서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의 선명성을 차치하더라도 결국 이러한 과정이 쉽지 않아 보인다는 점은 거의 자명해 보입니다.

-미국에서의 극단주의 흐름이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신우파 New Right로 거의 통합하여 설명되고 있습니다. 저는 저자의 논증에서 도널드 트럼프 1기 하의 극우 포퓰리즘이 기존 정치 무대에서의 정치 투쟁 이후, 백인 우월주의를 비롯한 극단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함께 영합하여, 이른바 '신우파'라는 탈을 쓰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즉, 거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은 모든 선거의 정당성을 무너뜨려 결국은 언제나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선거제도를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일 뿐이다.

기독교 민족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 가운데 85퍼센트가 "백인에 대한 차별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라는 주장에 동의했다.

이렇게 기부자와 활동가들의 돈이 밀려들자 미국의 문화 정치 지형에는 사법부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은 수많은 극보수 싱크탱크, 법률 지원 단체, 미디어 조직, 정책 단체와 각종 행동 조직들이 번성했다.

"보수 가톨릭이 진보적인 가톨릭보다 우위에 있는 지점은 그들이 서로 만나고 결집할 수 있는 네트워크와 기관들을 구축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 네트워크는 빈곤, 불평등, 기후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시청자들에게 임신 중지와 여성 스포츠에서의 트랜스젠더 선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끝없이 주입한다.

레너드 레오는 연방주의자협회 출신의 보수 극단주의자들로 연방대법원을 채워 넣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우익 자금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초중등 학교뿐 아니라 고등교육기관까지 세속주의, 워크주의, 젠더 이데올로기 등 반동적 진영이 우려하는 각종 사조에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감염되어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스트먼은 건국 세대의 발언에서 맥락을 걷어낸 인용들을 줄줄이 읊으며, 건국자들이 애초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원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른바 ‘워크‘와의 전쟁이란 ‘민중‘과 ‘엘리트‘사이의 전쟁이 아닌, 상위 중산층 내부의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두려워하는 데서 비롯된 갈등에 가깝다고.

그런데 클레어몬트 연구소는 오랫동안 신중함, 덕성, 정치적 품격을 찬양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2016년 대선에 증오의 수사를 입에 달고 황금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온 남자(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했다.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공확국의 실패는 스트라우스에게 트라우마였고, 그는 이를 자유주의적 근대성 프로젝트의 실패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공학에 여성을 끌어들이여 애쓸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가 될 남성을 더 많이 모집하고,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의대와 법조계 등 다른 모든 직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엘리트 내부의 분개, 곧 사회 상층부로 올라갈수록 통로는 점점 좁아지고 무자비한 경쟁이 초부유층 바로 아래층의 진입을 가로막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감정적 손상, 다시 말해 엘리트가 엘리트에게 품는 특유한 원한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젠더 질서에 대한 불안, 특히 동성애 의제와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기성질서라고 간주되는 대상에 맹렬히 돌진하게 만드는 로켓 연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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