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신하는가 - 우리가 법을 믿지 못할 때 필요한 시민 수업
신디 L. 스캐치 지음, 김내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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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디 L. 스캐치는 1967년 생으로 미국 시카고 근처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녀는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마친 후, 컬럼비아 대학과 명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수학했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하버드 대학에서 10년간 강의했으며,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비교정치학 및 법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녀는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볼로냐 대학 교수이자, 킹스 칼리지 런던의 법학 명예 교수입니다. 특히 스캐치는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법률 이론가이면서 비교정치학과 헌법학의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쌓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How to be a citizen"으로 지난 202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는 절판된 상태입니다.

우리에게는 꽤 유명한 정치인과 모 정치 유튜버의 짤막한 소개가 실린 이 책은 역시나 기존 원제와는 맥락이 완전히 다른 자극적인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는데요. 본문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원제가 취하는 본래 의미는, "극단주의 시대에 어떻게 우리는 (진정한) 시민이 될 수 있는가"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저자는 글의 결론에서, "오늘날 민주주의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수칙"을 담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었는데요. 물론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자리매김이 필요하다는 점과 더불어, 저자인 스캐치는 그 과정에서 헌법과 시민의 삶에 뿌리 내린 법의 의미와 그 한계에 대해서도 명확히 하고 있었습니다. 저자와 같은 학자가 지난 자신의 경력에서 오래도록 헌법을 연구한 학자가 법에 대한 어떤 고유한 인식을 갖고 있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많은 헌법학자들이 평범한 시민들이 주도하는 정치나 권력 체제에는 상당히 불신을 갖고 있으면서, 어느 정도는 정치 엘리트들에 의한 '위에서 밑으로의' 정치를 선호하며, 이와 같은 일종의 엘리트 지배 체제를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저들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 식으로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여기에 더해 헌법이 민주주의의 조력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헌법이 민주주의 정치에 우선하느냐, 이런 첨예한 논란이 있는 점도 부정할 수 없을 텐데요. 하지만 이 글의 저자는 아주 명확하게 민주주의에 있어, 헌법의 한계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회 문제나 정치적 이슈, 혹은 시민들의 삶과 관련하여" 법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인식을 사실상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제가 글을 쓰기도 했던 벤 앤셀의 논저에서, 앤셀 역시도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과도한 신뢰 내지는 의존"은 우리들의 정치를 병들게 할 수 있다고 첨언했습니다. 이 글의 저자인 스케치도 이 부분을 정확히 반복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1장과 2장의 본격적인 논증 가운데, 저자가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시민들이 정치 엘리트들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나머지, 대다수 시민들이 그저 방관자적 위치에 머무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으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그런 연계로 오래된 체계로 성문화 된 법이 나날이 변질되는 세속의 체계를 매번 따라가기란 당연히 쉽지 않은 문제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법이 주도하느냐 아니면 우리 시민이 주도하느냐"에 있어서는 당연히 법이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처럼, 평범한 다수의 시민들이 정치를 주도하고 (위임된 정치인들을 철저히 규명하는 것에서부터) 체제의 건전성을 확보하는 주요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도 거의 분명합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이런 일관된 논점을 보이고 있는 저자에 대해선 확실히 그녀 스스로 민주주의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법으로 돌아와, 우리가 이미 인지하고 있듯, 헌법이 민주주의 사회에 갖는 의미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텐데요. 2장의 서두에서, "법이 시민을 죄 없는 방관자로 만든다"는 분석을 우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선 1부의 결론에서, 코로나 확산의 시점에서, 일부 사람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법률과 헌법은 항상 토론과 논쟁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지점의 맥락은 저자의 말마따나 "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법에 너무 의존해 왔다"는 저자의 성찰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법이 왜 많은 시민을 죄 없는 방관자로 만들고 있는지도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법은 시민들을 죄 없는 방관자로 만드느냐에 대한 질문의 근본적 원인은 "시민의 개인주의화 혹은 사회 내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의 무분별한 양태"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분석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시민을 그저 개인에 국한된 소비자"로 몰고 갔다는 평가와도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의 대미에서 저자는 이 글이 "신자유주의나 무정부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선을 긋기도 했는데요. 다만, 전자의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시민들의 어떤 자발적 질서에 의존한다고 평가한 것은 다소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신자유주의적 사회라고 하더라도 신자유주의 자체가 정치까지 전부 아우르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신자유주의 경제 기반의 조력을 제공하는 제도적 기반으로 이해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공개 석상에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입으로 민주주의를 말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강고한 신념을 가졌다고 볼 근본적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마땅한 개인의 이익과 선택의 자유라든지, 삶에 있어 그 누구가 아닌 자신이 '주인'이라는 거창한 정당성을 추종했을 뿐이지, 이러한 관념들을 모든 사람의 공통된 이익에 수렴한 무언가로 포장할 필요도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미 이 글의 1장에서, 공동체적 삶을 기반으로 좋은 세상을 만드는 선결 조건들 가운데, "삶의 극심한 사유화와 이기적인 태도를 파괴하는 것"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반하는 신자유주의의 밝혀진 관념들은 그것을 추종하는 자들이 반복하는 '합리적 기반의 사고'임이 명확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도 드러나지만 1장에서,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 발생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거의 폐허로 만들 때, 부시 행정부의 정실 인사가 어떠한 무능을 드러냈는지 여실히 목도한 바가 있습니다. 오히려 저자의 언급대로 그때 이름 모를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들의 이웃을 구한 사례는 2장에서 은연중 언급되는 '개인주의적인 극단의 사회'와 절묘하게 대비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민주주의 체제 하의, 노골적으로 뿌리 내린 무엇보다 우선하는 개인의 이익이라는 관념이 그토록 두려운'홉스주의적 세계'로 근접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사실상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는 아무리 확고한 헌법의 체계가 가능한 세계라고 할지라도 개인의 이익과 그것에 바탕을 둔 권리의 이행이 엄연한 민주주의 체제에서, 속세적으로 (저자의 표현에 따라) 불평등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사소한 자유, 혹은 선택의 기로에서 중요한 삶의 전환이 되는 그 '선택의 자유'에서조차 매우 권력적인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결국 헌법의 한계라는 점은 다의적인 측면에서 이렇게 적지 않은 규모의 불편한 인식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 연유에서, 2장에 등장하는 '조슈아 사례'와 더불어, "헌법은 질서와 정의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설득력이 왜 그렇게 충분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사례들과 시의적절한 논증 가운데, 저자가 밝히는 오늘날 쇠퇴한 집단의 권리, 모두의 이익이라는 중요한 가치의 재인식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지 가늠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자유 만큼이나 타인과 이웃의 자유도 중요하고, 마찬가지로 타인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는 자신의 이익 추구, 그리고 그런 이익 추구가 집단과 공통된 이익을 훼손하지 않는 기반에 머무르는 것이 무슨 괴랄한 이상주의의 등장이 아니라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마치 마사 누스바움의 유사한 논리처럼 말입니다.

다시금 공공의 의미를 되살려 보자는 사회의 움직임 속에서, 저자 역시 일반 시민들의 연대, 혹은 연대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것의 일례로 3장에서, 한때 영국 런던의 낙후된 지역이었던 노팅힐의 한 레스토랑에서 이어진 어떤 '연대'를 소개합니다. 당시 정치권과 공권력의 다분한 의도로 벌어진 경찰과 낙인이 찍힌 주민들의 대립은 공권력을 두려워 하지 않고 서로가 연대한 시민들은 무고한 기소로 이어진 55일간의 재판에서 끝내 무죄를 선고 받게 됩니다. 이 재판은 런던 경시청의 노골적인 인종 차별에 따른 무리한 기소로 시작되었는데요. 당국은 영국의 예전 식민지 출신들에게 "위법하고 반사회적인 행동이 있었다"는 누명을 씌우기에 이릅니다. 만약 지금이었다면 런던 시민 사회가 들불처럼 일어났을 법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글에는 등장하지는 않지만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월가의 경제 엘리트들이 도덕적 해이로 인한 방만한 금융 투자 및 무분별한 증권화로 인한 붕괴의 책임을 그 누구도 지지 않았다는 사실 (오바마 정권이 이들에 대한 사실상의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에)에 '월 가를 점령하라'는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 자발적 시민 연대에 대해 노엄 촘스키도 자신의 글을 통해 평가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때의 시민들 역시 모두가 동등하고 능동적인 의지로 사실상의 '개방된 연대'에 나선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글의 후반부에서 저자인 스캐치가 이 사건을 잠시 망각해, 그저 '신자유주의의 이상'을 내뱉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모든 시민들이 연대에 이르게 될 때, "함께 공유된 정체성은 다른 정체성을 넘어서게 되고, 인종, 종교, 성별 등 분열을 초래하는 차이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장 중요한) 유대감을 형성한다"는 중요한 맥락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물론 앞선 강력한 연대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광장'의 역할이 중요할 텐데요.이 광장이 시민들에게 실효적인 의미를 갖기 위해 저자는 바로 2장에서, "열린 소통과 공동의 지식을 형성하는 공적 토론과 숙의, 참여에 필수적인 정보의 자유롭고 정확한 공유를 장려하는 공공의 물리적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토론과 숙의라는 민주주의가 견실해 질 수 있는 조건의 문제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고민한 이래로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를 강조해 왔습니다. 하지만 마누엘 카스텔이 예견했던 바와 완전히 다른 측면으로 앞선 '오프라인 공론장'과는 복합적으로 변질된 양상의 '온라인 공론장'은 극단주의의 온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전에 일독했던 재런 러니어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개인 정보의 무분별한 유출, 그리고 이를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인터넷 기업들의 행태 등은 온라인 상에서의 인종 차별과 구별짓기 및 이를 통한 증오 확대와 맞물려, 거의 조장되어 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3장의 논증처럼 우리에게는 완전히 다른 '광장'이 필요한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이는 하버마스가 "모든 시민들의 접근권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선제적 선언이 민주주의적 광장의 실제 항유할 수 있는 계층이 저자의 말마따나 '백인 남성들'에게 국한되었던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광장은 모든 인종과 성별, 종교를 초월한 완전히 열린 광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다양성의 원칙에 부합되는 것이고 시민성과 시민의 자정 능력이라는 것이 이러한 원칙 하에 재배치 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토론과 타협이 자신의 기준으로 상대의 급을 정해 놓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민성이라는 부분에서 모두가 평등한 단계에서 서로의 의견을 묻고 듣는 과정이 이 광장이라는 공론장에서의 중요한 원칙이며, 시민 모두에게 광장이 편안함과 안정감을 줄 수 있어야만 사적 영역의 분리든 공적 영역의 재정립이든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고유한 정체성이 타인에게 폭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법보다 먼저 타인과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포용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바로 4장에서 인용된, "홀로코스트를 통해 인간 생명이 경시되는 장면을 목격한 후, 독일의 법률 제정자들은 전후 정치 구조의 최상위 가치를 인간의 존엄성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의미심장해 보였습니다. 즉, 다른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사회에 주지시키고 우리가 편협한 정체성 정치에 빠져, 스스로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동에 나서게 됨을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저자는 '관용의 한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지만, 나르시스트 정치인과 그 기반의 폭력적 정체성에 완전히 세뇌된 일부 시민들이 스스로 개심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명확합니다. 그럼에도 각자가 각자의 음식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처럼 만약 평범한 시민들이 타인과 이웃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면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완전히 이론적이고 상아탑의 논리와는 그 궤가 약간 다르지만 저명한 '헌법학자'가 자신의 입으로 내뱉는 제안들과 그동안 민주주의에서 잊힌 고유한 가치들을 스스로 손을 세워가며 제시하는 장면은 그래도 인상적이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총기를 든 트럼프 지지자들이 도널드 트럼프와 스티브 배넌에 의해 획책된 미국 의회 난입 사건과 같은 반란에 헌법학자인 저자가 다소 의뭉한 태도를 보인 점은 글의 오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거의 반동이나 다름 없는 폭력적 행위를 일삼는 무리들을 수치화된 관용의 잣대보다는 법의 자비없는 일관된 판결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헌법학자가 이런 속세에서의 관용과 법의 적용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나날이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현실은 그녀 역시, 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민성의 부재라든지 책임과 의무를 저버린 시민의 '아노미 상태' 따위가 아니라, 극단주의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 엘리트들과 여기에서조차 쏠쏠히 이익을 얻고 있는 일부 인사들의 책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큰 의미는 없겠지만 본문 69, 198, 199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의 계약, 즉 국정을 운영하도록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권력을 가진 자와 그 사회에 살고 있는 시민들 사이의 계약으로 이해된다.

어쨌거나 민주주의는 다양한 정부 형태 가운데 그나마 가장 덜 나쁜 체제며 군중 통치보다는 낫지 않냐고들 한다.

다만 필요한 것은 두려움과 소외, 계급과 인종적 장벽, 그리고 삶의 극심한 사유화와 이기적인 태도를 파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타인의 권리가 보호받을 수 있도록 우리가 자신의 권리 행사를 언제 제한할지 그 시점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포함된다.

민주주의의 성패가 근본적으로 의회 의원들의 역량이나 제도의 질이 아닌, 시민들 사이의 수평적 유대의 수준 차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과 캐나다, 스페인에서 아프리카 대륙과 중동까지, 모든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하위 집단들 간의 긴장으로 인해 일어난다.

이러한 시민적 덕목과 선의, 특히 나와 다른 방식으로 쌀을 짓거나,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 등 이민자와 같은 타자에 대한 태도는 항상 가장 까다로운 문제였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영국에서 진행된 300여 명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서 95퍼센트가 사법 시스템에서 인종적 편견이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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