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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왜 실패하는가 - 분열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문제 제기
벤 앤셀 지음, 박세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4년 3월
평점 :
1977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팔로알토에서 태어난 벤 앤셀은 유년시절은 영국 켄트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2000년 영국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UC 버클리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 후 앤셀은 하버드 대학으로 옮겨 박사 학위를 통과하고 그의 논문은 미국 정치학회 정치경제학 분과에서 수여하는 2011년 윌리엄 라이커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습니다. 2006년부터 2013년까지 미네소타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쳤던 그는 2013년 7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너필드 칼리지에서 비교민주제도학 교수로 부임하게 됩니다. 또한 미국의 정치학자인 데이비드 사무엘스와 함께 『비교정치학 연구 Comparative Political Studies』의 공동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영국 학술원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국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다양한 논문을 발표했고 그의 주된 관심사는 교육 정책의 정치학, 불평등과 민주주의 관계, 그리고 자산 가격 인플레이션이 정치적 선호에 미치는 영향 등에 있습니다. 근래에 그는 영국 재무부와 영국 정부의 장기 교육 정채 자문을 담당했던 레이치 기술 검토 위원회에서 학술 컨설턴트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hy Politics Fails"로 지난 202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벤 앤셀의 이 글은 약간의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구성되어 논증 전반은 꽤나 평이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책에 등장하는 사례 대부분이 근래의 정치 동향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읽는 재미를 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자인 벤 앤셀은 아주 명백하게 확고한 민주주의자로 규정할 수 있겠는데요. 그는 전반적으로 민주주의 체제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드러내는 동시에,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체제와 그로 인한 정치적 실패 및 노골적인 불평등 상황이 지속되게 된다면 사회가 과두제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일전에 접한 가렛 존스와는 완전히 다른 의견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결국 민주주의 자체는 결함이 많은 체제이지만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정치 체제는 현재 전무하다는 점에서 다수 시민들의 이익과 생활상의 안전, 삶의 지속성을 위해서는 이 민주주의 체제가 거의 최선임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의 실패', 즉 다른 말로 민주주의의 약화는 정치적 혼돈과 불평등의 심화로 비롯되었습니다. 이에 앤셀은 정치적 혼돈과 관련하여, 현재 전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극단주의의 발호, 혹은 극우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근본적 원인은 건전한 시민들이 분별력을 갖고 어느 정치 세력을 지지하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 정치 세력이 싫고 증오하기 때문에 소위 "저쪽이 싫어 이쪽을 지지하는" 형태의 정치 기반이 현실 정치를 사실상 수렁으로 몰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나라의 사례에서도 현제 20대에서 30대의 남성들이 그저 민주당이 싫어서, 상대당인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양상과 아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글의 서두에서 이러한 지지 혹은 선거에서의 투표 행위가 사실상 현재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저 역시 이에 동의하면서, 1부를 규정하는 전체적인 맥락인,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 과제"라는 저자의 평가에도 역시 긍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불어,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는 정치 상의 여러 선택지의 선후 문제보다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가 추동한 '개인의 이기심'을 기반으로 이 정치를 분석해야만 한다고 저자는 거듭 강조합니다. 여기의 미국 정치를 엄밀하게 분석해 본다면 작금의 미국 민주주의가 의회나 행정부를 거치는 정치인들의 '정치적 이익'과 '당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여기에는 자본가들이나 부유층의 이익, 그리고 사회 선두에 있는 엘리트 지배 계급의 이익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저자인 벤 앤셀은 이러한 구조적인 측면에 놓여 있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좀 더 규명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는 다수 시민들의 슬기롭지 못한 선택과 지향성에 대해서도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현재 인터넷 공론장을 비롯 개인 소셜미디어가 자정 능력을 아예 상시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고, 또한 여기에 자신들의 이익이 결부되어 있는 거대 인터넷 기업들이 사실상 민주주의에 반하는 기업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은 미국이 왜 신자유주의 국가인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증거로 생각합니다. 여기에 첨예한 "양극화는 혼돈과 더불어 교착 상태를 유발하고 증오를 불러 일으킨다"는 1부 3장의 분석은, 미국 정치의 일반적인 일상을 넘어,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될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일전에 일독했던 프리데만 카릭 역시, 2018년 이후에 전세계에 불어닥친 극단주의의 범람에 우리의 정치적 환경이 어떠한 문제에 놓여 있는지를 심각하게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1부 후반부에 도출되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전반적인 민주주의 내의 갈등, 의견 불일치, 실질적 자율 통치의 회복 불가 등을 개선시킬 수 있는 해결책으로 읽힙니다. 또한 시민 모임을 통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페이스 투 페이스'로 간극을 좁히는 노력 역시, 매우 시급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결과는 서로를 약화한다"는 2부의 테제는 저자의 다른 말로, '평등의 덫'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14년에 미국 전체 소득과 관련하여, 상위 1퍼센트가 전체 소득의 20퍼센트를 차지했고, 하위 50퍼센트가 12퍼센트를 차지했다는 지표는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 내의 불평등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는 단면이기도 한 데요. 일전에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를 독려하기도 했던 노엄 촘스키와 여기에 참여한 이들이 '우리가 99퍼센트다'라는 슬로건은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정치권과 경제 엘리트들을 향한 목소리였습니다. 일반적인 부유층들과 기득권 세력들이 토머스 홉스의 불편한 무대처럼, 국가가 나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짓밟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들은 몇 세기에 걸쳐, 민주주의를 지지해 왔습니다. 더욱이 미국 건국의 기초를 쌓은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의 세밀한 국가 조직은 이러한 기반에서 잉태되었습니다. 결국 이런 현실 인식에서 조차 우리는 '무엇의 평등'인가를 개념화 하여, 수많은 지식인들이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분명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양 날개로 현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평등의 인식'자체는 거의 부정되어 왔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평등을 추동하는 경제적 평등의 실패, 즉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2부 6장에서, "소득 수준 만을 놓고 본다면 대부분의 부유한 국가들에서 높은 수준의 불평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분석은 실로 문제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불평등의 기조가 계속 지속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훼손되어, 결국은 '과두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두제 상황에서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트들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을 예견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반대로 다수 시민들은 권력과 유리 되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겁니다.
물론 2부 후반부의 논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란 어려울 것이라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이하의 논증에서 경제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을 사실상 압도하기란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가진 자들의 부를 정부의 힘으로 빼앗아 소득을 평등하게 만드는 일도 역시 어려울 것입니다. "평등한 경제적 결과를 위해서는 자본주의 수혜자들이 이익을 포기하도록 강제해야 하고, 잠재적으로 그들의 평등한 경제적 권리를 제한해야 하지만 민주주적인 자본주의의 핵심은 이처럼 피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고 단언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긴장 자체가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게 된다는 메커니즘 자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예로, 우리는 그저 평등의 신성함을 말로만 고수하면서, "자본주의가 멋대로 움직이도록 방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철저한 승자 독식의 경제에 직면하게 되고, 이로 인해 소수 경제 엘리트들이 지속적인 로비 활동과 언론 통제, 부패를 획책하는 등의 민주적 의사 결정을 왜곡하면서, "과두 정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연유 때문에 각 사회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텐데요. 부유층을 향한 실질적인 부유세는 물론, 사회 기반에 대한 투자와 특히, 레이건 시대 이래로 왜곡되어 온 조세 제도를 정상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엘리트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누려온 막대한 이익에도 불구하고 체제를 붕괴시켜, 그 법적인 책임을 어느 누구도 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절호의 기회를 미국 정치는 잡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장의 결과'를 정치의 잣대나 법의 수단으로 단죄할 수 없다는 일종의 대마불사와 같은 관념은 여전히 타파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니 로드릭의 제안처럼 시장이 민주주의의 통제를 받게 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2부 8장의 지면은 경제의 실패 및 점증하는 불평등 상황에서 '부의 불평등을 줄이는 방법'을 논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삶의 기준에서 드러나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투명한 조세제도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나름대로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억만장자들이 그들의 관할권을 쉽게 옮기지 못하도록 제한하기 위한 국제적인 협조가 필요하다"는 부분도 눈여겨 볼만한 진술이었습니다. 여기에 더 첨언을 하자면, 2부 8장에서, "민주주의가 분명 뭔가를 갖춰야 한다면 대다수가 소수의 부를 억제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니겠는가"라고 저자는 에둘러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앞서 언급한 조세 제도의 혁신도 그렇거니와, 우선적으로 저자는 "시장과 기술의 마법이 불평등을 줄여줄 것이라는 기대는 무모한 것"이라 일축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주장했던 맥락과는 완전히 상반된 의견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사람들이 시장에서 더 높은 자유를 누릴수록 시장의 먼 꼭대기에 있는 이들은 더 많은 보상을 차지한다"는 숨겨진 진실을 은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기에 더해, 교육 기반의 개선과 모든 국민들이 실질적으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도 그것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자유주의가 유인했던 개인의 이익과 능력주의의 확대라는 기존의 철저한 관념을 재정립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고, "시스템 안에서 최고 교육을 받은 승자들은 일자리가 개인의 기술과 노력을 상징한다는 능력주의 주장을 자기 정당화나 설득의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 체제를 구조적으로 축소시키는 능력주의에 대한 재인식과 시민들의 인식 전환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다수 시민들의 연대는 매우 중요합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그것의 대책 마련을 위해 당시 시민들이 결집하여 연대했던 이유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는데요. 여기에 더해 '자신들의 삶의 지속성'을 위해서도 뉴딜 시대의 복지 국가 정체성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마틴 길렌스를 통해 언급되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가난에 검은색을 더해, 복지 자체를 터부시한"공화당 정치와 거기에 매몰된 미국 시민들의 맨 얼굴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후에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더욱 조장 되었지만, 이는 단순히 '복지'를 악으로 규정한 것 이상의 사회적 파급을 초래합니다. 국가가 개인의 삶에서 거리를 둬야 한다는 저들의 논법이 결국은 "모든 책임은 그 자신이 져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언 명령을 확산 시켰습니다. 1980년대를 가로지르는 미국의 가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같은 철저한 개인주의의 숭배와 "모두의 삶이 이와 같아야 한다"는 폭력성은 결국엔 보통 시민들의 험난한 인생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 사회는 병리적으로 인종 차별 문제와 성차별 인식이 '자연 상태'의 그것으로 인지 되었고, "너희는 너희대로 살고 우리는 우리 식으로 살겠다"는 사회가 구조적으로 분리되고 결합되지 못하는 파쇄적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 '시민 연대'가 필요했지만 민주주의의 일반적인 가능성 조차, 현실이 거부하는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저는 저자가 조심스럽게 언급하는 시민들이 자신이 필요할 때만 연대하게 된다는 일종의 제한적인 인식에 반대하는 편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연대를 통한 보상 심리의 기계적 작용 따위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시민들이 단합하고 연대하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의 이상과 어긋나는 현실 조건으로 거부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선상에서 극단주의 정치가 이익을 얻게 되는 구조로 이어지게 된 연유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벤 앤셀의 이 책은 민주주의가 스스로 가능성을 펼쳐내, 자연스럽게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실패를 다룬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제 발로 일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의 실패'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양한 참여자의 노력도 필요하고 견실한 제도의 구축은 물론 충분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단순히 인도와 같은 '선거제 전제국가'로 국한된, '무늬만 민주주의'로 떨어지지 않게 면밀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여기에 시민의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 여전히 모호하기는 하지만 건전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전제 자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앞선 민주주의를 병들게 만드는 경제적 불평등 문제나 이것이 원인이 되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극단주의의 대두는 '인식의 연계'처럼 모두를 살펴봐야, 그것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겠습니다. 민주주의의 중심축인 시민들은 물론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과 정치를 좀 더 투명하게 만드는 정치 제도의 개선, 그리고 이러한 기반 하에, 시민들이 주축이 된 올바른 여론 형성과 그것에 신경을 쓰는 정치인들, 이들 모두가 함께 삶의 안정을 기대할 수 있도록 경제적 보장에 힘쓰는 '공익에 힘쓰는 경제 엘리트들 (물론 어감상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로 더해져야 하겠지만 이는 어찌됐든 저의 터무니 없는 기대에 불과합니다.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저로서는 다소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우리가 서로를 증오하는 데 골몰하여, 그저 기득권의 밥그릇을 지키는데 이용되고, 극단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으로 스스로의 지위를 '제한'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그만큼 암울할 것입니다.
- 극단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기존 엘리트들을 "높은 교육 수준의 부유한 자유주의 엘리트 카르텔"이라고 공격해 왔는데요. 일전에 신보수주의자들은 단숨에 신자유주의자들과 타협했지만 극단주의자들은 기존 체제를 불신하기 때문에 또한 이런 목적을 위해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능수능란하게 거짓과 허위의 외피를 두르고 철저히 체제와 인간을 이용하는 기술로 보건대, 인류의 역사에서 쉽게 볼 수 없던 자들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비록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여전히 우리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하고 있지만, 사람들을 구조적으로 불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이는 거의 없다.
최고의 방법은 정치적 제도(공식적인 규칙과 원칙)와 사회적 규범(행동 방식에 대한 비공식적인 기대)을 구축함으로써 약속을 영구화하는 것이다.
부유한 이들은 일반적으로 낮은 세금과 낮은 공적 지출을 선호한다. 반면 가난한 이들은 높은 세금과 높은 공적 지출을 선호한다.
오늘날 우파와 좌파 진영의 포퓰리스트들은 기존 정치인들을 모두 제거해야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늪에서 물을 완전히 빼내야 한다고 말이다.
전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부유한 이들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 국가가 전제주의 국가보다 부자의 재산권과 자유로운 발언권을 더 효과적으로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쪽 극단에는 사람들에게 평등한 경제적 권리를 허용하고 시장이 가능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거대한 경제적 불평등과 자기영속적인 엘리트 집단의 위험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있다.
민주주의 불평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민주적인 정부는 대중에 의한 통치, 구체적으로 말하면 앞서 민주주의의 덫에서 살펴본 ‘중위투표자‘에 의한 통치를 뜻한다.
민주주의가 분명 뭔가를 갖춰야 한다면, 아마도 대다수가 소수의 부를 억제할 수 있는 역량이 아닐까?
모든 기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로봇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만으로는 기업이 근로자 교육에 매진하도록 설득할 수 없다.
시스템 안에서 최고 교육을 받은 승자들은 일자리가 개인의 기술과 노력을 상징한다는 능력주의 주장을 자기 정당화나 설득의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다.
20세기 동안 연대주의 국가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확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뛰어들었던 이유는 바로 그 가난한 이들이 정부를 구성하는 일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집단 내부의 행동에서 외부 민족 집단에 대한 태도로 시선을 돌려보자, 민족적 다양성이 연대를 약화하는 한 가지 간단한 이유는 민족 집단끼리 서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시적인 차원에서 다양성을 바라볼 때, 사람들을 서로 다른 집단으로 분류하는 이런 행태의 ‘구조적인‘논의는 인간을 평등하게 바라봐야 하는 도덕적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한 이들보다 중산층에 특히 관대한 (실질적으로 더 나은)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사회복지제도는 정치적으로 더 안정되고 연대는 더 단단해진다.
미국은 흔히 말하듯 오롯이 혼자 힘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나라가 아니다. 다만 그 방안은 더 높은 정부 지출이 아니라 더 낮은 세금으 모습으로 위장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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