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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의 귀환
샹탈 무페 지음, 이보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11월
평점 :
1943년 6월 17일, 벨기에의 샤를루아에서 태어난 샹탈 무페는 세계적인 정치철학자이자 정치 이론가로, 당대 지식인들 가운데 급진 민주주의 모델을 가장 옹호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1964년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이후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영국의 국립대학인 에식스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MA) 과정 이수를 거쳐, 평생의 학문적 동지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만나게 됩니다. 현재 그녀는 영국의 공립 연구 대학인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데리다와 그람시를 비롯, 포스트구조주의 정체성 이론을 바탕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재해석했습니다. 또한, 급진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좌파 정치를 재정의하기도 했는데요. 지금까지 그녀의 이름을 가장 잘 알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의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은 전세계에서 많이 언급되고 인용되는 저서이기도 합니다. 지금 소개할 이 책의 큰 골자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롤스와 드워킨을 비롯한 숙의 민주주의의 비판적 분석, 그리고 칼 슈미트를 인용하며, 자유주의가 갖는 한계, 그런 인식 속에 민주주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The Return of the Political"로 지난 199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7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상탈 무페의 이 글은 소위 자유주의의 승리로 일컬어지는 '냉전의 종식'에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극우의 준동 및 전체주의의 부활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떤 길을 가야만 하는가"라는 시대적 요구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무페의 논증을 통해 드러난, "자유주의가 시민의 도덕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는 결론에 깊게 수긍하면서, 앞선 전체주의의 재구축 혹은 부활을 막기 위해서는 8장의 도출된 해답처럼, "진정한 민주적 다원주의를 창출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물론 여기까지 이르는 일관된 주제 의식과 관련된 여러 의견 교환과 분석 전반의 논증 들은 독자들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정치학과 정치 이론 및 정치 철학의 기본 지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쉽게 일독할 수 있는 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무페가 이미 1990년대에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세계가 안고 있는 인식과 환경의 불일치, 사회 각각의 심각한 갈등 요소, 그리고 시민들의 도덕성 결여가 자유주의가 기본적으로 안고 있던 노골적인 개인주의화에 따른 파급으로 비롯된 문제라는 점을 밝히고 있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첨언을 하자면, "더 이상 자유주의가 사회의 아우르는 만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시민들이 빠르게 인정하고 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페가 그녀의 다른 논저들을 통해, 밝힌 '급진 민주주의의 모색'은 그런 연장선 상 안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무페가 거듭 인정한,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과감하게 분리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런 이론적 획책은 이들의 이익을 위해 손쉽게 이행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등의 문제는 자유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있어 핵심 요소였음에도 불구하고, 평등에 받아들일 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조장을 확산시켜 왔습니다. 이미 무페는 이 글에서 카를 슈미트를 빗대어, 자유주의자들이 모든 시민을 동등하고 평등하게 대할 것을 어떤 선언적 의미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사회는 사실상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는데요. 물론 존 롤스의 주장을 끌어들여 자유 만을 강조했던 자유주의의 노골적인 개인주의화가 결국에는 입에 발린 사회 정의조차도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우리가 홉스 시대를 거치면서 인식하고 있던 공동선의 문제에 있어서도 사실상 민주주의 체제가 이런 공동선, 공동 이익에 대한 실질적 안배에 실패하게 됨으로써, 결국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제한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선 무페의 분석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분리하려고 했던 움직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가렛 존스와 같은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의 과잉'이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미국 자유 민주주의의 소산이라 수식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다른 말로 존 롤즈가 추동한 그의 학문적 작업이기도 한 자유주의적 철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미국 사회의 자유주의적 방향성을 먼저 선점하고 싶었던 롤즈의 열망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찌됐든 그의 작업은 많은 학자들의 관심과 반대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무페 역시 존 롤즈와 드워킨, 매킨타이어를 인용하며 결정적으로 '자유주의 관점의 한계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롤즈는 자신이 살아있던 거의 직전까지 '정의론'이 도덕철학에 속한다고 주장하기는 했으나 엄밀히 따지면 정치학과 정치철학 및 인간철학에 관여된 복잡한 양상의 논의였습니다. 자유로운 다수의 시민들이 자유주의적 관념 내에 합리적 이익 추구를 바탕으로 사회를 정의에 가까운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막연한 주장은 그것의 진위 여부를 떠나, 확실히 이런 논리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총아라고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비슷한 예로 '복지 국가'를 아예 퇴출하고 싶었던 (물론 성공했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이 복지와 관련된 담론에 대해서도 저런 유사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물론 무페가 간접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이 장의 비판적 논의들이 '자유주의자 대 공화주의자'의 형태로 롤즈의 주장을 섭렵하여 확대된 사회 정의로 나아가는 가능성이 왜 자유주의적 관념에서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지를 공화주의적 세계관이 이에 반대하는 모습은 어느 정도는 꽤 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일전에 읽었던 필립 페팃의 '공화주의적 자유'를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공화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자기 통제적인 공동체"라는 선결 조건은 그만큼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마키아벨리에게 시민덕의 실천과 공동선에 대한 봉사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목적 추구를 허용해 줄 인격적 자유의 정도를 우리가 보증하기 위해서다"라는 2장 말미의 인용은 그만큼 현실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능 정도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스스로 가늠하게 만듭니다.
이어지는 3장의 논증에서도 그렇지만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민주적 다양성, 즉 민주주의 체제 내의 다원주의적 토대의 확대는 자유주의가 거의 용인했다고 봐도 무방한 공동선의 추방에 따른 그 결과로 정치와 도덕의 배제가 치른 대가를 최소화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시민 사회 내의 갈등 문제나 정치적 문제를 종교의 교리처럼 이해나 화해의 수단으로 덮어나가는 것이 세간의 다원주의의 요구의 목적이 아니라는 점은 모두가 알 것입니다. 저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바로 다원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를 좀 더 확대해 본다면 개인의 도덕적 본성과 민주적 다원주의는 서로 밀접할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계몽주의 시대에서 강조한 도덕의 본성이라는 것이 이처럼 각각의 맥락에 서로 얽혀 있다고 판단됩니다. 다시 롤즈로 돌아와서, 그가 강조한 정의의 문제가 진실로 도덕의 문제라고 이해했다면 옳음과 정의의 우선적 실행은 양자 모두가 도덕적 목표들 가운데 포함되어야만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도덕적 본성에 추동한 시민들이 정의의 문제에 눈을 감지 않게 되는 것은 옳은 결정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정의관을 무페의 제언처럼. "엄격한 정치적 지반 위에 둘 수 있게 하는 조건들을 확립"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거의 2세기에 걸쳐, 자유주의자들이 구축한 국가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이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중립'의 문제 등 이러한 배경에서 오랫동안 선으로 여겨져 왔던 개인의 선택과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덕적 본성을 구축한 시민들의 자기 제한적인 결정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대립처럼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런 정의의 물음조차도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거의 시녀로 거느리게 됨으로써 발생된 가치 정복의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유주의에 있어 '자유'가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원래 자유 민주주의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 두 가지의 정치적 원리를 긍정하고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더불어 2장에서, "평등이 우리에게 핵심 목표인 이유는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이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적 시민관이 문제가 많다는 점은 무페의 일관된 논증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시민관이 사회 내부에 제대로 뿌리 내린 것을 차치하더라도 우리 시민들에게 다양한 생각을 공유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물론 현대 민주주의가 2세기나 이어진 시민 사회의 건전성을 요구하고 다양성의 논리를 중요하게 개념화시킨 점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4장의 "다원주의의 옹호, 개인적 자유의 관념, 교회와 국가의 분리, 시민사회의 발전, 이 모든 것이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구성 요소"라는 일련의 열거들이 이 체제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깨닫게 되는데요. 이런 진술을 토대로 저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협력해야 하는 서로 동등한 개체이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종속시키고 자신의 원리를 위해, 상대를 부속으로 만드는 것은 특히 시민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페가 아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유주의가 오늘날 나날이 축소되고 있는 다원주의 관념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거의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럼에도 무페는 자유주의에 반하는 다수 공동체주의자들이 바라는 "민주주의의 정치 공동체가 단일하고 실체적인 공동선의 관념을 중심으로 조직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에 "개인적 자유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강한 참여를 주장하는 시민권의 관념을 회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그녀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간의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대한 요구를 자신이 자유롭게 삶을 조직하고 자유를 누리는 권리에 있어 훼방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개인의 도덕성이 그 자체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 자체는, 자유주의가 공동체주의와 타협을 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저자인 무페는 4장에서 이 부분의 진술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지만 개인적 권리에 대한 과도한 특권화라든지, 자신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를 함께 고려하지 않는 행위 전반을 편파적인 관념화로 이어지는 사고 과정은 분명 지양해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현대 자유 민주주의 세계에서 일반 시민들은 사적인 부분과 공적인 부분의 권력 차이를 심각하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공적인 영역에 대한 개인주의적 시민들의 태도는 다소 분명해 보입니다. 있지도 않은 '나의 권리 침해'에 대해 민감하기 때문에 그만큼 민주 체제에서의 시민들이 인식하는 공적인 영역의 존재감이 옅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페가 이번 장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자유주의가 축소 시킨 정치의 영역을 하찮은 것으로 치부하지 말고, 우리는 "일련의 윤리-정치적 가치들을 공통으로 인정하면서 서로 유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동안 많은 정치학자들이 애써 개념화한 시민권의 의무를 인식하는 데 중요하고 이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공적인 일이 만인을 위한 평등과 자유라는 자유 민주주의 채제의 정치적 원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물론 시민 사회 전반이 인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눈치를 챈 분들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자유 민주주의에서 평등이 자유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평등의 제반 원리들이 민주주의의 다양성과 다원주의와 쉽게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의 2장과 4장의 전반적인 분석적 논조와 그에 따른 논증들이 단순히 민주주의를 강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외와 공동체주의가 대결하는 가운데 서로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다시금 살펴보는 것처럼, 결합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역시 놓치고 있는 부분을 생각해보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권력 관계의 구조를 이제는 적절하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수많은 진술 가운데 드러나는 진면목이라고 여겨집니다. 결국 이는 체제와 이를 떠받치는 시민 사회를 새롭게 구축하여 분열되고 단절된 각각의 시민 사회 그룹의 연결성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극단주의의 파국에서 공론장의 확대나 혹은 정치적 편향, 혹은 과도한 정체성 정치를 제어하는 것 이전에 "왜 우리가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 기반이 강조하고 있는 기본 원리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런 범주 안에 우리의 행동 양식이나 각자의 관념 체계를 먼저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끝으로 샹탈 무페는 자신의 급진 민주주의 이론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적지 않은 분량에서 카를 슈미트를 인요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역겨운 이력 때문에 특유의 정치적 대결주의와 결단주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자인 무페는 슈미트의 이론은 오만하고 멍청한 자유주의의 과오를 돌아보고 이것을 토대로 견실한 민주주의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슈미트가 불완전한 민주주의에 대해 냉소를 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민주주의를 부정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8장에서, 저자는 "슈미트가 주로 반대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점은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확실하게 나타난다."고 첨언합니다. 여기에 슈미트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 자체로 자유주의가 정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단언과 이러한 연계에서 오늘날 자유주의가 침투한 정치 환경이 어떻게 왜곡되어 왔는지 여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듭 반복하지만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정치 현상의 본성"을 파악할 수 없다는 진술은 슈미트를 매개로 무페가 분석하는 우리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적 사고가 그 개인주의로 말미암아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일맥상통한 부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페가 왜 급진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는지 이 대목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었는데요. 극단주의 세력이 아무런 지식 없이 자신들의 자유를 내세우며, 민주주의가 병들었다는 주장을 펼치는 대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교묘하게 이 자유 민주주의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무능한 자유주의와 그런 자유주의의에 종속된 민주주의가 작금의 극우 포퓰리즘과 극단주의 세력의 확대를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신물나게 들어온 기존 엘리트 체제의 극도의 혐오와 무능이 여기에 부채질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아마도 그렇기에 무페는 7장에서, 민주주의가 다원주의라는 외피를 둘러야만 한다고 강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 저자인 무페의 중요한 생각들을 제 마음대로 재단하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에게 7장부터 9장의 내용들 만큼은 충분히 숙고하면서 일독해 보셨으면 합니다. 카를 슈미트를 쉽게 용서할 수 있을지는 개인의 몫이지만 그를 통해 바라보는 자유주의와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길잡이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페에게 있어, 자신이 사실상 고안한 '접합'이라는 용어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한 세기 가까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접합된 상태로 공존해 왔는데 그녀는 또 다른 의미로 접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가 다양성, 즉 다원주의와 접합하는 것을 긍정하면서, 여기에 과거의 공동선이 회복될 수 있느냐 (근본적이든 표면적이든 간에)는 이 접합의 기술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글에서도 등장하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자유주의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접합한 문제를 무페는 어떤 사조의 구분 정도로만 짧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존의 자유주의가 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철저히 왜곡되었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단순한 서술의 기법이 놓여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슈미트는 우리가 친구와 적의 관계라는 정치학의 중심에 관심을 두도록 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적의의 요소와 연결된 정치적인 것의 차원을 알아차리게 한다.
근래에 신자유의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은 자유 및 평등과 같은 개념들을 다시 정의하고 자유의 관념을 민주주의 관념으로부터 탈접합하려 하는데, 이런 시도들은 자유민주주의 전통에서 서로 다른 유형의 친숙성들을 활용하게 해 주는 서로 다른 전략들이 어떤 식으로 추구될 수 있는지를 입증한다.
마키아벨리에게, 사람들이 시민적 덕을 행사해야 하고 공동선에 봉사해야 하는 이유는, 자기 고유한 목적의 추구를 허용하는 특정 정도의 인격적 자유를 스스로에 보증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거의 동시에 ‘신자유주의자‘집단은 [존슨 대통령이 추진한] ‘위대한 사회‘의 재분배 정책을 공격했으며 경제에 대한 국가의 늘어나는 간섭을 공공연히 비난했다. 그들은 밀턴 프리드먼과 더불어 자유 시장 자본주의로의 복귀를 설교했다.
이 저자들에 따르면 오늘날 미국 사회가 겪는 위기는 사회적 유대의 파과에 있으며, 그렇게 된 이유는 개인들에게 자기 이익만 돌볼 줄 알고 자기 자유를 구속할지도 모르는 의무는 모두 거부하라고 자유주의적으로 선동했기 때문이다.
평등이 우리에게 핵심 목표인 이유는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인데,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이 가치가 깊이 스며들어 잇는 제도와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가치를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반대로 공화주의 언어에서 자유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활동을 통해서만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는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관과 연결되어 국가의 통치에 참여한다.
여러 공동체주의자들은 인간 주체의 본성에 관한 특정 교리인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곤리의 옹호, 다원주의의 인정, 국가 역할의 제한, 권력 분립 등 ‘법치국가‘의 특징을 이루는 일련의 제도들로 이루어진 정치적 자유주의를 구별하지 못한다.
물론 몇몇 자유주의자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자유 시장경제가 없이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유주의의 한 조류에 불과하다.
"정치적 정의관은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종교적 교리나 철학적 교리, 도덕적 교리에 의해 정식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 사회의 공적인 정치 문화 내에 잠재되어 있다고 보이는 일정한 기본적 직관들로 정식화 된다."
롤즈가 공리주의자와는 반대로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을 말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들이 일반 복리를 위해 희생될 수 없으며, 개인들이 추구해도 무방한 가치관들이 무엇인지를 제한하는 역할을 정의 원칙들이 수행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급진 민주주의적 접근은 우리가 시민으로 행동하려면 끊임없이 조화해야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소실점‘이 바로 공동선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내가 주장하고 있는 접근 방식에서 급진 민주주의 시민권의 목표는 공동의 정치적 정체성을 구축하여, 새로운 평등주의적인 사회관계들, 실천들, 제도들을 통해 접합되는 어떤 새로운 헤게모니의 살립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슈미트에 따르면 절대적 인간 평등, 즉 불평등이라는 필수적 상관물이 없는 평등은 그 가치와 실체를 강탈당한 것이어서 아무 의미 없는 평등이기에, 인류의 민주주의 관념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도전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정치 현상의 본성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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