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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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레비츠키는 미국의 저명한 비교 정치학자로 특히 남아메리카 정치 연구에 있어 탁월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는데요. 그는 스탠포드 대학을 거쳐,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 (UCB) 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2000년에 조교수로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과에 합류하고, 사회과학 부교수를 지내며, 2008년에는 같은 대학의 정교수로 재직합니다. 또한 하버드 대 인문대학의 최대 규모 연구소인 '웨더헤드 국제 문제 센터 (WCFIA)와 데이비드 록펠러 라틴 아메리카 연구 센터의 집행위원회 위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민주적 제도에서 일반적으로 정치 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과정에 있어, 오랫동안 학문적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데요. 그는 최근에 동료 학자인 대니얼 지블랫과 함께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로 전세계 학계에 큰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저자중 한 사람인 대니얼 지블랫은 2018년부터 하버드 대학의 정부학 교수로 재직중이며, 유럽 국가 중 독일과 이탈리아 정치에 폭넓은 이해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권위주의 정치에 관한 탁월한 권위자가 이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 두 학자의 논저인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미국 뉴욕 타임즈와 독일 슈피겔의 주목할 만한 도서로 선정되었고, 워싱턴 포스트, 타임, 포린 어페어스에서 선정한 2018년 최고의 논픽션 도서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큰 반향을 일으킨,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후속작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책은 원제, "Tyranny of The Minority"로 지난 202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4년 5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바로 오늘이었던 것 같은데요. 모 지상파 라디오 채널의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채상병 특검'의 무산과 관련해, 바로 이 책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그 진행자가 인용한 부분은 바로 5장의 논증 가운데 한 곳이었습니다. "모든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결주의를 어느 정도 제약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에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는 인용을 필두로 나중에는 제가 존경해 마지 않는 민주주의자 로버트 달의 발언을 첨언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이 진행자는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볼 수 있는 '반다수결주의 제도 counter-majoritarian institutions'의 핵심을 빼먹고 언급하지 않아 어찌됐든 저로서는 다소 아쉬운 문답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작금의 대통령 거부권 정치에 대해,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도 이 논저를 인용할 정도로 우리 정치의 위기감을 어느 정도 대변했다고 볼 수는 있겠습니다.

일단 두 공저자의 이 논저를 통해, 최초의 성문 헌법이라고 볼 수 있는 미국 헌법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과 더불어, 이 당시 건국의 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은 고뇌와 고민을 갖고 있었는지 새삼 이해하게 되었는데요. 그리고 이들이 세대와 세대를 거쳐, 자신들이 기초한 이 헌법이 아무런 수정 없이 '불사의 영역'으로 남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마땅히 변화된 시대와 사회 모습에 따라, 후세의 국민들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이 헌법을 고칠 수 있기를 바랬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두 공저자는 미국의 개헌이 전세계 여타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제도적으로 어렵다고 분석하고, 또한, '노예 전쟁'이라 불리는 남북 전쟁과 여성 참정권 확대와 같은 근본적으로 변화된 사회를 겸험했던 후대를 감안해 본다면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이를 위한 폭넓은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미국의 헌법과 탄생한 '백인 남성들만의 민주주의'는 앞선 남북 전쟁을 통해서도 여실히증명된 바가 있습니다. 연방의 해체라는 극명한 위협 속에서도 노예제를 유지한 남부 연맹은 자신들의 실질적 요구를 '연방 헌법'에도 강요한 바가 있습니다. 즉, 이는 '노예제도의 존속'이라는 이해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굴절은 전쟁을 통해서 사실상 국가를 남북으로 갈라쳤고, 두 공저자가 논증하고 있는 대로 현재의 미국 헌법에도 이러한 유산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다시 엄밀히 말하자면 '소수의 과대 대표'를 이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건국 헌법의 유산이기도 한 모든 주가 인구와 상관없이 동일한, '2석의 상원제'와 연방 대통령 선출에 있어 직접 투표가 아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거 인단'을 통한 간접 선거에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두 공저자는 지난 2000년 대선의 조지 W. 부시와 앨 고어, 2016년의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투표 결과를 논하면서, 선거 인단에 의한 대통령 선출의 민주주의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공저자는 현재 공화당이 과거의 정치적 유산과는 거의 단절된 채, 소수 농촌 지역과 보수적 기독교적 기반에서 표를 얻고 있는 상황을 크게 주목하고 있었는데요. 반대로 도시 지역에서의 지지를 기반으로 미국 양당 정치의 한 축인 민주당는 반대로, 헌법 위반과도 다름 없는 비도덕적인 '게리맨더링'과 티파티와 같은 소수 극단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은 공화당이 과대 표집된 소수의 권력을 통해, 의회와 대통령 선거에서 군림해 왔다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정치와 제도 왜곡이 미국 정치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자명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공화당을 접수한 '도널드 트럼프'와 거의 친위 쿠데타와 다름없는 2021년의 미국 국회의사당에서의 트럼프 지지자들의 폭거에도 불구하고 이 당은 트럼프를 중심으로 더욱 똘똘 뭉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극단주의 소수에 대한 경고는 이미 학계와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주지되어 왔는데요. 그럼에도 기존의 미국 정치가 도널드 트럼프를 통한 극단주의 세력에 포획되었고, 이것은 더 쉽게 말하자면 공화당과 미 연방이 트럼프라는 극단주의적 아이콘에 의해 포획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미국은 서두에서 언급했던 반다수결주의 제도에 대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다수에 의한 폭정'이라는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오독과 터무니 없는 우려는 다수가 주도하는 정치에 대한 노이로제를 미국 정치에 극단적으로 이식했으며, 미국이 여타 민주주의의 국가와는 상당히 다른 국가로 오랫동안 변모해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민주주의 하에서 다수에 의한 통치는 민주주의가 인류의 역사를 통해 구축해 왔던 이념이며, 5장에서 드러나는 논증대로 '다수결주의에 어느 정도 족쇄를 걸면서' 토론과 합의에 이르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현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다음 장에서 영국과 캐나다가 일종의 개혁에 나섰던 의회 내에서의 다수에 부여된 토론 합의, 즉 다수에 기우는 토론 결과에 대한 단호하고 합법적인 인정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떤 정치적 토론이 지난한 자기 변론과 대안적 사실과 같은 것으로 변질되어 '토론으로 인한 굴복'이 더욱 요원해지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의회 내의 결단은 매우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특히나 의회내에서 결정할 부분을 사법 제도로 끌고가 법의 판단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정치의 무능력화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와 관련해, 공저자들도 자신들의 연방 판사 임용에 있어, 선출되지 않은 거의 정년을 보장받은 판사들이 이런 민주주의 제도의 근간과 다름없는 정치적 결정에 있어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 마찬가지로 의문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는 의회에서 통과된 입법에 대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이를 부당하게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해치는 일이라고 판단됩니다. 저 역시, 공저자들의 이런 결론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결국 3장에서 광범위하게 논증되는 과거 백인만의 인종주의 정치의 전개는 그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다 하더라도 꽤나 반동적인 정치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나 우리의 주민등록제도와 같은 국가에 의한 신분 증명이 가능하지 않은 미국 행정하에서 흑인들이 민주주의 선거를 위해 자신의 신분을 입증해야 하는 지난한 행정 처리가 최소 남부 11개주에 조장되었고, 이후 연방 대법원에서의 극적인 법적 개선에 이르는 판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이는 흑인들과 히스패닉 및 아시안 인종의 사실상 투표 방해를 초래했습니다. 이는 소위 코카서스 인종이 주도하는 미 연방이라는 측면의 닳고 닳은 음모론을 꺼내기에 앞서 전반적으로 미국 백인 계층이 다인종 민주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방 판사조차도 다인종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부족하고 이보다 저학력의 백인 계급은 더 심각한 형편인데요. 그런 연유로 소수 계급의 극단적인 증오를 바탕으로 이뤄진 정치 행보 자체는 이처럼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렇게 미국 사회가 처절하게 분절된다면 미국 헌법에서의 반다수결주의와 함께 모두가 결코 원하지 않는 파국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더욱이 작금 공화당의 지지 기반과 이들이 취하고 있는 정치 행보가 단순히 미국의 정치 체제와 더 나아가 미국의 국익에 있어서 심대한 악영향이 될 것은 거의 자명한데요. 다음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을 좌지우지 하며 다시 한 번, 대선 후보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바로 이런 우려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7장 이후, 공저자들은 아주 강도 높게, '표준 이하의 민주주의'라는 표현으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는 종신제, 간접선거, 불균형한 의석이라는 현실의 분석으로 가늠하고 있기도 한 데요. 특히 1962년 이후, 그 기간에 있었던 연방 대법원의 판결은 연방 의회와 주 의회가 선거 다수를 대표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소위 보편적 민주주의에 근접한 정치 제도를 긍정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양원에서의 투표에 반하는 결과들과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치에서의 사법의 영향이 그 전보다 더욱 비대해지기도 했습니다. 다만, 인종주의 정치와 소수 계급에 집중된 메커니즘이 오늘날 미국 정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만약 이들 극단적 소수 정치가 국역된 책의 제목처럼 다수를 지배하게 된다면 그것은 과거 독일 전체주의와 맞먹는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겠는데요. 이는 미국 정치와 그로 인한 민주주의의 건전성은 자신들만의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방위적인 세계 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도래할 지 모르는 극우 포퓰리즘 정치의 선두주자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을 분석하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8장에서, 자신들을 포함한 미국인들이 지난 4년의 트럼프 집권을 견뎌냈다는 것 만으로도 미국의 민주주의가 어떤 혼란과 파국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을 견지하고 있었는데요. 암담하다면 암담할 수 있는 이 작금의 현실에서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에 대한 변별력과 자정 능력을 영원히 상실하게 된다면 단순히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이 아니라, 다시 한번 미국 정치의 궤멸적 상황을 전세계인이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 정치에게도 불안한 시사점을 안겨 준다고 볼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작금의 우리 정치도 무엇보다 심각한 병리 현상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지점에서 어떤 정당과 어떤 정치인을 지칭하고 있는지는 이미 여러분 모두 잘 인지하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약간 논외이기도 하지만, 작금의 극단주의 정치에 있어, 과거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선임 고문인 캘리언 콘웨이의 '대안적 사실'이 바로 그 시초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5장의 제목과 그것에 반하는 후반부의 논증, 그리고 전반적인 내용은 실로 대단하다고 여겨졌는데요. '반다수결주의'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이것이 초래한 민주주의 전반의 병리적 현상은 유독 미국에 국한된 현실이기도 하지만 이것의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고, 폭동을 조직하고, 반란을 조장하고, 폭탄 투척 및 암살 등 다양한 테러 행위를 계획하고, 정적을 물리치거나 유권자를 위협하기 위해 군대나 폭력배를 동원하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자가 아니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정치인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주류 정당이 전제적인 극단주의자를 용인하고, 묵인하고, 혹은 이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할 때, 민주주의는 곤경에 빠진다.

혹은 탄핵을 생각해보자. 대통령제 민주주의하에서 헌법은 일반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는 권한을 입법부에 부여한다.

연방이 투표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부 지역의 민주주의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존슨의 민주당은 남부 보수 진영을 넘어선 자유주의 계파와 더불어 시민권을 옹호하는 정당이 되었다.

이후 로널드 레이건이 이러한 남부 전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는 1960년대의 시민권법과 투표권법에 반대했고 주州 의 권리에 대한 주장을 1980년대로 이어나갔다.

티파티는 "자신의 나라를 되찾기"로 결심한 나이 많은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 미국인들이 주를 이룬 전형적인 반동적 운동이었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는 인종적 분노는 당파적 문제가 아니었다. ‘양당‘의 당원들 모두 전통적인 인종적 수직체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인종적 보수주의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민주주의자 대부분은 개인의 자유, 그리고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야당의 권리가 다수결주의 범위 너머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해밀턴은 연합규약을 비판하면서 모든 주에게 평등한 대표권을 부여하는 방식은 "다수의 지배라는 개념을 요구하는 공화국 정부의 근본 이념과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2차 세계대전 무렵에 유럽 대륙의 민주주의 국가들 대부분이 다양한 형태의 비례대표제를 실시했고, 오늘날에는 인구 1백만 명 이상인 민주주의 국가들 중 80퍼센트가 그렇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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