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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시간 -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
하랄트 얘너 지음, 박종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평점 :
하랄트 얘너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문학, 역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자유 베를린 대학에서 같은 분야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1994년부터 1997년까지 프랑크부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문학 평론으로 글을 기고했고, 이후 베를리너 차이퉁에서 편집자로 경력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는 2011년부터 베를린 예술 대학의 문화 저널리즘 명예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얘너는 1945년의, 나치 독일의 패전 이후, 근 10여년의 독일 시민들의 삶을 보다 면밀히 분석한 이 작품으로 2019년 라이프치하 도서전의 논픽션 상을 수상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olfszeit : Deutschland und die Deutchen 1945-1955"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중의적인 표현이라 볼 수 있는 글의 제목은, 6장 초반부에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즉, '자연 상태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늑대인' 시간이 독일인들에게 찾아왔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을텐데요. 이것은 원칙적으로 토머스 홉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상의 의미는 나치가 600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사실에 대해, 별반 생각이 없던 당시 사회 풍조와 그런 독일 시민 대부분의 일상적인 관념을, 어쩌면 비틀어서 드러내는 장치로도 읽혔습니다. 지금에야 독일 시민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비참하고 참혹한 과거 역사에 대해 충분히 이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지만, 수도 베를린이 연합군에 의해 점령되고 그 역사의 분기점을 맞이했던 평범한 시민들이 나치가 저지른 끔찍한 일들에 대해, 초기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들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얘너의 치밀한 서사는 읽는 이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제가 접한 이 글의 서사들 가운데, 충격적이었던 점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댓가'를 어느 정도 자각한 옛 동독 지역의 시민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갖고 달려드는 옛 소련 병사들이 현지에 있던 200만 독일 여성들을 향해 벌인 파렴치한 강간에 대해, 일부는 반쯤 체념하며 받아들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 스스로도 굳이 언급하고 싶진 않지만 '죄의 굴레'가 이런 식으로 돌아왔다는 식의 역사는 참으로 잔인하지 않은가 싶었습니다.
과거 나치는 한창 전쟁 중이던 상황에서 동부 전선에서 거의 700만이나 되는 민간인들을 노동력 보충이라는 미명하에 강제로 독일로 끌고 옵니다. 아마도 대부분은 슬라브계 주민들로 추정되는데요. 종전 이후, 앞선 이들을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야만 했고, 소련 지역의 수용소에 분산 되어 있던 독일 병사들을 반대로 그들의 모국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복잡한 흐름 속에 놓여 있었는데요. 이에 본격적으로 연합국이 독일에 진주하면서, 연합국이 '자유주의적으로' 어떻게 독일 사회와 정치를 재조정해 나갔는지도 그 이행의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도 합니다. 연합군의 점령 초기에 2장과 3장에서, 독일의 남성 인구가 전쟁으로 말미암아 유출된 상황에서 거의 힘이 없던 독일 여성들이 어떻게 스스로 자립해 나가는 지를 저자는 입증되는 사료들를 통해, 글을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이 때의 많은 여성들은 터무니 없이 부족한 배급 상황에서 자신들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거의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요. 연합군의 군 간부에게 자신의 성을 매개로 먹을 것을 구하려고 했던 여성들을 포함해, 단순히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사력을 다해 이 힘든 시기를 이겨나갈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여성들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부분은 '원죄'의 여부를 떠나 실로 안타까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지도층이라고 볼 수 있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이 서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 단순히 나치에 부역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모든 독일인들을 법의 입회 하에, 모두를 처벌할 수 없었던 부분도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된 나치 독일의 악랄한 죄과들 가운데 충격적인 부분은, 자신들이 패망하기 며칠 전까지 독일로 끌고 온 수십만명의 강제 노역자와 전쟁 포로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전쟁 범죄였습니다. 여기에 관여한 군 요직자들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것은 물론, 조사 부족과 현지 상황의 한계로 말미암아 이들에게 제대로 된 단죄가 내려지지 않은 점은 참으로 역사의 음울한 측면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사건은 아마도 나치에 단순가담해, 그 죄를 일일이 따질 수 없었다고 판단한 했던 당시 시대상의 한계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인간 본연의 양심적 기반이 무엇보다 참혹한 전쟁을 경험한 이 세대에게는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이 점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면, 연합군의 독일 진주 이후, 부역자들에 대한 구분과 분석이 다소 관료적인 측면에서 편의주의적으로 계산되어, 누구보다 무고한 희생자들이 인류가 인지하지 못하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실상 은폐 되었다고 보는 편이 일견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아직도 폴란드와 라트비아 등에 수많은 전쟁 고혼들이 묻혀져 있는 것도 이러한 한계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면밀한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상황에서 이 글의 중후반부에 드러나는 독일 사회의 분열은 그것대로 더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언급한 연합군 군정의 식료품 배급과 이를 집행하는 중간 관리자들의 야료로 말미암아 '암시장'이 발생 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측면과 이런 상태에 놓인 적지 않은 독일인들이 직접적인 약탈 행위에 놓인 사회적 배경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먹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시민은 '난폭한 군중'이 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과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혹은 추구한다는 이런 냉엄한 현실은, 인간 본성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설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음 5장은 이러한 분석을 매개로 소위 '궁핍한 자들'의 실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늑대들의 세상에서 여성들이 겪은 수많은 고초와 함께, 바로 이들이 지금의 독일을 만든 하나의 디딤돌이라는 측면에서 5장 후반부에 드러나는 진술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독일이 살아남는 데 실제로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미군 부대에서 일한 수많은 여성들이었다"는 실체적 결과물입니다. 심각한 PTSD에 시달리며 문제를 일으킨 귀환병들이 아닌 이 시대의 가정을 건사한 것은 일반 여성들이고 이것에 기반한 독일 사회가 비로소 온전히 설 수 있었다는 진술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에 반해, 독일 지식인 사회와 정치 일각은 어느 정도 분열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외국으로 망명한 지식인 그룹과 이와는 반대로 눈으로 나치의 패망을 목격한 지식인들 간의 반목은 가볍다고 볼 수는 없었는데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토마스 만의 사례는 이를 여실히 입증하고 있습니다. 망명 지식인으로서 다른 지식인들에게 '비겁한' 인물로 낙인 찍힌 만은 분열된 역사의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물론 당시 독일 사회가 나치에 부역한 인물들을 아주 철저하게 내쫓은 것은 아니지만 다소 마음에 들지 않은 인사들을 이런 낙인으로 공격했던 것은 거의 분명해 보이는데요. 나치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소위 제3제국에서, 이 체제에 대항했던 소규모 지식인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고, 이들이 연합군 정보국에 협조했던 것도 사실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분열이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독일 내부의 자유주의적 개혁에 상대한 장애물로 작용한 것도 분명한 사실인데요. 이에 독일에 진입한 대다수 미군들이 독일의 고전주의적 문화에 대해 일정 부분 선을 그은 정치적 맥락이 실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 어떤 체면과 모양새에 집중한 당시 독일인들의 성향이 관계 전반에 솔직함을 미덕으로 여기고 있던 미국인들에게는 실로 이질적인 부분이었을 겁니다. 더욱이 독일 내부가 정치적으로 좀 더 통합되고 좀 더 시급하게 개혁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어야 했지만 상대적으로 무분별한 축제 문화와 마치 현실을 도외시하는 일부 인사들의 존재는 독일인들이 얼마나 현실 회피와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는지 짐작하게 할만합니다.
끝으로 연합국이 주도한 독일 사회의 구조조정 작업은 많은 독일인들이 연합국에 가졌던 양가 감정과 더불어 그들에게 있어 상당히 복잡한 감상이었을 겁니다. 독일에 진주한 연합군이 과연 해방군 일지 아니면 점령군 일지를 명확히 다룰 수 없던 현실과 동쪽으로 진군하여 거의 야만적인 행태를 보인 소련군은 약간 상이하지만 만주에 구축한 일본 군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모조리 자국으로 적출했던 시기와 묘하게 연계되기도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완독했으면서도 과연 독일이 나치의 잔재를 모조리 뿌리 뽑았는지, 여전히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었는데요. 그것은 현재 독일 내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네오 나치의 존재와도 결부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굳이 카를 슈미트를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거 그의 존재 자체는 독일 사회의 이러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근본적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여기에 레오 스트라우스를 더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좀 더 의견을 더하자면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낸 지식인들 가운데, 고작 '카를 야스퍼스'밖에 없었다는 중요한 사실은, 작금의 독일 연방 공화국이 전세계에 있어 일본과는 사뭇 다른 정치적 평가와 다소 상반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독일의 전후 세대들은 이후 독일이 이룩한 경제적 번영과 민주주의적 정치 발전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한다는 입장을 줄곧 견지하고 있었는데요. 이 글 8장에서 말하는 '연합국의 독일 정신 개조'에 대한 작업이 그런 측면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된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후 '늑대의 시대'를 몸소 경험한 독일인들의 후예들이 과연 어떠한 반성과 성찰을 하고 있는지 다시금 되묻고 싶은 심정이 들었습니다.
수십만 명의 군인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된 이후 베를린에서 남성 부족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심각했다. 왜냐하면 베를린은 전쟁 전부터도 미혼 여성들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항복 후 일시적으로 가둬야 할 독일 포로들이 너무나 많아서, 연합군은 그중 약 100만 명을 이른바 ‘라인강 초지 수용소‘라는 곳에 가시철조망을 쳐놓고 지분도 없이 몇 주 동안 짐승처럼 풀어놓았다.
독일로 향한 유대계 폴란드 주민들의 탈출은 망명과 추방이 특징이던 이 시기의 가장 충격적인 이주에 속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나치의 나라에서피난처를 찾아야 하는 상황은 많은 유대인에게 극도의 심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인 것은 많은 실향민이 그처럼 과거 지향적인 성향을 가졌음에도 전후 사회 현대화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신생 공화국이 나중에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문화적, 사회적 혼합은 그들로 인해 촉진되었다.
독일 여성을 이런 양공주, 혹은 당시 흔히 부르던 ‘양키 애인‘으로 냄몬 가장 큰 동기가 물질적 궁핍이었다는 사실은 최근까지도 확실해 보인다.
당시의 목격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금언이다. 사람들은 ‘전쟁 이후에야 인간을 정말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말했고, 늑대의 시간, 즉 ‘자연 상태의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늑대인‘시간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법의식과 도덕 감정의 완전한 붕괴가 임박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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