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 역사, 형식, 이론 북캠퍼스 지식 포디움 시리즈 1
한스 포어랜더 지음, 나종석 옮김 / 북캠퍼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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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포어랜더는 독일의 저명한 정치학자로 본 대학과 제네바 대학을 거쳐, 본 대학에서 칼 디트리히 브라허의 지도하에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1984~85년, 1986~87년에 미국 하버드 대학의 독일 출신 학자들을 위한 '존 F. 케네디 펠로우쉽'에 참여했습니다. 그렇게 유럽에 소재한 여러 대학에서 강사와 연구 교수로 일한 포어랜더는 2007년부터 자신이 설립한 "헌법 및 민주주의 연구센터 (ZVD)"의 이사직을 맡고 있고, 2005년까지 독일 정치 학회 (DGfP) 의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이후에는 드레스덴 공과 대학의 정치학 교수를 역임하고, 2018년부터 독일 통합 및 이주 재단 전문가 위원회의 회원이자 2023년부터는 이 단체의 의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 분야와 관련 있는 '민주주의와 헌법'에 대한 여러 논저들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Demokratic-Geschichte, Formen, Theorien"으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23년 8월에 이뤄졌습니다.

'민주주의의 역사, 형식, 이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글은 짐작대로 고대 그리스 시기의 직접 민주주의를 개론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저자인 포어랜더는 이 아테네 시절의 민주주의를 '아테나이 민주주의'로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그동안 '아테네'에 익숙한 분들은 이 아테나이라는 단어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의 입을 빌어, 이 아테나이 민주주의를 간략하게 설명해 보자면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민주주의"라고 이해 되는데요. 지금도 간간히 학자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추첨 민주주의'도 이 시기의 아이디어였고, 더불어 "모두에 의한 지배"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인류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한 역사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계가 명확한 아테나이 민주주의이지만 이 때의 유산이 있었기에 14세기 이후, 계몽과 자유주의의 대두와 함께 우리가 비로소 민주주의를 대면하게 된 연유일 겁니다.

포어랜더는 2장에서, 민주주의가 복합적으로 '다수에 의한 통치'라는 점을 아테나이 시대를 빌어 인정하고 뒤이어 민회를 통해 실천했던 당시의 정치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민주주의의 제약과 한계를 인정한 조지프 슘페터를 인용하자면 다수에 의한 지배가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소위 엘리트들을 선택해, 그들에게 통치의 위임을 하는 식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변형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물론 저자 역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개념적으로 분리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없이 자유주의 만으로 '시민의 자유'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과거 유럽에서 계몽의 시대를 거쳐, 탄생한 자유주의가 이처럼 민주주의와는 별개의 사상임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슘페터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엘리트 지배 체제가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만큼 '과두제'를 온전히 예방할 수 없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이 엘리트 지배체제의 근간인 '정당 민주주의'가 미국 독립 혁명 이후 발전해, 그들이 강조하는 다양한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민주주의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진 것은 거의 부정할 수 없을 텐데요. 바로 그런 측면에서 "민주정과 과두정의 결정적 차이는 민주정은 빈민의 지배를, 과두정은 부자의 지배를 반영했다"는 저자의 진술은 묘하게도 현 시대와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뒤이어 3장에서 중요하게 논의되는 민주주의의 공화주의적 전통은 다음 4장에서 "공화국과 민주주의가 한 몸"이 되었다고 진술하는 것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미 키케로가 공화주의는 단순한 지배 질서가 아니라 '참여의 정치'로 언급한 것처럼, 14세기 이후의 공화주의와 공화국은 "덕성을 지닌 존경할 만한 시민에 의해 통치되는 것"으로 특별한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후, 그 시대의 공화정이 추구했던 '시민의 자유'가 '그들 스스로의 자치'를 뜻했다는 점도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가 프랑스 혁명 이후, 미국 독립 혁명을 거쳐, 개인의 재산권과 밀접하게 결부된 소위 개인화 된 관념으로 축소되었는데요. 이를테면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개인의 자유' 등으로 의미의 양태가 한정 지어진 것이죠. 물론 개인의 자유는 소홀하게 취급할 가치는 분명 아닙니다. 더욱이 광범위한 재산권 개념이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가치 체계인 '공익'과 '덕성'을 역사의 뒤안길로 내몰았다 하더라도, 시민에게 마땅히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인 이 자유를 결코 홀대할 수는 없습니다. 흔히 어떤 사람은 '첫번째는 자유이고, 두번째도 자유이며, 세번째도 마땅히 자유"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6장에서 언급되는 시장과 관련된 '자유 방임'은 명확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유 지상주의와 자유 방임은 때론 한 묶음으로 취급될 경우도 비일비재 하기 때문에 저자는 이 자유 방임과 관련된 논증을 좀 더 시장 뿐만 아니라 정치의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논증할 필요가 있었는데도 그냥 지나친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사실상 4장 이후, 논증되는 근대 이후의 민주주의는 현재의 민주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의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는 쉽게 공화국이라 지칭되기도 했는데요. 초기에 등장한 정당이라는 집단을 '정치 결사'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인구가 비약적으로 커지고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국민 국가라는 개념의 도출은 아마도 민주주의가 새로운 기법의 정치 체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정당 민주주의'는 비 서구권 국가들에게 완벽히 '서구의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요. 이에 저자는 이질적인 종교와 문화를 갖고 있는 중동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6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민주주의가 각각의 종교와 그리고 철학적 전통이 결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보는 점은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약간의 첨언이지만 자신의 민주주의를 전세계에 홍보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던 미국이 과거 불법적으로 CIA를 동원해, 선거로 수립된 칠레와 과테말라 정부를 무너뜨린 사례를 단순히 저자의 말마따나 '미국의 국익'이라는 논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너무나 뻔한 전개라 실망을 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인으로서의 정체를 갖고 있는 저자가 과거 베르사유 조약 이후, 독일에 수입된 바이마르 공화국이 보였던 정치적 한계를 역사적 사례를 통해 분석하고 있는 내용은 거의 명료합니다. 이를 요약하자면 "민주주의자가 없는 민주주의는 위험하다"는 취지의 인식인데요. 이것을 저의 방식대로 해석해 본다면, 수많은 시민이 그저 방관자일 경우, 그들의 민주주의는 위험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묘하게도 루소가 이미 "민주주의는 폭정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 것과 대비되어 오버랩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확연히 대중민주주의라기 보다는 정당 민주주의 시대라고 봐야 할 텐데요. 시민들이 자신들의 투표권을 통해 정부를 선출하는 일이 민주주의의 전부라고 여겨지는 시점에서 과거의 공화주의적 전통이 그에 비례하여 퇴색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처럼 명확한 현실임에도 일부 지식인들은 '과잉된 민주주의 시대'라고 열변을 토하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최근의 신자유주의를 통한 민주주의의 위축은 마찬가지로 자명한 부분인데요. 불행하게도 많은 정치학자들은 그저 이를 세계화와 밀접하게 관련된 신자유주의의 부분적인 파급에만 집중을 해왔습니다. 이를테면 도식적으로 세계화가 너무나 진행되어 세계의 민주주의가 그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는 류의 분석입니다. 하지만 인류가 급격한 발전을 이룩한 근대가 마땅히 극명한 명암을 갖고 있고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자본주의가 소수의 자본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민주주의를 '시녀'로 거느린 것은 거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미 레이건의 개혁이 그러한 의미를 갖고 있었고 심지어 리버럴이라고 지칭되는 민주당의 정치인들까지 이에 동의한 것은 그만큼 민주주의가 점차 제구실을 못해왔다는 증거일 겁니다.

끝으로 "경찰 및 군사 권력에 대한 효과적 민간 통제는 민주주의 생성과 유지를 위한 또 다른 본질적이고 명백한 조건"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무엇보다 동의하는 편입니다. 또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토론을 위한 정상적인 공론장의 기능이 네트워크 시대의 출범으로 무색해진 것은 우려할 만한 사항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어떤 커뮤니티의 검증되지 않은 근거가 바탕이 된 정치적 주장들이 비정상적으로 힘을 얻고 있다는 맥락의 분석도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일전에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다수가 소수를 정치적으로 핍박할 것을 우려해, 헌법과 사법 제도를 견고하게 고안했던 것은 꽤 유명한 일화이기도 한 데요. 이들이 말한 소수의 정치적 의미가 지금과는 많이 차이가 나는 것처럼 어느 국가에서는 자원과 권력을 가진 소수가 다수를 압도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우려들은 어떻게 보면 건전한 시민 사회가 존재하지 않을 때 흔하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라고 여겨지는데요. 민주주의 하에서 선출된 권력이 주권을 위임한 시민들의 권리를 모두 포함한 것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엘리트 지배 체제에 기반한 민주주의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저자인 포어랜더가 간접적으로 전망한 민주주의의 미래는 현실에서 더 암울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민주주의가 시민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저자의 분석대로 "권력과 권력 자원의 분산"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 그리고 지식인들의 야합으로 가까운 미래에 붕괴되어, 무늬만 민주주의인 실질적 '과두제'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글 말미에서 진단하고 있는 작금의 유럽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도 이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민주주의를 해롭게 만드는 이런 정치병리적 현상은 매우 복합적인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련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은 오늘날 시민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 답게 살 권리'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더이상 보장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년의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가 서로의 손을 붙잡고 무덤으로 들어가지 않기만을 그렇게 간절히 바랬던 것인데요. 마치 끊임없이, 끊임없이, 시민들이여 노력하라는 그의 고언이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글 말미에서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민주주의가 자유롭고 탈규제화된 시장의 지배로 대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후술되는 증거들도 그렇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맞고 있는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대장장이, 구두장이, 상인, 선원 등 빈부나 귀천에 상관없이 민회해서 연설했다.

자유주의적인 근대의 자유 개념은 개별 인간의 인격적 독립과 개인적 권리 보장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에 반해 고대의 자유 개념은 정치적 결정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목표로 했ㄷ사는 게 콩스탕의 논리다.

따라서 민주정과 과두정의 결정적 차이는 민주정은 빈민의 지배를, 과두정은 부자의 지배를 반영했다는 데 있다.

이를 행정적 개입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초기 형태의 개인 보호, 즉 국가에 대한 방어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루소는 자유와 공동 이익을 조화시키는 원칙으로서의 자기 입법을 중요시했다.

따라서 연방주의자들은 일반의지와 이익을 위해 특수 의지와 반대 의견을 무시하거나 억압해야 한다는 루소의 견해를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써 루소와 대립각을 세웠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질서가 인민주권과 다수의 지배에 기초한 민주주의여야 한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집단의 자유를 보호하고 다수결에 의한 폭정을 막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연방주의자들은 인민 지배의 독재를 두려워했고 순수 민주주의의 다수결 원칙을 불신했으므로 대의제 계획에 수직적, 수평적 권력 분립과 독립적 사봅부와 같은 추가적 예방 조치들을 내놓았다.

이제 자유는 국가에 앞서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이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민주주의를 저해하거나 심지어 파괴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등 양방향으로 작용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상대적으로 낮은 만족도는 권위주의 질서에서 민주적 자유주의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이로부터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선거가 존재하지만 민주적 자유는 결여되어 있는 전제적 또는 반민주의적 국가가 완전 민주주의로 변모할 가능성은 번창하는 시장경제가 오래 지속될 수록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시민사회 구조에 기반한 정치적 공론이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본질적인 제도적 조건이라고 보는 견해는 한나 아렌트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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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10-29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미 무늬만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요. 전세계적으로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있고 상위 1%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정치,언론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껴요. 그래서 교육도 제대로 해야 하고 선거 제도도 바로 잡아야 하는데 늘 말 뿐이니 큰일입니다.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고질적인 문제들도 풀리지 않는 숙제고요. 베터님처럼 방관하지 않고 깨어있기 위해 공부하는 분들이 계셔서 그나마 희망적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베터라이프 2023-10-29 20:40   좋아요 1 | URL
현재 유럽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이 시민의 분노를 조장하여 쉽게 표를 얻는 현실은 남일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엘리트 기득권의 지배 체제가 이미 강고하고 특히나 평범한 시민들조차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이 글에서 포어랜더가 말하는 자유의 진정한 의미, 즉 ˝시민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득권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와 일반 시민들에게 필요한 자유에 있어 그 갭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 마지막에 미미님이 과찬을 해주셨는데요. 제가 본질적으로 멋대로 사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깨어있다는‘ 표현은 저하고 절대 맞을 수가 없습니다 ^^;;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미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