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수아즈 델핀 쿠아레라는 본명의 사강은 1935년 프랑스 옥시타니아주의 카자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필명이자 문학가로서의 명성을 뜻하기도 하는 '사강'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특히 프루스트는 그녀의 작품 여러 곳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대체로 부르주아라고 볼 수 있는 부모의 밑에서 자라나 어린 시절을 프랑스 남동부 지역인 도피네에서 보낸 뒤,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과 장 폴 사르트르를 배출한 꾸르 하테머에서 수학해, 중등 교육 과정 졸업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합니다. 결국 그녀는 프랑스의 명문 대학인 소르본에 입학하지만, 대학에 대체로 무관심했던 관계로 졸업은 하지 못합니다. 이후 자신의 문학 경력의 시작이라 볼 수 있는 "슬픔이여 안녕"이 그녀가 18세였던 1954년에 출간되고, 이를 계기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녀의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에서, 결혼은 두 번을 하게 되고, 자식으로는 아들 한 명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 그녀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1990년대에 코카인 소지 혐의로 기소되어 프랑스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2000년대 이후엔 그녀의 건강이 상당히 나빠지게 되는데요. 결국 2004년 9월에 이르러 폐색전증의 고통으로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녀의 6번째 작품이기도 한 이 소설은 1965년에 원제, "La chamade"로 출간되었고, 이 번역본은 국내에 2022년 1월에 출판되었습니다.

사강의 이 작품을 일독하고 나서 스친 소감은 아니 에르노와 조지 기싱의 몇몇 소설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과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에 대한 무리한 자기 변명과 사실상 자신의 행복 만을 우선시하는 일관된 태도 같은 것들인데요. 또한 "자신의 행복과 관련해, 은연중 타인에 대해 깊은 상처를 입히게 되는 이기심이 어떤 식으로 관계를 붕괴 시키는가"는 숱한 문학 작품의 단골 주제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사강의 이 작품을 통해 과연 누구에게나 중요한 가치인 '안락한 삶'이 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거듭 고심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성인이 되어서도 감정을 인질로 상대방에게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그저 소일과 사교 활동을 병행하며 남들이 보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이어지는 안정된 삶이 목적인 사람이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사강 특유의 섬세한 감정선과 일상 대화의 농밀함이 주제를 구축하면서 주인공의 삶과 관계에 대한 진정성이 무엇인지 이를 동시에 독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이 작품이 장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행복 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움직이는 행동 방식에 대해 면밀히 관찰해보고 이를 간접적으로도 체험해 볼 수 있는 설정과 더불어 독백과 대화를 통한 내면의 감정 묘사는 이 작품의 장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루실 생레제는 작가인 사강이 그녀의 성을 작품 후반부에 가서야 의도적으로 그녀의 성을 독자들에게 노출한 것처럼,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이 결여된 여성입니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어느 여성에게나 '진정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은 없고 그것을 겪어 보지 못한 여성은 '진정한 인간'일 수 없다는 사랑의 아리아에 수긍하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물론 보통 여자가 보이는 어떤 사람과의 육체적인 관계가 열정적인 사랑의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저 역시 어느 정도 긍정하는 편이기도 합니다만 단순한 연인 관계에서도 이 육체적 쾌락은 그것 자체로 서로의 눈을 멀게 하고, 현실을 도외시 하게 하는 진정한 의미의 '열정'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루실은 자신보다 스무살 이상이나 많은 부유한 남자의 경제적 풍요로움에 기대어 나날이 안온하고 삶의 범위가 좁은 그런 윤택하고 걱정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여성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고 배려해주는 샤를에 대한 개인의 도덕적인 측면에서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는 표현들을 작가는 사려 깊이 독자들에게 알리고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그녀는 자신의 안온함과 그것이 바탕이 된 행복을 그저 평범함이라는 장식을 통해 어느 정도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인데요. 경제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그렇다고 실질적인 교양을 쌓은 여자도 아닌 그녀가 일생에 처음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즉 각자가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다 나이 있는 '후견인'이자 연인이자, 섹스 대상을 갖고 있는 경우인데, 그럼에도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딱 한번 '섹스 파트너'라는 단어를 대입한 것을 보면, 루실과 앙투안의 사랑이 어떠한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지 추정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흔히들 여성에게 상대방을 향한 '사랑한다'는 의미는 어느 정도는 복잡하면서도 중요합니다. 물론 남자에게도 '사랑한다'는 발언은 그만큼 중요하겠지만 이 작품에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작가의 말마따나 남자들이 평범한 여자가 느끼는 이런저런 감정의 편린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감안해 봤을 때, 아마도 상당한 여성 독자들은 여주인공 루실에 대해 갖는 복잡한 감정과 더불어 앙투안에 대한 그 낯설고 빠져드는 듯한 몰입의 실체에 다소간 감정이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데요. 다만 여기서 단순하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저 어디쯤에 치워두자는 것은 아니지만 루실이 관계 전반에서 보이는 태도, 특히 앞서 제가 언급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지 않으려는 모순적 행동'과 또 다른 소설적 장치였던 앙투안이 자신의 후견인 혹은 (원치 않는 일상적인 인간 관계에서 사실상 그를 보호해주는) 그늘이라고 할 수 있던 디안에게 보였던 무책임한 행동들이 서로 겹쳐져 이 젊은 연인들의 이어지는 열정적인 관계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강화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여자라도 최소한 존중할 필요가 있다"는 디안의 가슴 아픈 독백은 정말 마음 아프게 다가오기도 했는데요. 저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중에 극적인 감정의 토로를 보이게 되는 샤를보다 디안에 대한 인물 설정과 특유의 절묘한 어투가 제법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변인들에 의해 자신의 경력과 관련해, 잔혹한 커리어 우먼이라고 평가 받는 이 디안이 소위 자신이 중심이 된 '사교 공동체'에서 내면적으로도 또한 인성에 있어서도 범인 이상의 성숙한 인물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는데요. 물론 거듭 디안을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문법 혹은 후퇴할 수 없는 대전제는 그것의 행태가 역설적으로 주변인들에게 환영 받을 수 없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로 잉태되고, 나는 그다지 사랑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여러모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까지 더하는 상황에서 (거의 이기적으로) 자신의 사랑만을 추구하는 행위가 과연 인간 행위의 본질들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지는 철학적인 차원을 떠나서 절로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약간의 논외로 이 작품의 아쉬운 결말 자체는 독자들에게 있어 다소 불성실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글의 결말은 J. M. 쿳시의 작품인 추락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른 양태이면서 동시에 충격적이기도 한 데요. 물론 쿳시의 추락과 이 작품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지만 양 작품에서 억지로 뽑아낸 도덕적 인간상을 동일하게 강요할 수는 없을 겁니다. 루실이 일관되게 보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내면적인 안온함을 고려해 봤을 때 무조건 그 도가 지나쳤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부양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호의와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섹스를 통해 원하는 바를 충족할 수도 있겠습니다. 작금의 세계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니까요. 그럼에도 그녀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는 앙투안과의 재회에서 서로가 다시금 극복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은 결국 적극적인 회피를 선택합니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많은 걸 누리던 사람이 진정한 사랑과 맞바꾼 텁텁한 삶의 현실은 어쩌면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색할 정도로 두 사람은 각자의 실체를 나름의 방식으로 겪고 나서 급격하게 관계가 무너지게 되는데요. 하지만 누군가와의 관계에 있어 각자가 최소한의 책임과 결정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작가는 이 결정이라는 단어를 여주인공이 루실이 프랑스어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어느 정도는 주변까지 챙길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와는 별개로 루실과 샤를, 앙투안과 디안, 이 네 사람이 얽힌 심리 묘사와 이어지는 감정선에 대한 깊은 서사는 충분히 격정적이었고 아름답다고 느껴졌습니다. 어느 정도는 작가가 이 작품을 독자들에게 그저 난잡한 섹스 파트너들의 무책임한 연가 정도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또한 무조건 이유 없이 주는 사랑을 해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고, 반대로 관계에 있어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입혀본 경험도 있을 수 있기에 사강의 이 작품이 사랑 자체에 대한 어쩌면 냉소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문학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 작가인 사강의 묘사를 통해 앙투안의 낡은 그 방에 대한 디안의 추억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범한 루실에 대해 갖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말 이 작품의 백미가 아닌가 생각하는데요. 저 역시 이 부분에 대한 묘사에 감정이입이 되어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루실이 웃음을 그쳤다. 그녀는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전혀 없었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얼마나 하잘것없는 삶인가.

앙투안은 더러 아리송한 표정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건 오로지 책뿐이며 언젠가 출판계에서 성공할 거라고 말하곤 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문제를, 사건을 키우려 하고 있다는 걸, 조용히 치미는 자기 안의 혐오감을 물리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이미 상대의 어떤 동작도 결코 불쾌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고, 육체적으로 사랑에 관해 서툴고 유치한 날것의 언어들을 재발견하며 소곤거렸다.

그가 섹스하는 방식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어째서 우리가 이토록 열정적인 관계에 놓이게 된 거지?

그들은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나, 그들의 육체는 한없는 열광과 경애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행복은 그녀의 유일한 도덕이었고 불행은, 그것이 스스로 부과한 것인 이상(게다가 그녀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그러는 것을 평생 이해하지 못하고 나아가 끊임없이 나무라곤 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는 문득 자신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고, 그녀를 알기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여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오싹해했다.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억이란 루실의 쾌락과 그 자신의 쾌락이었으나, 그 마저도 그를 안도하게 하기보다는 번민하게 했다.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에게 그들이 쾌락으로 맺어지고, 웃음으로 맺어진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그들은 고통으로도 맺어져야 했다.

루실의 게으름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고 아무것에도 대비하지 않을 수 있는 엄청난 능력, 행복할 수 있는 재능 - 그토록 텅 비고, 무위하고, 그날이 그날인 날들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 - 이 그에게는 때로 괴이하다 못해 거의 끔찍하게 느껴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3-05-05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댓글 달다 멈추고, 다시 쓰고, 지웠습니다.
욕망이 타인과 충돌할 때와 관련한 생각을 쓰다가...^^

베터라이프 2023-05-05 23:0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그레이스님 ^^
요즘 간간히 소설 서평을 쓰고 있음에도 사강의 이 작품은
여운이 많이 남습니다 ㅜㅜ
사랑이라는 감정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몇 번이나 고찰하게 됩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요 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