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밍 사회 - 캔슬 컬처에서 해시태그 운동까지 그들은 왜 불타오르는가
이토 마사아키 지음, 유태선 옮김 / 북바이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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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이토 마사아키(伊藤昌亮) 교수는 일본의 사회학자로 도쿄 외국어 대학의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일반 IT 기업에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2001년 2008년까지 도쿄대 학제정보학부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후 현재는 도쿄도 무사시노시에 소재한 세이케이 대학의 현대 사회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사아키 교수는 일본 내의 넷우익에 대한 연구를 비롯 최근에 일본 사회에서 불고 있는 반자유주의적 현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중도 성향에 가까운 마이니치 신문에 인터뷰와 기사로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치적으로는 리버럴적인 성향을 갖고 지식인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炎上社会を考える"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이 글의 원제에서도 드러나고 있지만 염상炎上 이라는 단어는 넷상에서 익명으로 벌어지는 일부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비방이 빠르게 올라오며 이슈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요. 마찬가지로 원제에 염상사회 炎上社会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현재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극단적인 혐오 정서에 대해 저자는 사회학적인 분석을 시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이와 같은 일본 사회 내에서의 '사회적 병리 현상'은 2000년대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와 현재 일본 정치에서 거의 주류가 된 신보수주의 즉, 극우 정치가 만나 초래한 극단적인 사회 문화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와 관련된 문제를 일본 내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 '혐한'을 지목하고 이러한 배경에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적 원리인 사회 내에서의 지위를 향한 경쟁과 사회 구성원들끼리 경제적 이득을 놓고 벌이는 각축이 비정상적인 '인정 욕구'와 맞물려,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해 보입니다.

어쩌면 일본 사회의 역사적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저자는 의미심장하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당국이 자신들의 국민들에게 벌인 통제와 감시 활동에서 이런 끔찍한 현상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었는데요. 물론 이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일본 뿐만 아니라 전셰계적으로 기성 정치 무대에 등장한 '우파 포퓰리즘'과 관련해, 이들이 채용한 카를 슈미트의 '적과 아'의 정치론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이러한 맥락이 슈미트 특유의 '나약한 자유주의 정치'에 대한 반감으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기본적으로 자신들을 비판하는 상대방에 대해 광범위한 거짓 뉴스와 선동을 사용하여, 거의 가차 없는 공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건전성을 심각히 훼손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일본도 현 상황에서 정치적 주류가 오랫동안 극우에 기울어지면서 비교적 짧게 막을 내린 트럼프의 미국 정치보다도 병폐적 사회 문제는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저자의 분석대로 자유 시장의 경쟁 체제의 관념이 극단적인 여타 신자유주의적 국가들과 유사하면서도 여기에 더해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일본 사회를 이끌게 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문제점이 책의 제목과 다름없는 일본 사회의 무분별한 혐오 문화를 초래했다는 저자의 분석이 옳다면, 사실상 신자유주의가 공동체 이익과 공동선에 대한 가치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진술은 큰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1980년대에 마가렛 대처가 이 시점부터 '사회는 없다'는 주장이 과연 무엇을 의미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사회 부조가 철폐되면서, 한정된 사회적 자원(지위를 포함해)을 놓고 사회 구성원들이 벌이는 경쟁이 결국은 아름답지 않은 결말로 귀결된 점도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설사 이 부분이 일본 사회에 한정된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 기업들의 노골적인 기업 이익 추구와 넷 상에서 벌어지는 시민들 간의 익명 대결은 제대로 넷 규범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우파 포퓰리즘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습니다. 특히 앞선 카를 슈미트의 주장을 떠올려 본다면 인터넷에서의 무분별한 증오 양태와 혐오 발언 자체가 어떻게 사회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지 깨닫게 되는지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를테면 넷 상에서 평범한 한 사람의 인격 살인을 초래하는 소위 '좌표 찍기'와 부풀려지는 낙인 찍기는 유독 일본만의 상황은 아니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미국 역시 혐오 발언과 다름 없는 트롤링으로 정치적 중도를 모조리 넷 상에서 쫓아내 버린 점도 위와 비슷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일관된 논증 가운데, 3장에서 해시태그와 관련된 '집단 극화' 현상과 같은 넷 상에서의 분위기가 '시회 운동인지 아니면 군중 운동'인지에 관한 의문을 더욱 강화 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민주적 발언을 위한 어느 정도의 익명성은 필요할 수 있지만, 앞선 집단 극화 현상과 같이 평범한 주제의 의견도 쉽게 과격해지고 폭력적이 되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시장 가치'를 높이고자 특히 그 '의식의 높이'를 두고 서로 경쟁한다"는 진술은 이처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해 '깨어있다는 의식 자체'를 SNS 상에서 이용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이는 일본 뿐만 아니라 선진 민주 국가로 불리는 많은 사회에서 좌파와 우파라는 이념적 대치 뿐만 아니라, 각각의 발언들이 상대에게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향해 인신적 공격까지 서슴치 않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묵시적으로 익명성을 강조하는 넷 상에서 이들 '유저'들에게 일일이 도덕적 관용을 강조하기란 철지난 계몽주의적 논법으로 취급 되었고, "좌파는 이렇다. 우파는 답답하다"라는 식의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만을 모두가 소모적으로 소비하게 이르렀는데요. 물론 여기에만 그쳤다면 별 반 문제가 없겠으나, 1장과 2장에서 보여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사회적 약자'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과해졌고, 이것이 흔한 군중에서 볼 수 있는 언어적 폭력성과 더불어, 사회적 인격 살인까지 빈번히 발생하기에 이릅니다. 그런 연유로 넷 상에서 중도의 퇴출은 물론 반대로 모든 수단을 강구하는 극단에 있는 자들의 콜로세움이 열린 현실이 결국에는 저자의 말하고자 하는 일관된 논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뒤이어 5장에서는 인터넷 악성 발언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공감 지상주의'에 대해서도 논증하고 있습니다만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려하는 것으로 시작된 공감에 대한 인식이 누군가에 대한 비상식적인 공격과 함께, 한 개인의 사회적 매장에 대한 소위 공감 강요로 이어지고 있는 점이 과연 자유주의적 토대의 관용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저자는 되묻기에 이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정치를 따로 거론하지 않더라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시민이 어떻게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멈추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는데요. 이성이 결여된 시민이 초래하는 전반적인 우려에 대해 버틀란드 러셀은 이미 통렬하게 분석한 바가 있습니다. 정치적 건전성을 위해, 또한 시민들 간의 자유롭고 모두의 이익이 되는 제언들은 시민 각자의 명료한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는 이보다 더한 것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일 텐데요. 이것은 우파 포퓰리즘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증명되지도 않은 가짜 뉴스를 남발하면서 이성을 잃은 다수의 시민들을 입맛에 맞게 포획한 최근의 상황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이는 이성의 실종과 더불어 우리가 그토록 수호하고자 했던 자유주의적 관용이 과연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대해 시민 모두가 성찰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마사아키 교수가 거의 일관되게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수에 대한 혐오 발언과 더불어 집단 린치에 이르는 사회적 병리 현상 전반을 꽤 설득적으로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일본 사회가 오래전부터 강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흡사 고착된 관습으로 여겼던 점을 감안해 본다면, 2차 대전 패전 이후 미군에 의해 반강제로 이식된 자유 민주주의가 대다수의 일본인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특정 국가의 지독한 혐오를 책으로 찍어내어, 버젓이 대도시의 대형 서점에 '혐한 섹션'이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는 현상 자체에 일본 사회에 과연 자유주의적 관용과 이웃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기반이 되어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할 따름인데요. 저자 특유의 교묘한 논법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자신이 해석하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여러모로 쉽게 불타오르게 되는 요인들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과거사 문제가 언급되지 않은 점은 꽤 아쉬운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더욱이 재특회와 5CH와 같은 우익들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도 미흡해 보였고, 전반적인 현상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적 자유 경쟁과 시장 경제에 대한 원리 원칙이 사회적 문제의 큰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과연 설명으로 충분한지에 대해서도 큰 의문이 듭니다. 예를 들어, 일전에 읽은 케이트 만의 글처럼 '여성 혐오'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식의 좀 더 설득적인 맥락과 이에 기반한 상세한 분석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터무니 없는 여성 혐오에 대한 사회적 맥락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현재 일본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사회적 병폐는 정말 사례와 그 분석이 충분히 상당할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외적으로 건전gk고 견고한 민주주의 국가이면서 경제적으로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일본이 사실상 극우 정치와 이들을 견제할 만한 효과적인 수단이 전무하고, 이러한 가운데 사회가 점차 관용을 잃고 극단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무엇보다 글에서 역자의 '일왕'이라는 표기는 꽤 의외이기도 했습니다. 여지없이 일본 국왕에 대한 저의 이해는 '일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37년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시작되었고, 1938년 4월에는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었다. 게다가 1940년 10월에는 대정익찬회가 결성되어 중앙에서 말단 조직인 도나리구미(2차 세계 대전 당시에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에 이르는 광대한 국민 통제 체제가 갖추어져간다.

그들은 신자유주의하에서 각자가 자유 경쟁을 벌이면서 자기 책임으로 위험에 대처해나갈 것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일찍이 정치적 행위의 본질이란 ‘친구‘와 ‘적‘을 구별하는 데 있다면서 특히 ‘예외 상황‘을 만났을 때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 모습에서 정치가의 책무를 보려고 했다. 게다가 그것은 대중의 갈채에 힘입어 이루어진다면서 그런 태도를 ‘결단주의‘가고 불렀다.

강자가 되려고 모두가 각축을 벌이는 신자유주의 풍조속에서 자신이 약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진 상황은 기묘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사회의 재분배 기능이 무너지고 분배의 기초 자금이 점점 줄어드는 가운데 제한된 이익을 둘러싸고 ‘약자‘포지션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격화되어왔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 인식에 하나의 틀(프레임)을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상황의 정의를 공유하고, 게다가 특정 가치관, 문제 의식, 변혁 지향 등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사회 운동론에서는 ‘프레이밍‘이라고 부른다.

‘공감‘은 본래 과거 애덤 스미스가 논했듯이 ‘타인의 입장에서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 상상하는 것‘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상상력에 근거해 타인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이해한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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