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성찰하다 - 중산층 붕괴, 포퓰리즘, 내셔널리즘…… 유럽중심주의 몰락 이후의 세계
다니엘 코엔 지음, 김진식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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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코헨은 프랑스에서 존경 받는 경제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는 특이하게도 북아프리카 튀니지 출신으로 프랑스 경제 엘리트들의 요람인 파리 경제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며, 선도적인 정책 연구 기관인 CEPREMAP의 이사를 역임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프랑스 굴지의 언론인 르몽드의 정기적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데요. 그는 주류 경제학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특히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고한 비판자로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도 상당한 인지도를 갖고 있는 지식인인데요. 그가 쓴 수많은 논저들은 현재의 비정상적인 자본주의적 이행과 그에 정치의 실패를 주요 논점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Il Faut Que Les Temps Ont Change"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제가 다니엘 코헨의 이 책을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콜린 크라우치의 최근 논저의 인상 깊은 첫 문장이었습니다. 그것은 "두 개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와 외국인 혐오 민족주의다."와 같은 간결한 고백입니다. 이미 이 글에서도 코헨은 다른 민족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적인 인식을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외국인 혐오는 단순히 극우 포퓰리즘의 위세 속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랫동안 깊이 이들 몸과 마음속에 체화되었다는 저자의 통찰이기도 했습니다. 몇 세기에 걸쳐 유럽에 내려온 유대인들에 대한 터무니 없는 혐오와 멸시를 고려한다면 저자의 평가는 아주 허위인 것은 아닌데요. 또한, 후자의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도, 기업과 노동 조합 간의 대화와 협력을 지속하고 있는 독일을 제외한다면 자유 진영의 대부분 국가들에게서 신자유주의가 지금까지 위력을 떨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자는 이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1980년대 레이건과 대처로 시작된 '보수주의 혁명'으로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 지점의 인식과 관련해, 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서 중대한 의미를 보이고 있는 1968년 5월, 당시 대학생들에 의한 '68혁명'을 끌어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과거 68혁명의 상황이 단순히 프랑스 만으로 국한된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저자의 말대로 라면 "거의 완벽한 복지 국가 시스템을 자랑했다"던 유럽 시민의 상황도 그렇고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복지 수준이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정점에 도달에 있었다"는 평가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봐야겠는데요. 우리의 복지 국가 관념이 최종적으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신자유주의의 혁명은 사회적 진보라는 의미에서 봤을 때, 68혁명의 실패와 맞물려 이어진 보수주의 혁명은 그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저와 같은 일개 시민에게는 사회적 안전망의 박탈은 흡사 앞으로의 삶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을 실제로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좌파가 공허한 외침으로 시민을 거듭 들먹이지만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한 무능"을 드러낸 점이 한 몫을 하게 되는데요. 물론 우파 역시 도덕의 붕괴와 더불어 시민들을 탐욕과 이기심의 벌판으로 몰아내게 됩니다. "탐욕은 좋은 것이다"라는 외침과 더불어, 개인의 이기심을 선선히 종용하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이 실질적으로는 데이빗 코츠의 말대로 힘 있고 돈 있는 자들만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점은 이제는 거의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겁니다.


시민 개개인의 삶은 자율과 안정성에 기반해야만 비로소 온전하게 정치에 눈을 돌려, 최소한의 기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인데요. 그런 연유로 저자가 글 중간에 사회학자 토마스 프랭크를 인용하여 미국 캔자스에서 벌어진 빈자들이 부자들을 위해 투표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과 지난 브렉시트 과정에서 무더기 찬성표를 던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퇴색한 도시 영국 보스턴의 분위기는 단편적으로 우리의 숨길 수 없는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집니다. 이는 레이건 시대 이래로 미국의 노동 조합이 사회적으로 분쇄되어 그 자체로 시민들이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버린 신자유주의적 상황이 초래한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모두의 이익이 되지 못한 것은 자명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모종의 자본주의적 여러 술책들 가운데, 대니얼 벨의 언급대로 "마켓팅과 광고로 되어 있는 쾌락주의적 소비 영역"의 범람은 여전히 시민들에게 평생을 바쳐 일을 해야만 하는 힘겨운 노동자로서의 삶을 강요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 양 체념하게 만드는 '비인간화적인 인식의 주입'은 사회전반에 어두운 분위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합니다. 물론 일부 계층을 제외한다면 말이죠. 

신자유주의와 결탁한 보수주의 혁명의 본질은, 미국에서 만큼은 공화당이 "도덕적 보수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결합"이었다고 저자는 이처럼 분석하고 있는데요. 이 때의 공화당이 경제적 자유주의와 경쟁에 대한 담론에 몰입함으로써 기득권을 추종하는 정당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네오콘 세력 역시, "종교, 민족주의, 경제성장"이라는 슬로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코헨은 이 지점에서 사실상의 보수주의 혁명의 실패가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들의 출현을 초래했다고 인식하고 있는데요. 트럼프를 지지한 3분의 2 가량의 교육 받지 못한 백인들과 기존의 엘리트들과 고학력자들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증오를 키운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던 소위 "자신 알리기"는 그들이 엘리트들과 기득권층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와 맞물려 있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에 전혀 맞는 자를 홧김에 지지하는 것이 정치 발전에 어떠한 영향이 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럼에도 기존의 민주당이나 공화당을 선택한 것이 아닌 정치의 이단아인 트럼프에게 한 표를 던진 것은 미국 정치 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에 있어서도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인들의 칠천만 이나 되는 유권자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으니까요. 여기에는 이들이 그저 어리석은 상태에서 트럼프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트럼프의 심각한 인종차별주의적인 인식과 여성차별적인 문제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것일 텐 데요. 이런 와중에 마이클 샌델이 좌파 엘리트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좌파들이 이들 '소외된 사람들'과 상당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미국 정치를 파탄에 이르게 했으니까 말입니다.

지난 잃어버린 50년의 상황에서 많은 소시민들은 사회가 보장한 안전망 자체를 거의 믿지 않게 되었고 더군다나 이들이 실질적인 수혜자임에도 정부의 소득 재분배에 대해 거의 관심도 없다는 저자의 진술은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부 기득권들과 부유층들이 사회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개조하고 있을 무렵,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가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몰면서 이는 단순히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만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디지털 자본주의의 시작은 제프 베조스와 같은 자를 양산하며, 시민들은 디지털 세상에서의 '인간 정체성 확보'라는 또 다른 힘든 과제를 얻게 되었는데요. 과연 코헨의 의지대로 우리 시민들이 인간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이를 버팀목으로 삼아 다시금 공공선으로 보일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아직은 불확실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유발 하라리의 강조대로 인간이 너무나 자본주의적 도구로서 소비 사회를 이끄는 목적에 충실한 나머지 시스템의 부속품과 다름없는 실정이기도 한 데요. 요즘 정치 무대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정체성 정치'나 계몽주의로 돌아가자는 여러 움직임들 역시 현실의 자본주의적 폐해를 조금이나마 상쇄 시키고자 하는 작은 노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니엘 코헨의 이 글은 마치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가차 없는 현실 인식에 따른 비판적 주장들과 쉽게 연결되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저에게 있어 코헨의 이번 논저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좌파는 시민을 받아들인다는 인식을 주었지만 위기에서 서민을 보호하는 데는 실패했으며, 도덕 회복 정책으로 선출된 우파는 시민들을 탐욕의 재단에 갖다 바쳤다

베버는 자본주의가 신뢰와 계약관계를 구축하고 규칙, 법 책임 ‘윤리‘ 전체를 재조정하면서 탐욕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저성장 시대에는 우선권의 본말이 전도된다, 위기를 접하면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변하면서 자신의 이해로 물러서게 된다

자본주의에 대해 분석하기를, 질서와 포기라는 이상이 지배하는 생산 영역과 매력적인 글래머라는 섹스 이미지를 제공하는 마켓팅과 광고로 되어 있는 쾌락주의적인 소비 영역 사이의 영구적인 긴장이라고 한다

연합국은 독일 국민중에서 진짜 나치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었지만 찾지 못했다. 독일인의 90퍼센트는 가끔씩 마음에서 우러나 나치에 동조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게만 혜택을 주는 경제성장은 허약한 성장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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