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취약성 -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로빈 디앤젤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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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진 디앤젤로는 미국내에서 '백인성'연구로 저명한 학자이자, 인종주의에 대한 백인들의 모호성 및 묵인에 대한 문제를 다룬 '백인의 취약성' 등을 고안한 사회학자입니다. 그녀는 1991년 미국 시애틀 대학에서 역사학 학위를 받은 뒤, 2004년 워싱턴 대학에서 다문화 교육과 관련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게 됩니다. 노동자 계급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 오히려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밝힌 그녀는 현재 워싱턴 대학의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점차 확대되고 있는 다양성 교육과 관련해, 미국의 인종주의가 과거에 비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한편, 그녀는 이러한 연유에 미국 건국 이후부터 백인 남성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백인 계급의 이익이라는 사회적 관념이 제도화되었고 이것의 근본이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쯤에서 보면 역설적이게도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에 대한 세계인의 이미지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모두가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주제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White Fragility"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흔히 미국은 개념적으로 다원화된 국가이며, 이러한 체제를 견고한 민주주의가 뒷받침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뉴스와 그외 여러 논저들로 미국 사회가 심각한 인종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거의 모두가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이 글의 저자는 이러한 인종적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이 현재 다수 백인들에게 있다고 전제하고, 일부 극우주의자들과 인종주의자들 혹은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의해 일반적인 정치 무대 위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로 인해 견고하게 내면화되어 있는 인종주의가 꿈쩍도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현재의 사회가 다수 백인들에게는 특별히 문제가 없다는 인식하에 지금도 인종 문제가 나아지고 있다는 터무니 없는 믿음과 백인은 대부분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하에 그럼에도 자신들은 이미 인종주의를 제도적 차원에서 내면화하고 있는 실정에서 이 인종주의 자체를 자의든 타의든 언급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저자는 '백인의 취약성'으로 해석하는데 글 전반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피터 칼레로의 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흑인들이 직업적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등의 백인들의 흑인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은 상당히 뿌리 깊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는 백인 엘리트들이 규정하고 확대시킨 '백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될 권리'와 관련해, 건국의 아버지들조차도 과거의 타성에 젖어 인종의 차이에 있어서 백인이 더 우월하다는 관념을 내재화시킨 결과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은데요. 그러면서 다수 백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유와 그것을 바탕으로 고도화 되어 심지어 이데올로기화 된 '능력주의'에 있어, 흑인들이 스스로를 교육하지 않고 성공하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이라고 믿고 있는 백인들의 그러한 관념체계는 저자의 언급대로 일종의 '암묵적 편향'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즉, 미국 사회가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상황은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다수 백인들의 가치 체계가 바로 앞선 개인주의와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데요. 뭐 이것을 단순한 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제 자체의 무결점성을 비롯 자신들이 믿고 있는 그 체제 자체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타고난 재능이 없거나 자격이 없거나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진술과 이것이 작동시키는 건 "불평등한 체제로서 인종주의를 감추는 이데올로기로 작용되어 왔다"는 것을 저자 스스로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가진 부로 상위권에 속해 있는 계층의 일원들이 지금의 체제가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인식이고, 백인 다수들이 미국 사회 체제의 일면들이 그렇게 나쁘다는 것이냐로 반문하게 되는 진정한 연유일 겁니다.

과거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노예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벌였던 정치적 로비라든지, "흑인이 마땅히 노예에 처해져야 한다" - 개인적으로 이 문장을 쓰면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삶이 노동에 처해졌다"는 문장이 떠올라 혼자 웃고 말았습니다 - 는 당위를 만들어내기 위해 당시 노예주들이 노력했다는 것은 꽤 유명하기도 한데요. 이처럼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역사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지금에야 여러 매스컴을 통해, 노골적인 인종주의 편견을 가진 백인은 나쁜 백인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흑인들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하며 비웃는 것에 대해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경우처럼 사회학자인 저자가 논하고 있는대로 다수의 백인들은 인종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즉, 저자의 의견대로 백인이 흑인과 같은 유색인들의 입장에서 미국 사회가 만들어내고 있는 인종적 편견을 포착하고 그것이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백인들 스스로 인정하고 개선시켜 나가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바로 이 부분에 있어 '백인의 취약성'이라는 사회적 언어가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 글 초입에서 이미 "우리에게 편향이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그런 편향을 검증하거나 바로 잡지 않게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다수의 흑인들이 있는 장소나 거리에 갈때 백인들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고 합니다. 이것은 학교-교도소라는 파이프라인을 타고 상대적으로 더 많이 수감되어 있는 흑인사회의 현실, 자신이 멕시코계 라티노일 경우 백인에 비해 더 많은 형량을 받게 되는 현재의 미국 사법 시스템의 문제로 봤을 때, 이러한 암묵적 편향은 미국 사회에 지대하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물론 어처구니 없는 "백인은 인종주의적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대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순진한 백인'이라는 논법으로 이 인종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과거에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은 누구보다 인종주의적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과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겠는데요. 다른 인종에 비해 확연한 교육의 기회와 고용의 인센티브 더불어 사회 진출의 우위라는 측면에서 백인들이 누리고 있는 권리는 매우 지대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에야 이런 현실에 눈을 감고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티파티'들이 있기도 합니다만 저자의 강조대로 미국 사회 체제 전반이 제도적으로 인종주의적 편견을 강화시켜왔고, 진지하고 현명한 백인은 이 인종 문제를 결코 입밖으로 내뱉지 않는다는 일종의 금언이 현재 대부분의 백인들이 내면화시킨 상황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청담동과 대치동에 사는 사람들이 서울의 부동산 문제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제도화된 권리를 누리고 있는 자들이 반대편에 있는 상황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꺼내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자신은 그런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정색하며 언급하는 것이현재 일개 시민으로서의 백인들의 기본적인 관념 체계라 보여집니다.

끝으로 이 책은 사회학적인 논증과 더불어 르포르타주와 같은 여러 사례들이 뒷받침되어 있는 꽤 견실한 글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현재 미국의 개인주의적이고 능력주의적인 맹신 혹은 이데올로기화가 사회적으로 내면화되어 있어 이 인종주의 문제 조차도 개인적 문제로 축소시킬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다수 시민의 평등과 안녕을 강조하는 정치 이념으로서 세계 민주주의의 제일 국가라고 여겨지는 미국이 '백인 우월주의 국가'로 그려지는 것은 실로 미국에 각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일개 한국인으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저 역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절대선에 근접한 것이라고 세뇌를 받았기에 내심 관련 서적들을 접했으면서도 실제 미국 사회를 겪어본 것이 아니기에 그저 긴가민가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근래 미국 사회의 단면이 꽤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들에게 아주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 조차 제대로 보장할 수 없는 미국의 현실은 실로 씁쓸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엉뚱한 소리겠지만 한편으론 이래서 미국인들이 평등을 좋아하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국제 사회에 미국이 부르짖는 인권의 개념은 지금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주의와 관련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닌가 글 말미에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개인주의는 개개인의 성공을 막는 근본적인 장애물 따위는 없으며 실패는 사회 구조의 결과가 아니라 개성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백인은 우리의 인종 프레임에 관해 숙고하기를 유독 힘들어하는데, 인종적 관점을 갖는 것은 곧 편향되는 것이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믿음은 우리의 편향을 보호할 뿐인데, 우리에게 편향이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결국 그런 편향을 검증하거나 바로 잡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지배 계급은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국 가난한 백인 노동 계급에 완전한 백인 지위를 부여했다. 가난한 백인이 자신들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갖게 되면 더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 덜 집중할 터였기 때문이다

불평등한 체제로서의 인종주의를 감추는 이데올로기들은 아마도 가장 강력한 인종적 구속력일 텐데, 일단 인종 위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나면 설령 우리에게 불리하다 해도 자연스럽 의심하기 어려운 처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인성을 백인이라는 존재의 모든 측면 - 단순한 신체적 차이를 넘어 사회에서 백인으로 규정된다는 것의 의미와 그에 따른 물질적 이첨과 관련이 있는 측면들 - 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백인 인종 프레임의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백인이 문화와 성취의 면에서 우월한 존재로, 유색인이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성과의 면에서 제대로 백인보다 떨어지는 존재로 여겨진다. 또 국가를 운영하는 능력에서 유색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진다

흑인을 범죄와 연관짓는 백인의 굳은 확신은 현실을 왜곡하고 역사상 흑인과 백인 사이에 존재해온 위협의 실제 방향을 뒤집는다

그렇더라도 나는 인종주의에 기반하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종주의의 구속력에 영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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