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교양 이론 (양장) - 지식사회의 오류들
콘라트 파울 리스만 지음, 라영균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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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빌라흐 출신의 콘라드 폴 리스만은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로 그는 모교인 비엔나 대학에서 오랫동안 윤리철학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철학 심포지엄인 '필로소피쿰 레흐'의 학술 책임자를 맡았고 오스트리아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역사가인 프리드리히 히어의 연구 재단의 책임자라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그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비엔나 대학의 철학과 교육 과학의 연구 책임자로 재직하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동 대학의 교육 과학 학부의 부학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는데요.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방송의 토론 패널로도 참여해 대중에게도 얼굴을 알린 지식인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대중 매체들을 통해 자신의 모국과 유럽 전반의 인문학 쇠퇴에 대해 수차례 경고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전통을 갖고 있는 유럽 대학의 소위 '미국화'에 대해 그는 날선 비판을 해왔으며, 대학이 시민의 교육 문제에 등한시하고 연구비를 위한 기업들의 연구소화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우려깊게 바라보고 있는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전세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인문학 쇠퇴에 대해선 모두가 할말이 많겠지만 그는 이 글을 통해 가장 큰 주범으로 '신자유주의'를 꼽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된 문제는 다음에 이어지는 글을 통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orie Der Unbildung"으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앞서, 살짝 언급했듯이 리스만은 이 글을 통해, 근래들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지식 정보 사회'의 진면목과 그에 따른 허상과 각 국가들의 중요한 교육을 책임져야만 하는 대학들이 어떻게 자본과 신자유주의에 의해 변질되어 왔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소위 지식 사회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문법인지에 대해 저자는 매우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진정한 지식을 위한 학문적 토대를 찾아 볼 수 없는 작금의 유럽 현실에 대해, 역자의 해석이긴 하지만 '몰교양'이라는 단어로 빗대어, "정신의 실종 혹은 정신의 부정"으로 마찬가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글의 3장에서는, 사실상 교양을 갖춘 시민 계급은 현재로선 사라졌다고 봐야 하며, 노골적인 자본의 재창출과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마치 적법한 공장의 노동자를 찍어내는 것과 오늘날의 허망한 지식 사회와도 맞닿아 있다고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진정한 지식의 실종을 인문학의 부활로 해결해야 한다는 예측할만한 주장을 저자는 펼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진정한 지식의 추구 혹은 학문의 연구라는 것이 일차적으로는 개인의 끊임없는 성찰과 진지한 태도가 결여된 상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 오늘날의 범람하고 있는 수많은 오락 거리들과 시민들이 습득된 지식으로 사회를 통찰하고 분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체제 지배적인 반대가 뒤를 따랐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가 밝히고 있는 이와 같은 '지식의 쇠퇴'에 신자유주의가 배경이 되었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여기서 굳이 자본주의적 효율성을 부각시키고 싶진 않지만, 자본과 기업의 논리에 의해 사회와 시민들이 지배당해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어떤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문장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에 대한 본질은 거의 오십보백보 일텐데요. 유럽이 지난 역사에서 인간을 해방시켰던 계몽주의를 꽃피우기도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지독한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이 글 7장에서 논하는 바와 같이 "계몽 절대주의는 과학 지식의 혜택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었지만 국민을 이 지식의 중심과 그 과정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국민으로부터 지식을 소외시켰다는 음모론으로 국한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본주의 체제가 분명 각자의 시민들이 자본주의에에 성공적으로 부역하고 심지어 내면화하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에서 '진정한 지식'을 이들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은 분명합니다. 체제에 지속적으로 순응하고 반항하지 않는 국민들을 길러내는 것이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적 체제 안정에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저자의 여러 나레이션 중에 지식의 진정한 쓰임새와 관련된 '세계에 대한 통찰 Durchdringung der Welt"에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7장에서 이어지는 대학 내지는 사회가 마땅히 길러내야 하는 엘리트들에 대한 교육과 반대로 소외되어가고 있는 일반 시민들에 대한 리스만의 분석은 바로 언급한 이 세계에 대한 통찰이 어떻게 무력화 되고 있는 보여주는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사회를 움직이고 발전시키는 지식들을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엘리트들에 집중시키고 다수의 시민들에게는 그저 일자리를 위한 교육만을 시키는 차별적인 행태가 과연 평범한 다른 사람들의 '진정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지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전반적인 이러한 결과물이 의도하지 않은 형태로서, 우연하게 도출된 우민화(愚民化)인지 아니면 "세상을 통찰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자각한 시민들에 대한 우려스러운 시선"인지는 여기선 불명확하다는 식으로 갈음하겠습니다. 결국 앞선 의심을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지식 사회라는 문법과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탄생한 인터넷 망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너저분한 지식들'이 진리인 마냥 넘쳐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 생각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저자는 진지하게 구현되지 않은 지식 산업이라는 미명이 산업사회 개념을 잠정적으로 해체하거나 대체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요. 무엇보다 구조적으로 이러한 지식 발전 매키니즘이나 디지털 혁명이 산업화 시대 생산양식의 근본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소모적인 지식 범람이 사회에서 어떠한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오류라고 볼 수 있고 설사 진정한 지식 산업 내지는 지식 정보 사회가 완벽하게 구현된다 하더라도 기존의 전통적인 산업 규모로서의 생산 자체를 완전하게 대체할 수 없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애초에 자본가들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사회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계층들의 이 '지식' 함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매우 다른 단어이고, 그러한 구분이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은폐되어 있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지식만을 '정당한 지식'이라고 규정하고 그 외의 다른 학문과 지식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저자는 이 부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단순히 '인문학의 부활'로는 현실을 타파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교육 받는 시민을 길러내는 현재 대학의 위기, 특히 유럽 대학의 거대한 자본주의화로 판단할 수 있는 '볼로냐 프로그램'에 저자가 대학 관계자로서 이를 비판하고 있는 것도 설득력을 갖고 있습니다. 연구 성과급 체계의 유럽 대학의 미국식 프로그램인 이 볼로냐 프로그램은 소위 인문학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의 여러 저명한 대학들을 위기에 몰아넣었고 미국 대학 시스템과는 다른 전통적이고 학문지향적인 유럽의 대학 토대를 뒤흔든 사건으로도 유명한데요. 자본과 기업이 대학에 일일이 스며들어 그들이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 봉사'를 돈을 통해 요구하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학문 연구라는 대학들의 고유한 영역을 연구비라는 명목으로 줄을 세우는 것은 사실상 건강한 사회 체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쯤에서 우리 시민들이 이러한 노골적인 자본주의화가 주입된 대학 교육을 원했느냐고 질문을 던져 본다면 차마 입으로는 말을 못할수도 있겠지만 속으로는 대부분 아니라고 답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연구비에 따른 대학의 서열화가 그것에 완전히 소외된 인문학의 현실이 바로 저자가 답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지식 사회 그리고 대학의 서열화 및 비즈니스 계열을 제외한 다른 순수 학문들의 소외가 결국 현재 우리가 맞이한 학문의 위기로 점철되어 왔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시민들의 효율적인 소비와 공정한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사회체제에 이러한 논리를 주입시켜 왔습니다. 경제학과 사회학을 분리해야 하는 것이냐, 아니냐에 각자 논박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을테지만 여기서 분명한 점은 경제 전반이 자신들의 주장에 반론을 세우는 것을 탐탁치 않아 했고, 그들 스스로 고립된 전문주의로 말미암아 정작 필요한 사회와의 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 단순히 지식 사회 물음에서 뿐만 아니라 '지식은 긴밀히 소통해야 한다'는 저 자본주의자들과 그를 신봉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낱낱이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한데요.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사회가 일정한 수의 엘리트들을 배출해야 한다는 저자의 함의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다만, 소수의 지식을 처리하는 데 있어 엘리트가 유리하다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으며, 역사적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내각의 비엘리트 관료들이 순조롭게 대공황을 이겨낸 것으로 보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기회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재조정과 시민 교육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망각하지 않고 말장난에 불과한 '지식 사회' 놀음을 냉정하게 중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가 이 글을 통해 이와 같은 '몰교양'이라는 시대적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만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책임이 없는 것에도 무조건 '너희들의 책임'이라는 익히 알만한 사람들의 주장을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저자들의 터무니 없는 말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진정으로 '세계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모두가 이에 동의하시겠죠.


-자리를 빌어 알라딘에 대해 쓴소리를 해야겠는데요. 저는 얼마전에 이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계산을 하고 유유히 집에 와서 확인을 해보니, 또 앞장에 "증정 한울"이라는 사각형 형태의 도장이 찍혀 있네요. 아니 대체, 증정품을 왜 매입해서 저와 같은 애꿎은 독자에게 되파는 겁니까? 검수 좀 제대로 할 수 없는 건가요. 물론 구입시 확인을 제대로 안한 일차적 책임이 저에게도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몰교양‘이란 단순히 지식이 없는 무식함이나 특정한 형태의 반문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철저하게 교양 이념과 분리해놓고 대하는 것을 말한다

아도르노는 한때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 진정한 교양이 무엇인지 논증해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읽고 지식을 쌓는 것만이 아니라 데카르트 학파의 철학과 그 철학의 체계적,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지식을 ‘소환‘할 수 있는지 알고 있더하도 그것은 늘 피상적으로만 아는 사전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지식사회가 모든 인식의 목표에, 진리 혹은 적어도 그와 연관된 분별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지식사회의 역설이다

지식이 쓸모가 있는지는 결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처한 상황의 문제이다

빌헬름 폰 훔볼트의 말처럼 인문학은 공부하는 사람의 ‘고독과 자유 Einsamkeit und Freiheit‘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전혀 다른 원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지식의 산업화를 이제는 사회의 마지막 피난처로 파악한 보편적인 과정을 따르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지식 엘리트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제외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또 있는데 사람들을 노동과정에 적합하게 만들고 오락산업에나 어울리는 정서를 갖게 하는 부질없는 ‘단편 지식 Stickwerkwissen‘이 바로 그것이다

‘궁극적인 목적의 관점에서 보면‘인식하는 인간의 사유는 항상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인간 정신의 노력‘이며 인간의 행동은 ‘자기 안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려는‘의지의 노력이다

기업 친화적인 대학들이 우후죽순처럼 확산되는 현상을 보면 한때 대학다움을 갖추고 있던 기관들이 이제는 모두 허울만 대학 이름을 걸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계몽 절대주의는 과학 지식의 혜택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었지만 국민을 이 지식의 중심과 그 과정에서 멀어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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