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즘의 문화
노암 촘스키 지음, 홍건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얼마전에 작고한 하워드 진과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살아있는 양심으로 일컬어지는 노엄 촘스키는 스스로 열렬한 민주주의자이자 사회 비평과 및 정치 운동가로 본업인 인지 과학과 언어학 분야와 비견될 정도로 폭넓은 명성을 얻은 지식인입니다. 저는 다행히도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촘스키를 보며, 지그문트 바우만도 지금 생존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만큼 노엄 촘스키는 이 세계와 인류를 위해 더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촘스키의 간단한 약력은 쓰지 않을까 하는데요.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제국 미국'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제가 자주 인용하기도 했습니다만 기간은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지만, CIA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은 지식인으로서 현재의 미국 기득권층과 엘리트 지배 세력들이 그를 얼마나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혹자들은 흔히 노엄 촘스키를 가리켜 '사회주의자'라고 애써 폄하하려고 드는데요. 이것은 그의 글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자들의 폄훼이고, 그는 네오콘이나 보수 우파, 티파티 누구보다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그 확대를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세계 다수의 진보 좌파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한 부분인데요. 냉전 이후 자유 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를 삭제하고 싶은 엘리트 세력과 기득권 지배층들의 노골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이나 일삼는 것에 비하면, 그의 양심은 최소한 대다수 시민을 향해 있다 봐도 분명해 보입니다. 하여튼 이 정도에서 그에 대한 소개는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이 글은 원제, "Culture of Terrorism"으로 지난 198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2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이 책은 절판이 되어 국내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데요. 판권의 문제이든 에이전시의 문제이든 간에 잘 해결되어 모쪼록 재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원제와 거의 동일한 의미인 이 글의 국역 제목과 관련해, 많은 독자분들은 이것을 어떻게 미국과 연관시킬 수 있는지 의아해 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어쩌면 제목으로 인해 9.11 테러를 연상시키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 책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건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추악한 "이란-콘트라 사건"입니다. 리처드 닉슨의 불명예스런 퇴진과 마찬가지로 레이건을 백악관에서 쫓겨나가게 할 뻔한 이 최악의 스캔들은 레이건의 사망 이후,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 분위기와 그것을 주도하는 정치가들 및 일부 지식인들의 의해 조직적으로 묻혀졌던 감이 있습니다. 많은 이론가들이나 시민들은 한 정치인의 공과 과를 되도록이면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것에 대해 제가 따로 판단을 할 필요는 없겠으나, 이 사건은 명백히 당시 레이건 행정부의 과(過)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많은 공화당 지지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이 이란-콘트라 사건을 평가하거나 파헤치는 지식인이나 시민들을 '사회주의자'로 매도해 왔는데요. 바로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그에 따른 비판을 촘스키의 장점인 '사건을 밑바닥까지 파헤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입증해 내고 있는데요. 저는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 이 글을 별 다섯개로 평가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현존하는 이란-콘트라 사건의 아주 명확한 분석이자, 깊이 있는 일종의 '논문적 르포르타주'로서, 그 가치가 지대하고 둘째로는 엘리트 지배 체제를 더욱 강고히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존하려 하는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정책이 어떻게 미국 외교와 국제 정치의 본질이 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어 어떤 국제 정치학자들의 논저들보다 매우 '현실적'이라는 점을 높이 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레이건 행정부 시절의 정치 스캔들인 이란-콘트라 사건은 1979년, 중남미 니카라과에서 민중혁명에 의해 무너진 우익 독재 정권인 소모사 정부 사태와 관련해 미국 정부가 벌인 불법적인(국제 협약 파기, 의회 정치를 무력화 시키고, 불법 송금과 주권국의 주권 침해 등) 지원이 주가 되었던 왜곡된 밀실 정치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뒤이어 살펴보겠지만 이 사건은 자신의 앞마당에서 초래되는 사회주의 혁명의 공포에 대한 미국 정부의 니카라과 개입으로 대변할 수 있을텐데요. 물론 이것은 그동안 대내외에 알려진 매우 명목적인 입장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저자인 촘스키는 1장부터 3장까지, 미국이 스스로 '자유 민주주의 국가'임을 내세우면서도 CIA에 의한 조작 개입과 용병들을 통해 진행된 타국에 대한 무력 진입 및 그러한 불법적인 논리가 바로 '미국 외교 정책'의 본질임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워드 진이 일찍부터 인정한 부분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것인데요. 즉,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경찰 국가라는 하워드 진의 인식 말입니다. 그리고 촘스키는 이를 넘어 더 중요한 통찰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수도 없이 강조하고 부르짖는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가 초등학생이라도 알만한 시민들에 대한 의무, 민주적 절차, 공개되어야 하는 정책적 행위 등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 그리고 '자신의 앞마당은 오로지 자신들의 것'이라는 이 이데올로기를 누구 눈치도 볼 것 없이 자행했던 미국 정부의 어두운 일면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기주의를 명백하게 옹호하고 있는 미국 내의 저 보수주의자들이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는 촘스키의 비판과 함께, "비밀기록과 공식문건에서 드러나듯이, 미국 정부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미국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요구할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일련의 공세적 함의들이 미국 외교와 그 권력의 숨겨진 본질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데올로기는 분명한 선한 가치들로 위장되어 있기 마련이다"는 버틀란드 러셀의 언급과 유사하게도 미국의 대외 정책은 저 자유 민주주의라는 미사여구로 그동안 점철되어 왔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유 민주주의로 자신들의 노골적인 이익과 더불어 사적 기업들의 경제적 이익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과 관련된 촘스키의 주제 의식은 미국은 이란-콘트라 사건을 포함해, 자신들의 국익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공세적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식의 엘리트주의적인 테러리즘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언론과 여러 글들을 통해, 이란-콘트라 사건의 주역으로 알려진 올리버 노스는 겉으로 알려진 바와 다르게, 촘스키의 이 글에서는 그조차 허수아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배후가 백악관과 CIA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이 상당합니다. 당시 니카라과의 우익 반군인 콘트라가 벌인 추악한 군사작전인 '무고한 농민을 비롯한 민간인 학살'이 백악관에서 검증된 군사적 성과라고 자화자찬하는 관료들의 언행들을 낱낱이 살펴볼 수가 있는데요. 그 주역들이 스스로 자화자찬한 이면에는 전례에 따른 선입견과 그리고 여러 사건들로 인해 미국 정부 혹은 관료들이 "공산주의자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일관된 논리이기도 했는데요. 물론 저 노련한 정책 당국자들이 다수의 가난하고 억압받던 하위 계층의 소위 민주적 열망이 '폭발적인 공산주의 혁명의 불씨'로 전개 될 수 있다고 확신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소련의 사주를 받는 저 민중들을 전부 제거하고, 종래대로 미국의 말을 잘 듣는 보수 우익들을 다시 정권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인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최근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나왔던 "과연 미국이 가만히 있겠느냐"와 묘하게 오버랩 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냉전의 시기가 매우 비상한 때였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최근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강제된 민주주의적 이식이 여러 계층과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다양한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 그처럼 강조하는 이 민주주의가 이제야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초보 민주 국가' 들에게 미국의 정책(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간에)이 유독 그들에게 가혹했다는 것은 촘스키도 역시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국익에 거슬린다고 해서 초보 민주 국가가 아닌 꽤 견고하고 뿌리 내린 기성의 민주주의 국가를 CIA의 작전으로 무너뜨린 사례가 있는지는 저로서도 확실하지 않은데요. 오히려 한국과 대만과 같은 권위주의 독재 정권을 옹호하고 지원함으로써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 합치된다는 식으로 자위했던 최근까지의 독트린(?) 역사가 존재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미국으로 기억되고 지금까지도 미국에 대한 보은의 필요성을 느끼는 한국인들이 많습니다만, 여기에 베트남전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레이건과 지미 카터, 그 이전의 케네디 정부를 되새김질 해봐도 우리의 사정과는 다르게 이 아름다운 미국이 얼마나 불법적으로 군을 투입하고 작전을 펼쳤는지, 이것은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촘스키의 이 글이 단순히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한 추악한 본질을 드러내는 것으로 국한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라이트 밀스가 언급한대로, "엘리트 지배 계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시민들에 의한 정치, 민주적 절차와 합법성 그리고 권력간의 균형과 이를 통해 실현시킬 수 있는 시민 다수의 권리가 경우에 따라 전부 무력화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게 됩니다. 현재 미국은 이러한 노골적인 현실에 있는 것이 거의 명백해 보이는데요. 저들이 진정으로 과두제를 열고 싶어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이러한 맥락 가운데 그동안의 신자유주의적 이행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그러한 정치적 결과의 실현 가능성을 더욱 가깝게 만든 것도 거의 확실합니다. 이에 촘스키는 "미국인들에 대한 신자유주의화는 이미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시민의 권리를 축소하는 지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거의 야합과 가까운 결합'이 미국의 지배 계층이 바라는 이익과 합치되는 과정이었고 자본의 광범위한 이익과 관련된 민주주의의 제한과 축소 필요성은 실질적으로 증명된 논저들이 수를 셀수 없을 만큼 많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힘의 투사 내지는 소위 '은밀한 작전'과 보수 독재 혁명을 지원하는 행태의 이린-콘트라 사건 그리고 따로 언급되고 있는 과테말라의 경우와도 미국의 그같은 개입이 바라는 목적이 앞선 진술들을 통해 분명하고 입증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미국의 정치적 본질을 가감없이 다루면서 통찰하고 있는 것이 이 글의 8장이라고 생각됩니다. "대개 정치신학 용어들이 그렇듯이 '민주주의'란 말이 지는 두 가지 의미, 즉 그것의 사전적 의미와 교리를 주입시킬 목적으로 고안된 기술적 의미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언급은 "미국의 경우. 이 '민주주의'는 미국 투자자들의 이익에 부응하는 부류의 사람들의 정치체제를 지배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는 것을 뜻한다"고 촘스키는 강조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정치 및 이데올로기 체제가 경제의 통제 아래 있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성취되었다"고 마찬가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논지가 이 글의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요. 미국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매커니즘으로 국가가 돌아가고 있었고, 이것에 대한 반론은 특히 대외적인 측면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의 군사적 지출과 군비 증강을 전혀 반대하지 않는 이유일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더 바라고 있기까지 하지요.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왜곡으로 점절된 정치적 이데올로기 상황에서 언론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13장에서 이 '지유 언론'에 대한 본질을 동일선상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 자유 언론들이 이미 본질적으로 권력에 포획된 상황으로 심지어 '보수주의'가 아닌 '겉으로만 보수주의 행세'를 하고 있는 정치 세력들을 위해 매진하고 있는 실정이며, 어느새부턴가 언론들이 민주주의를 입에 담는 것을 기피하고 있다고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들 자유 언론들, 역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라 자본에 종속된 경우도 많고, 강고한 이익론에 입각해 주주의 이익에 헌신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민주적 수호의 대의적 명분 마저 종속되어 버린 상황입니다. 이를테면, 언론인들 사이에 "개인의 이익과 대의를 균형있게 갖춘다"는 완벽하게 자위하는 명분 같은 것들 말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맥락은, 앞선 이란-콘트라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데 있어 동원되기도 하였는데요. 의회의 청문회 조차도 당시 공화당 의원들에 의해 백악관을 보호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노력했고, 일부의 탐사 보도 언론인들을 제외하면 다수의 언론들이 본질적으로 핵심을 파고들어 비판을 가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정부의 앞잡이나 되었던 자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아닌 일개 니카라과인들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중요하냐는 저변의 논법들은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끝으로, 촘스키는 국제 협력 시대의 중요한 협정인 '파리 협정'을 제시하면서 미국이 이를 어떻게 무시했으며, 국제 합의를 얼마나 휴지 조각처럼 여겼는지를 거의 2장 분량의 글을 통해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는 그만큼의 힘과 군사력을 갖고 있는 패권 국가가 효율적으로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그 힘을 투사하고 싶은 욕구가 분명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괴벨스와 같은 경우처럼 국민을 프로파간다의 노예로 만들어 민주주의와는 다른 체제를 이중 삼중으로 구축하는 것도 물론 현시대에서 허무맹랑한 소리도 아닙니다. 하지만 시민의 존재 가치와 이들의 단합된 응집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도 실상은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직은 많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다만, 네트워크 시대에 시민들의 요구와는 매우 상반되게 흘러가는 정ㅊ적 분위기와 노골적인 이데올로기 기구라고 할 수 있는 정보 기구들이 안보 구축이라는 미명하에 민주주의를 무력화 시킬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은 작금의 시대는 어쩌면 우리에게 시급하게 중요한 분기점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있어서 많은 기업들이 하나도 어떠한 의견을 내비치지 않았다"는 로버트 커트너의 언급은 이처럼 중요하다 볼 수 있습니다. 기업들의 지배적인 이익이 민주주의의 강화된 시기에서는 실효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촘스키도 아직은 권력이 시민들을 두랴워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우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국가의 권력에 대한 그릇된 욕망을 견제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우리, 시민이라는 것은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다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훗날 혹은 가까운 미래에 촘스키 일독을 시작하게 될 수 있는 여러 독서인들은 제일 먼저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권유 드려봅니다.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이처럼 얄팍한 서평으로 대체하는 것에 대해 적지 않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미국의 요구에 고분고분한 권위주의 독재 정부와 자신들의 생존과 독립성, 고유한 주권을 위해 노력하는 민주적 정부, 이 양자에 대한 명확한 미국의 정치적 태도가 이란-콘트라 사건을 일으킨 진정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가 아닌 보수주의자들의 전반적인 대결 구도를 인식한다면, 저 보수주의가 아닌 보수주의자들이 자유주의의 인식적 범주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대외 정책, 경제, 국내 정치 등에 있어서 쓸모없는 맹탕이기 때문에, 이를 대체적으로 경멸합니다. 이들은 여기에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경멸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저들의 기본 인식 구조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 보수주의가 아닌 보수주의자들은 일종의 테크노크라트이자 신자유주의자들 그리고 기득권주의자들이 혼합된 형태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이것은 꽤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세탁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본질을 시민들이 놓치고 있으니 특히 신자유주의적 담론의 확대와 그 이행에 따라 이러한 왜곡이 더욱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처하기 위해 계속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설득해야 하는데, 정치적 해결은 미국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며 적의 배신에 의해 무산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이 바로 그런 설득의 근거가 된다

미국은 "중앙아메리카의 다원주의적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특히 1980년대에, 이 지역에서 다원주의적 민주주의가 싹틀 수 있는 가능성을 말살하는 데 골몰했다

자신에 대한 자의적인 무지의 교리는 그 뿌리가 워낙 깊어, 지난 10개월 동안 최대관심사였던 새로운 이야기들은 레이건 행정부가 극적인 전환을 약속한 날부터 즉각 그 효력을 잃어버렸다

레이건 정부 아래서 엘살바도르에서의 사망자 수는 5만 명을 넘었고, 과테말라에서는 근 10만명에 달했다

1982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인해 발생한 2만이 넘는 사망자 (대부분 시민이었던)를 보탤 수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보수주의"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동적인 징고이즘‘, 혹은 그보다 더 심한 용어로 불러야 적당하다. 미국 정치계 내에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거의 없다

미국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화되면서 국내에서의 위대한 사회 건설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케네디의 "신자유주의적"후예들은 깨닫게 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의 광범한 지지 아래 적색공포 작전은 노동운동과 정치적 반대를 무력화시키고 기업의 힘을 강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의 ‘선량한 의도‘에 대한 신념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다른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 지역에 대한 미국 개입의 역사기록에도 불구하고 손상받는 일이 없다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동안 영국의 힘을 이용해 영국의 전통적인 세력권을 넘겨받고 있을 때, 영국의 외무성 관리들은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가면을 꿰뚫어 보았다

오늘날 마오이즘과 현대 신지유주의, 신보수주의의 기묘한 결합 내에서는 자연스런 일이다

즉 미국은 국제법, 국제사법재판소, 국제연합, 혹은 그 밖의 다른 국제기구와 같은 온갖 허섭스레기와는 상관없는 무법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이고, 또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콘트라의 우두머리 아돌프 카렐로를 "CIA의 충성스런 병사이자 인질로서, 장점이라곤 코카콜라 판매원이었다는 것밖에 없는 인물"로 묘사한다

나아가, 온갖 비밀계획에 관한 문서기록과 함께 공식적인 해설 역시 잘 설명해주듯이, 현실세계는 과거의 방식을 따르는 편이나. 그래서 미국이 행해온 개입의 진상이 밝혀진다고 했을 때 그것이 미국 사회 내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예측 가능하다. 미국의 식자층은, 그들이 존중받기를 원하는 한, 그러한 사실들을 제대로 알게 되는 일은 없다

공식적인 견해에 따르면, 국내적으로는 온갖 술수를 다 부리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의 투기사업에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니카라과는 히틀러식의 국가이다

하지만 그(올리버 노스)가 민주주의에 대한 심한 경멸을 아주 분명히 드러내 보여준 의회증언 이전이라도 하더라도, 그가 민주주의 - 니카라과의 민주주의든 미국의 민주주의든 - 에 대해 염려했으며, 그가 민주주의란 말의 의미에 대해 알고 있다는 증거라든가, 혹은 콘트라 지도부나 미국 정부가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혹은 가진적이 있다는 증거가 도대체 있기라도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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