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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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미국 민중사와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깨어있는 양심'이었던 하워드 진은 전세계에서 정말 보기 드문 행동주의적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애틀란타에 있는 흑인 여자 대학 스팰먼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학교 당국에 의해 해고를 당하기 전까지 미국 진보주의 운동과 반전운동에 있어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는데요. 이후 보스턴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국 사회의 본질과 '병영 국가'로서의 미국을 파헤치는데 온 힘을 다해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2010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시민 운동과 시민의 권리에 영감을 안겨줬던 그를 후에 노엄 촘스키는 실로 애석하게 여겼는데요. 사실 그동안 촘스키의 저작을 통해 하워드 진의 존재를 익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저의 게으름으로 인해 이제서야 그의 저작 하나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이미 위키백과나 수많은 기사 자료들을 통해 하워드 진의 정력적인 활동과 살아온 자취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정말로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몸소 체험한 진정한 지식인인 하워드 진에 대해 실로 겸허한 마음이 드는 건 아마도 그의 이력을 접하게 되는 많은 분들도 똑같은 마음이리라 생각됩니다. 더불어 하워드 진의 진실된 이야기를 끄집어 낸 언론인인 데이비드 바사미언은 이미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사이드를 통해 대가들과의 대담을 훌륭하게 이끌어낸 바가 있습니다. 특히, 그는 국내에 번역된 촘스키와의 여러 대담집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그리고 강주헌 선생의 번역 또한 크게 나무랄데가 없어서 읽는 내내 편한 마음으로 글을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번역가의 큰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책은, 원제 "Conversations on History and Politics"로 지난 200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8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책은 고유한 주제를 담은 총 8장의 구성으로 하워드 진이 알생에 걸쳐 천착한 학문적 양심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제가 국내에 번역된 하워드 진의 글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이 책은 그의 사상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글이리 여겨졌습니다. 특히,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 의식은 현재 미국은 거대한 군국주의적인 체제에 제국주의적 이해 관계를 몸소 달성하고 있는 국가로서, 이 외형적인 민주주의적 국가가 어떻게 지난 세기 동안 병영 국가화가 되었는지에 대해 하워드 진과 데이비드 바시미언의 대담을 통해 밝혀 나가고, 그 와중에 미국에서 일어났던 흑인에 대한 권리 운동과 시민들의 불복종 운동 및 반전 운동에 대한 하워드 진의 과거 행적들을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제 임의로 정해본 1장과 2장에서 논의되는 주제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도 한데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분석하고 그에 따른 첨예하게 불평등한 사회속에서 지배 계급의 논리가 어떻게 일반 시민들의 관념에 침투하고 이를 통해 어떻게 그들의 논리가 재생산 되는지를 논하고 있는데요. 전반적으로 미국이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정부가 매우 성공적으로 기업과 결탁하고 그러한 자본주의 하에서 어떻게 '자유 시장 free market' 이데올로기로 진화되어 왔는지를 독자들에게 낱낱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은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화신'이라 자임하면서도 소위 국익을 위해 다른 권위주의 국가와 독재 체제의 버팀목이 되기도 하였는데요. 이것은 CIA와 군이 일원화 된 체계로 각지의 전쟁에서 노력한 결과로 이 글에 등장하는 해병대 출신의 인물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진은 미국을 소위 '군국주의 국가' 내지는 '병영 국가'라고 지칭하고 있었는데요. 좀 더 엄밀히 분석한다면, 막강한 산업정치적 권력을 지닌 '방산 업체'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자본주의적 체제가 국가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변형된 이 '방산 자본주의'가 엘리트 정치 전반을 관장하고 이런 결합이 저들의 노골적인 이해관계에 포섭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바로 여기에 시민의 정치는 실종되었다는 것이 하워드 진의 일관된 논점이었습니다. 즉, 루소를 발언을 통해 지금의 미국 사회를 인용하고 있는 하워드 진은, "가까운 미래에 공고히 할 전문가 계층의 정치에 따라 시민들은 사라질 것이다"라고 규정될 만큼 이 해석상의 관계가 크게 어긋난 부분이 없어 보였습니다. 따라서 이렇듯 체제의 변화를 일종의 '국가주의화'로 그는 바라보고 있었는데요. 사실 사회학에서의 사회진화론자들이 그토록 혐오스럽게 여겼던 '국가주의'와 하워드 진이 인식하고 있는 '국가주의'는 사뭇 다른 내용이기도 합니다. 특히,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는 '병영 국가로서의 국가주의'는 앞선 부분과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장과 2장, 뒤이어 논의되는 3장과 4장에서도 이런 미국의 국가주의가 시민들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사실상 제한시키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함께 엘리트 지배 계층의 또다른 이해관계(자신들이 속한 기업의 이익 뿐만 아니라 국방비와 방산 업체의 이해 관계에 따른 다른 이익)에 봉사해 전쟁을 거부할 시민의 권리조차도 국가의 명령에 시민들이 승복하게 되는 악순환을 진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지배 엘리트들은 명예롭지 못한 중동에서의 전쟁으로 발생된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과 작전중 목숨을 잃은 군인들을 시민들이 더이상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언급하고, 마찬가지로 헬리버튼과 같은 용역 회사들의 전쟁을 통한 이익, 중동 내 있는 유전에 대한 권리를 추구하는 등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해 많은 시민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그래도 '온건한 제국주의'를 통해 세계 안보에 이바지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미국의 '안보주의'가 마찬가지로 국가주의에 투신한 일례를 증명하는 것이라 저자는 밝혀내고 있습니다.

다음 5장은 '시민들이 왜 비판적 인식을 키워야만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제언이 담겨 있는데요. "정부가 잘못된 정책을 펼 때, 마땅히 시민들이 비판을 해야한다"는 맥락의 주장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더 많은 독서를 통해 매스컴이 주입하는 정보들을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을 키워야 한다는 부분도 동의할 수 있었는데요. "종일 TV만 보는 사람이 오히려 진실과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2차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실제로는 명분이 없었고, '후세인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핵무기 1개 때문에" 미국이 지역 안보를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시 당국의 주장들은 만개가 넘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소위 '우위의 도덕적 관념'을 이중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내면에 견고화된 이데올로기가 충분한 교육과 지식 활동으로 축적된 것이라 인정하는 저자는 단순히 이념적 차이 때문에 반대편에 있는 시민들을 '세뇌당했다'고 터무니 없이 비난하는 것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그러한 지식활동과 교육이 맹목적이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의 총아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리라 여겨지는데요. 그래서 듀이가 말하는 시민 스스로의 교육이 자발적이든 어쩔 수 없는 것이든 간에 '시민의 의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분명한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반지성주의'가 인용되는 마지막 장에서 현재의 미국 정치가 처한 일면을 저자의 인식을 통해 정확히 목도할 수 있었는데요. 텔레비전이 대다수가 되어 시민의 정신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더욱 시민들이 책과 멀어지는 것이 아마도 작금의 '반지성주의'가 판을 치는 토양이 되었을 겁니다. 애초에 투철한 도덕적 관념을 지니고 있는 엘리트들이라 할지라도, 2세기가 넘는 동안 대중 정치에 대한 터무니 없는 두려움을 안고 있는 저들이 일반 시민들이 사색과 이론을 통해 정치적으로 무장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많은 사회학자들의 인식이기도 했습니다. 시민들이 만연된 오락거리에 노예가 되는 것을 안타까워 하기보다는 그런식으로 실제 정치에서 멀어지는 것을 오히려 반기는 것이 하워드 진이 말하는 지배 계급의 어쩌면 원하는 바일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행동주의로 갈 수 있는 교두보가 선험된 지식들을 통해 마련되는 것이고, 매스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변별력이 없는 시민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맥락이겠죠. 이는 촘스키도 그랬고, 바우만 역시 숱하게 강조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하워드 진 역시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이 사색하라고 시민들에게 권유하고 있었는데요. 작금의 네트워크의 출현과 그에 따른 온라인 상에서의 국경을 초월한 문자의 접근성을 오히려 극우들과 왜곡된 보수 우파가 더 유연하게 이용하는 것은 가짜 뉴스와 거짓말을 구분할 수 있는 변별력이 우리들에게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전역에 파견하는 미군이 좋은 일을 하고 있고, 그 의도가 순수한 거라고 그들은 전제한다. 하지만 세계를 약탈한 미국의 역사를 읽어보면 그런 전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의 교묘한 결탁이 있었다

오웰의 ‘1984‘는 요즘의 세계를 불안할 정도로 정확하게 보여주는 안내서라 할 수 있다. 여론조작, 언어조작, 사용되는 선전 문구, 악랄한 외교정책에 붙여지는 명칭, 폭격과 전쟁에 붙여지는 이름 등이 섬뜩할 정도로 비슷하다

‘안보‘라는 단어는 국가주의의 산물이다. 다른 나라의 안전은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나라를 폭격하는 짓은 그 나라 국민의 안전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미국은 유럽의 구 제국들, 예컨대 영국과 프랑스에게서 중동 석유의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양도받았다

결국 미국은 민주국가가 아니다. 우리는 경찰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후 나는 사회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가졌고, 대부분의 사람은 무력하게 의사 결정자들의 희생자가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18세기 말 루소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우리 세계에는 공학자, 과학자, 성직자 등 온갖 전문직 종사자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시민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무자비하고, 그 어느 때보다 기업과 결탁되어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군국주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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