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 - 전 세계의 빚진 사람들, 미디어된 사람들, 보안된 사람들, 대의된 사람들이여,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라! 아우또노미아총서 37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조정환 옮김, 유충현.김정연 협동번역 / 갈무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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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지식인들 중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는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로 이름을 알린 후, 마이클 하트와의 공저인 '제국'으로 큰 명성을 얻은 바 있습니다. 앞선 진술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에 대한 네그리의 편애와 사랑은 익히 잘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그는 소위 네오-스피노지즘으로 대표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1933년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 지역의 파도바에서 태어난 네그리는 부친의 공산주의 경력으로 인해 일찍이 마르크스주의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그는 정치학에서의 꽤 저명한 좌파 이론가로 알려져있고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쇠퇴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파도바 대학에서 일찍부터 후학들을 가르친 바가 있습니다.

네그리와 더불어 이 글의 공저자 중 한명인 마이클 하트는 미국 메릴랜드 출신의 철학자 입니다. 그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시애틀로 이주해 워싱턴 대학에서 비교 문학으로 진로를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마이클 하트 역시, 네그리와의 학문적 협업으로 큰 명성을 얻기 시작하는데요. 하트는 1986년 프랑스 파리에서 네그리와 실제로 만나 스피노자 연구에 대한 공동의 관심사를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1994년 이후부터 하트는 듀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원제, "Declaration"으로 2012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네그리와 하트의 또다른 협업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각지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했던 '점령하라!' 시위를 살펴보고, 다수의 시민들이 더 진전된 민주주의를 욕망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에 우리가 직면한 현실에 대해 루소를 비롯한 여러 정치적 이론가들을 인용하고 있으며, 앞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나아갈 길을 두 공저자는 찬찬히 모색하고 있었는데요. 참, 아이러니한 현실은 네그리와 같은 좌파 지식인이 우리가 좀 더 체감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나름 그려보고 있다는 것인데요. 반대로 우파들은 점차 매스컴 앞에서 입으로 민주주의가 나오는 빈도수가 더욱 줄어들면서 오로지 '시장의 자유'와 자신들의 뒷배경인 기득권층의 원만하고 방해받지 않는 경제활동을 노골적으로 펼치는 데 온 노력을 다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모두의 자유로운 경쟁에 따른 합리적인 경제 활동으로 포장하면서 말이죠.

두 공저자가 냉혹하게 진단하고 있는 바대로, 현재는 신자유주의의 독점적 승리로 인해 벌어진 사회경제적 파행과 더불어 금융이 정치와 사회에 지속적으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명령을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노동 조합의 궤멸과 지속적인 좌파들의 몰락으로 인해 시민들 대부분이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과 상대적인 빈곤에 처해져 있어 민주주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시민들의 건전성이 오랫동안 무너져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저자들은 특별히 4가지의 주체적 형상들을 언급하면서 이들의 공통된 관심사를 기반으로 나아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회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이들은 "빚진 사람들 the indebted, 미디어된 사람들 the mediatized, 보안된 사람들 the securitized, 대의된 사람들 the represented" 로 분류되고 있는데요. 이들 모두가 처한 상황은 경제권력과 정치적인 측면에서 모두 궁핍화 되었다고 저자들은 주장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동시에 현재 다수의 시민들이 처해 있는 소위 굴레적 상황과 똑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각국의 만연된 정치 상황에 따라 이러한 문제들이 시민들을 옴짝달짝 못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치명적 문제들 가운데, 이러한 기반에서 꾸준하게 이득을 취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과 그들의 뒤에 있는 소수의 기득권들은 다수 시민들의 고통을 강요하면서 이러한 착취적 구조속에서 더욱 이익을 얻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우리 정치는 신자유주의에 이미 포획된 상황인데, 이를 소위 국가 포획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금융 자본주의의 요구에 각국의 정부가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가운데 "대의된 사람들"과 대의제 의회 민주주의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저자들은 이 "대의"에 대해 보다 냉정한 분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바로 1장에서는, "정치적 대의가 투명성과 완벽함이라는 특징을 (설사) 갖고 있을지라도 대의는 정의상, 본질적으로 권력으로부터 주민을, 명령하는 자로부터 명령 받는 자를 분리시키는 메커니즘"이라고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고 있는데요. 시민들에게 이 정치적 대의가 어떤 식으로든 미화되어 그것의 소명에 대해 확신을 주고 있지만, 현대 사회의 복잡성을 차치하더라도 현실 정치에 있어 이미 그것은 유명무실한 상황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즉, 장 자크 루소가 "사적 소유가 불평등을 창출하고 따라서 자유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는 정치 체계가 발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이를 지키고 보완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설사 그 정치적 기능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미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그것을 여실히 방해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불균형적인 사적 소유의 결과물의 파급력이 시민 사회에 불안전성을 가중시킨다 할지라도 이미 신자유주의적 경제 관념에 의해 시민들이 정상적인 대항을 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관념적인 이론을 고려하더라도 민주주의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인데요. 경제적 이행에서의 민주적 절차를 포함해, 무엇보다 정의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탈산업적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행동을 가능케 하는 가능성들이 훨씬 더 빈약한 상황에서, 대의된 사람들 그리고 대의제 의회주의에 처해 있는 우리의 민주주의와 정치는 오직 소극적인 정치적 역할만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의회 정치인 경우, 의회 지도자들과 로비스트들의 직접적인 매개를 제외하면 시민들의 요구가 의회에 전달될 수 있는 상황은 오로지 헌법의 이론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콩도르셰와 토마스 제퍼슨이 "각 세대는 그들만의 헌법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헌법을 손대려고 하는 어떠한 의도에 있어서 그것을 좋게 보지 않는 세력들은 '급진적인 음모'로 몰고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실적 한계를 받아들이면서, 이와 관련해 3장 후반부에서는 사법부의 진정한 독립을 바라기 보다는, 사법부가 가진 특정한 기능들이 불가피하게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니 이것을 어떻게 정치적 지형 위에서 적절하게 재배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공저자들은 강조합니다. 결국 사법부의 관료들이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정치적 토대에서 공익을 위한 것으로 재배치 또는 재인식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저자들의 인식적 골자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다만, 3장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들은 우리가 헌법을 쓰겠다는 식의 주제넘음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다소 실망과 놀람을 받긴 했습니다만 이 주장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렇지만 이와는 별개로 모든 시민들의 권리를 위해 그것을 실효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헌법을 위해 여러 방법을 통해 토론과 의견 교환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헌법의 토대와 그 전통이라는 것을 추호도 훼손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의 권리를 위해 어떻게 사법 관료들과 좀 더 적법한 판결을 위한 토대와 이들의 정치적 인식의 재배치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는 강고화된 계층적 엘리트화에 의해 상당히 요원한 일로 여겨지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능성과 한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1장과 2장을 통해 공저자들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앞선 서술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기조 아래 정치의 자유주의적 토대와 그에 따른 정치적 이행의 건전성이 무력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오로지 경제적 측면과 시장 자유에 대한 함의만을 강조했고 앞선 진술대로 이를 통해 국가를 포획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들은 2008년의 위기 막바지에 시장이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고 강하게 부르짖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의 진정성은 오로지 자신들만이 아는 일일 겁니다. 더욱이 막대한 공적자금으로 은퇴 자금 놀이를 했던 월스트리트의 경제 엘리트들은 이제는 더 말하기도 입아픈 '도덕적 해이'의 전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공저자들은 좌파들의 철지난 도덕주의 운운이라고 다소 일축하고 있습니다만 신자유주의하에서 전통적인 도덕주의가 사회 각계 각층에서 무력화 되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정치 뿐만 아니라 경제에 있어서도 마땅한 '대항 권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데요. 물론 1980년 이후, 각국의 노동조합과 시민사회가 무력화 되고 사회가 오로지 시장을 위한 기능만으로 자리매김하고 이를 정치가 강하게 뒷받침한 상황이 근 몇십년간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피터 플레밍의 말대로 신자유주의는 마땅히 죽었어야만 했지만 현실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고 봐야 할텐데요. 시장과 경제에 종속된 정치를 위해 점진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자유주의적 시장 담론이 더이상 정치를 후퇴시키지 않는 쪽으로 앞서 서술된 4가지의 주체적 결핍에 처해 있는 시민들 모두의 공통된 의견과 이익을 모아 다음 세대는 좀 더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그 토대를 마련해 보는 것이 현시점에서 가장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 글에서 분석되고 있는 중동의 민주화와 2011년까지 산발적으로 발생한 '점령하라' 운동에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자생적 노력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데이빗 코츠의 말대로 자원 대 자원의 싸움이어서 네트워크 기업들 마저 노골적인 이익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얼마만큼 시민들이 정치적 활동에서의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부정과 긍정을 떠나 앞으로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끝으로, 어차피 모두가 사활을 걸어야 하는 경제적 요건에 처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저자들의 우려대로 생활의 유지가 내일도 어려운 사람들이 처한 시급한 처지와 방만한 소비 자본주의로 인해 골병을 들고 있는 지구가 언제 우리의 등을 돌리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뭐가 시급한 문제인가를 선택하고 개선하는 것은 다소 어려운 부분이기도 한데요. 현재의 상황에서 당장 이번주내에 실효적인 개혁에 나서야 하겠지만 모두의 이해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기존의 엘리트 지배체로는 사실상 한계에 따른 해결책을 모색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대안적 정치의 기반이 되어야 할 수많은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기득권의 노골적인 저항과 경제적 불평등의 구조적 차이가 큰 이익이 되어 돌아오는 부유층의 저항을 과연 우리가 맞서 대응할 수 있을지는 짧은 지식 따위를 갖고 있는 저로서도 어려운 부분이라 느껴집니다. 물론 저자들의 경고대로 군사적 혁명 따위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급진 민주주의적 담론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저자들의 다각도의 제안이 담겨 있는 3장과 결론을 이 시점에서 좀 더 음미해 보는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럽은 극우 포퓰리즘과 극단적인 정치가 횡행할 여지가 전혀 제거되지 않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큰 위협이라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더욱이 과거 로마 공화정 하에서의 귀족 정치가 민회를 극도로 혐오해왔다는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다수 지배 체제에 대한 소수 기득권들의 저항이 앞으로의 건전한 민주주의와 다음 세대의 삶의 온전성을 좌우한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본래의 자본주의가 계급화를 용인하지는 않았지만 실상은 과거 봉건주의보다 극심한 계급적 몰이해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데이빗 코츠의 글에서도 그랬지만 시민들에게 시간이 남아있을지 깊은 우려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코츠가 신자유주의자들의 공적 지출에 대한 이중성을 논하면서 막대한 국방비 지출에 대한 언급을 그의 논저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들었는데요. 이것에 대한 의문을 이 책에서 약간이나마 풀 수가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와 공화에 대한 여러 인용들이 너무나 훌륭해서 이 글을 읽는 내내 멈춰서 음미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많은 좌파 사상가들은 이토록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하나같이 갖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이들을 이데올로기적인 외눈으로 공격하는 자들이 이렇게나 많으니 실로 안타까운 생각이 절로 듭니다. 

삶 자체가 노동에 처해졌다

그리므로 이것들은, 그들이 신자유주의의 부정의함 injustice 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사유재산의 지배 이의를 제기한다는 의미에서 공통적인 것을 위한 투쟁이다

2011년 초, 근본적 불평등에 의해 특징지어진 사회경제적 위기들의 한 가운데에서, 상식 common sense은, 더 큰 재앙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배권력의 결정과 인내를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한다고 지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금리생활자들은 부를 생산하는 순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착취의 잔인한 현실, 생산적 노동에 대한 폭력, 지대의 생산에서 착취가 야기하는 고통을 인식할 수 없다

따라서 미디어된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능동적인 것도 수동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끊임없이 주의에 몰두하는 주체성이다

역사적으로 볼때, 다양한 형태의 보안체제가 발흥하는 것과 조응하는 하나의 현상은 자본주의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전략들의 우세다

게다가 현재의 경제적 금융위기는 일련의 다른 두려움들을 덧붙인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가장 커다란 두려움들 중의 하나는 실직에 대한 두려움, 즉 생존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다

대의가 사실은 민주주의의 수단이 아니라 민주주의 실현의 장애물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모든 것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기능한다 하더라도, 정치적 대의가 투명성과 완벽함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을지라도, 대의는 정의상, 본질적으로 권력으로부터 주민을, 명령하는 자로부터 명령 받는 자를 분리시키는 메커니즘이다

사적 소유가 불평등을 창출하고 따라서 자유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에서도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는 정치 체제 system가 발명되어야 한다

출구를 발견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푸코와 그에 앞서 마키아벨리가 설명한 권력의 본성에 대한 기본적 인식을 기억하는 것 뿐이다. 권력은 사물이 아니라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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