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가 아닌 99%를 위한 경제 - 그들만을 위한 자본주의, 왜 민주사회주의는 돌파구가 되는가
폴 애들러 지음, 한은경 외 옮김, 이원재 감수 / 21세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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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USC)의 마샬경영대학원의 해럴드 퀸턴 석좌교수인 폴 애들러는 호주에서 교육을 시작해 1974년 프랑스로 이주해 프랑스 정부의 경제학자로 일한 경력이 있습니다. 이후 1981년에 도미해 1991년 USC에 안착하기 전, 컬럼비아 대학과 하버드 경영 대학원, 스탠포드 공과대학에서 연구를 지속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경제학과 경영조직학 및 환경학 분야의 권위자이기도 한데요. 특히, 경영조직론과 관련된 논문을 수차례 발표하는 등 활발한 연구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미국 내의 진보적인 싱크탱크인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경력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99 Percent Economy : How Democratic Socialism Can Overcome The Crises Of Capitalism˝으로 지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폴 애들러가 이 책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점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여섯 가지의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민주사회주의 Democratic Socialism 적인 해법이 국가와 사회에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좀 더 이를 엄밀히 분석하자면 그저 개선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또한, 이 글은 후반부에서 밝히고 있듯이 2015년 옥스포드에서의 공개 강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애들러가 제시하는 민주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Social Democracy와는 다소 상이한 이론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민주사회주의는 민간 기업을 공공이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의 핵심을 개인 투자자에게 맡기고 그로 인해 발생한 여러 문제를 정부가 강력한 규제와 사회 복지에 대한 광범위한 투자로 통해 해결하는 것˝이라 이 글 4장에서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민주사회주의는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민주적인 방법을 통해 기업에 포함된 모든 인원들이 자유롭게 협력하고 이를 통해 혁신을 이뤄나간다는 취지의 생각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공공 영역을 민간에 분할하게 되었던 초기 신자유주의 정책에 상반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사실 이보다 더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사기업을 시민과 정부가 주도하는 공공 영역으로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기업 경영자들을 포함한 기득권자들의 저항은 차치하더라도 단순히 기업 수뇌부를 온존시켜 ˝함께 경영˝식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이들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민주적 방식으로 일종의 ˝집단 경영˝으로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기도 합니다. 글에서는 이것에 대한 일례로 미국 최대 의료서비스 제공업체이자 최대 의료보험회사인 ˝카이저 퍼머넌트 Kaiser Permanente, KP˝를 소개하고 있었는데요. 소위 전문영역에 위치한 기업의 혁신 관리를 민주사회주의적인 어법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논리적 근거와 그 연계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에 대해선 불확실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론 자체로만 봤을 때는 크게 공감할 부분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책임에 대한 리스크를 분산한다든지 다수의 아이디어를 취합해 실질적으로 혁신에 이용하자는 주장은 꽤 매력적이기도 하였는데요. 저는 단순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모순에 따른 체제적 대안을 기대했으나 애들러의 이 민주사회주의는 완전히 예상밖의 이론이라 좀 더 숙고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앞선 부분에서 이미 간략하게 언급했듯이, 저자인 애들러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여섯 가지의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기업의 성장을 위해 사회와 시민의 희생을 강요했으며, 둘째로는 노동 분야에서의 심각한 착취 관계, 세번째로 사실상 기업에 종속되어 버린 정부, 넷째로 자본주의 기업이 초래한 환경 파괴, 다섯째로 자본주의 기업이 일으킨 사회적 위기 (이를테면 심각한 불평등 문제). 여섯째로 세계 경제의 위계질서로 인한 국가간의 착취 문제 등입니다. 위의 여섯가지의 문제가 크게 부풀린 의도 없이 꽤 명료한 근거들로 뒷받침되고 있었는데요. 자본주의가 거의 혁명적으로 개인주의적 가치를 태동시키고 인간 사회를 진보에 이르게 한 점은 분명 계몽의 역사와 더불어 중대한 결과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앞선 장에서 저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2008년에 발생한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에 있어서 부유층의 투자 손실은 어느 정도 복구가 가능했지만 그 외에 다른 시민들의 피해는 여전히 심각한 상황에서 날로 경제적 불평등도 심대해졌기에 현재의 자본주의에 의한 사회적 병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문제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럼에도 미국의 경우는 전세계에 대한 과도한 무기 판매와 막대한 국방비 지출을 다른 나라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으며, 엄연히 사회적 안정과 시민의 생활 안정에 자원을 투입해도 모자랄 정부가 대기업들의 눈치와 이들의 이익 보장을 위해 날로 규제를 완화하고 있는 점은 우려스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미국 정치권과 경제 엘리트들 간의 ‘회전문 인사‘와 같이 이들의 견고한 카르텔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또다른 병폐로 갈음되고 있기도 한데요. 자본주의가 애초에 계급적 지배나 견고한 계급 정치를 용인하지 않고 있는 이데올로기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라이트 밀스가 경고한 바대로 이러한 양상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능력주의란 누가 지배 엘리트에 편압하느냐에 대한 문제에 불과하다˝하다고 일축하고 있는데요. 이처럼 신자유주의자들이 찬양하고 숭배하는 능력주의란 이처럼 협소하고 다수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신념 체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후기 자본주의가 금융화와 규제 완화라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변화 되면서 오히려 저자의 의견대로 더 우리 사회와 밀접해진 경향이 있습니다. ˝사회적 생산˝이라는 현상 아래 이제는 기업의 생산품이 단순히 기업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부의 지원 시민의 희생이라는 체계에서 더 많은 이윤을 거두기 위한 일종의 ‘선제적인 조치‘로 이해되기 시작했는데요.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단순히 사회적 비용과 규제를 제거시키는 것을 넘어 이 정도의 목적까지 머리에 담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개인은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미명하에 다수의 시민들이 이익을 추구하기는 커녕 가진것 마저도 양보하고 노동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뭔가 반사회적인 후퇴가 전방위적으로 근 몇 십년간 진행되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시민들의 상황을 신자유주의자들은 그저 정부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기지를 발휘하게 되었는데요. 종래와는 다른 재구조화된 이런 사회 메커니즘이 사실 이들에게는 큰 이익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며, 저자가 강조하고 있듯 이러한 전반적인 체제 변화가 정부의 기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부가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는 쪽으로 행정 지원과 사회 제도 개선에 나서도록 강요한 문제들까지 포함한 것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이행은 모두가 알다시피 ˝포드에게 좋은 것은 국가와 사회에도 좋은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프로파간다에 의해 진행되었고 동시에 기업의 이익이 시민에게도 충실하게 돌아갈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뭐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 모두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신자유주의 이전에 이미 기업 지본주의에 대한 사회의 무차별 항복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트 코츠 교수가 이미 미국의 현대 경제사를 통해 밝히고 있듯, 케인스주의에 따른 규제 함의의 자본주의가 빠르게 종식되고 기업들도 초기에는 인정하고 있던 ˝사회적 합의˝에 대한 체계 또한 매우 재빠르게 손에서 놓게 됩니다. 초기 자본주의에서 기업들이 무조건 및 무제한적으로 이익 추구에 있었던 것이 아님은 1920년대 이후의 미국 경제계를 찬찬히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는데요. 결국 기업들의 최소한의 사회적 의무 같은 건 신자유주의자들이 그것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부유층과 자본을 보유한 기득권층이 돈을 더 딸 수 있는 시스템으로 변질되면서 2008년 이후에 조금이라도 개선될 줄 알았던 자본주의가 공익과는 더 멀어지게 된 것이죠. 여기에는 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월스트리트에 대한 항복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정부 초기에서는 이들 경제 엘리트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고자 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의지가 있기도 했습니다만 결국 어느 누구도 기소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매우 잘못된 신호를 정부 차원에서 준 것으로 은행과 해외 투자자들에게 잘보이겠다고 미국 정치가 금도를 어기게 된 것이죠. 그것도 리버럴이라는 자들에게서 말이죠.

이러한 가운데 저자인 폴 애들러가 대안으로 밝힌 이 ‘민주사회주의‘가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 내면서 정착하게 된다면 분명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애들러는 이 글 4장에서 아주 짤막하게 ˝규제 자본주의˝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습니다만 저는 완벽한 케인스주의는 아닐지라도 금융 전반에 한해서는 철두철미한 규제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기업 경영자들이 주주의 수익 분배에만 몰두하고 있는 나머지 제대로 된 경영이 되지 않고 있는 점도 분명 심각한 문제이며, 이러한 금융화 자체가 자본주의의 건전성을 해치고 있는 것도 지나치지 않은 해석일겁니다. 그런 면에서 미국은 FRB를 먼저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하고 경제 엘리트들 대부분이 현 시스템에 동조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인식하고 있어야 하겠죠. 그런면에서 금권 정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은 확실히 과거로 돌아가기란 실로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이익화에 대한 거의 모든 계층의 지지가 너무나 완고하기 때문이죠. 마틴 길렌스가 그렇게 미국인들이 공익과 사회적 부조를 상실하게 되었는지 강조했던 연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죠.

아직도 일각의 자본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정치 전부를 집단주의로 몰고가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개인주의를 탄생시킨 자본주의는 그만큼 집단주의를 경멸하는데요. 사실 우리의 민주주의와 과거 계몽주의 시대의 공리주의 자체가 다수의 이익을 기반으로 하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자유주의가 겉으로나마 민주주의와 한몸이 되기 위해 노력했듯이 자본주의는 이 쯤에서 민주적 가치를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자본에 있어서 소비자이자 시민인 우리들의 생활 안정성은 자신들의 번영에도 매우 중대한 부분이기도 한데요. 애들러는 다가오는 환경 파괴 가능성과 핵보유국에 의한 핵전쟁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이 자본주의의 체제 불안전성을 다른 측면에서도 논증하고 있듯이, 현재의 자본주의 자체가 불안전성을 별개로 이미 외부 요인으로 인해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저 현 세대에서 거두는 달콤한 이익과 우쭐거림 만으로 살다가는 자본의 존립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만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의 서평이 제 500번째 글이 되었습니다. 근 4년동안 서평을 써왔는데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요. 하여튼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근본적으로 경제적 불합리라는 위기가 발생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으로 구성된 큭졀한 재산 체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국 백인은 인종차별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믿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시작된 미군의 국제 개입은 수치스러운 역사다. 미국에 이익이 되는 유용한 동맹국을 만들어내기 위해 미군은 억압적인 정권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 무렵 미국은 36개 정부의 전복을 원조하고, 다른 나라의 선거에 최소 84회 개입했으며, 외국 지도자 50명을 암살 시도했고, 30여 개 나라의 국민에게 폭탄을 투여했다

그러나 최근 불평등에 관심을 보이느라 자본주의의 결정적 특징인 고용주와 피고용주 사이의 지속적이며 근본적인 불평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신자유주의는 규제 완화와 정부 축소를 지향하며 분투해왔지만, 실제로는 정부를 축소하기보다는 정부의 서비스 제공을 민영화하는 차원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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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7-27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국가-시장의 경계 설정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게 하는 멋진 글을을 써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은연중 시장만능주의적 사고가 사회 전체에 깊이 침투하지 않았는가 하는 절망적인 생각을 하곤 하지만, 좋은 글들을 읽으며 다시 희망을 가져 봅니다.

베터라이프 2021-07-27 22:0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추풍오장원님! 자주 제 글을 읽어주시고 이렇게 댓글도 남겨주셔서 항상 감사한 마음 갖고 있습니다 ^^ 제가 그동안 너무 신자유주의적 이행을 비판해 와서 가끔은 사람들이 절 음모론자로 생각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 저말은 반쯤 농담이구요. 저는 남은 일생에서 가장 바라는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좀 더 영악해지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득권과 막대한 부를 소유한 자들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던 신자유주의와 비등하게라도 우리의 민주주의를 강화시킬 수 있는 여러 이론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로베르트 M. 웅거와 샹탈 무페가 그런 사고의 창의성을 시민들에게 조만간 제공할 수 있을거라 생각을 하는데요. 그보다 민주주의는 비범한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거라고 했습니다 ^^ 그래도 희망은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