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굴욕
크리스 헤지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작가인 크리스 헤지스는 현실비판적인 논픽션을 다루면서 미국에서 큰 명성을 얻은 인물입니다. 그는 미국 해밀턴에 소재한 콜게이트 대학과 하버드 대학을 거쳐 언론계에 투신하게 되는데요. 이후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면서 종군 기자로 명성을 얻고 뉴욕 타임즈의 해외 특파원으로 재직합니다. 2002년의 퓰리처 상 수상을 기점으로 프리스턴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였고 미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기득권과 지배 계급에 대한 도덕적 타락과 소위 이들 엘리트들이 체제 모순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서의 여타 학문적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영어 뿐만 아니라 아랍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구사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원제, "Empire of Illlusion"으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약간의 논외지만 번역된 책 제목과 관련해 원제를 그대로 차용해도 의미상에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번역한 출판사의 자극적인 책 제목은 마찬가지로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에 대한 전체적인 주요 논지를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인 크리스 헤지스는 현재 미국 내의 시민들이 건전한 민주주의를 답보하는 자신들의 건전성이 사실상 상실되었으며, 또한 현재의 미국 정치는 인문주의의 쇠퇴, 기득권의 권력 남용 그리고 시장중심주의 내지는 시장자유주의에 따른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해 현실의 논거에 기반하여 이를 일관되게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만연된 코포라티즘 coporatism 정치를 이러한 사태의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는데요. 이것은 주로 이 책 5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더불어 1장부터 2장은 시민의 건강한 정치의식이 거세된 현재 미국 내의 '싸구려 문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많은 "대중들이 상류층의 생활과 소비 문화를 흉내내는 데 급급한" 지금의 문화를 그는 냉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헐리우드 스타들과 셀러브리티 들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와 저급한 포르노그라피 문화에 대해 저자는 미국 대중의 실체적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는데요. 3장에서 인문학과 고전에 대한 다수 지배 계급의 소위 "죽은 글"이라고 매도하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시민 대부분의 보잘것 없는 문해력과 형편없는 독서 수준은 자유 시장주의의 질서를 꿈처럼 달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지배 계급 대부분의 인문학 폄하 분위기와 맞물려 그대로 이중적인 악순환의 구조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마찬가지로 3장에서 헤지스는 "고전적인 연극, 신문, 책은 읽고 쓸 줄 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문화생활의 변방으로 밀려났다"고 진단하고 "우리의 정치 경제 체제가 파산한 직접적인 원인은 인문학에 대한 폭력에서 찾을 수 있다"고 동일한 장에서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헤지스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도덕성과 권력이 상존하고 균형있게 존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고 있는데요. 이는 반대로 "인문학의 도피는 양심으로부터의 도피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데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즉, 시장 자유와 시장 중심의 현재의 체제 전반이 탈도덕화에 직면하고, 수많은 기득권이 이 도덕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경멸을 토해내면서 1980년대의 레이거노믹스에 의해 서서히 무력화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저자는 이를 도대로 2장에서 대학 본연의 "지성의 탐구"라는 순수 목적이 사라지고 현재는 직업적 엘리트들을 양산하기 위한 아주 도식적인 훈련에 그치고 있다면서 이러한 전반적인 사회 풍조가 저급한 대중문화와 이를 방조하는 지배 계급의 의도와 아주 잘 맞물려 있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소위 지성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의 전반적인 모습이 엘리트 지배 계급에 의해 코포라티즘 정치로 강화되고 이러한 체제에 거의 쓸모가 없는 도덕과 인문학 등을 제거한 것으로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헤지스는 이 글에서 대부분의 지배 계급이 현재의 체제가 어떠한 문제를 안고 있는지 별로 관심이 없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안전하게 세습하고 이것을 공고화 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비판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이 전부 사회의 적이라 규정 될 수는 없지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양 팔을 마음껏 휘둘러 이것을 사회 전반의 이데올로기로 만든 것은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 변호사. 기술자들이 마음껏 돈을 벌 수 있는 사회"가 실질적인 측면에서 아름답지 못한 것은 이들이 시민 전체의 정의와 보건, 사회 안정성을 쥐고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 최소한의 의무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건전성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함에도 오로지 마음껏 돈을 벌 수 있는 이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스스로 전혀 비판할 의지 또는 심한말로 필요성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헤지스는 이러한 메커니즘을 명확히 건드리고 있었습니다. 아주 간단히 더 설명해 보자면, 높은 교육과 다른 시민들에 비해 더 많은 사회적 자원을 지원 받은 이들 지배 계급 혹은 엘리트들이 다수의 이익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은 여기에서 드러나는 대학에서의 교육도 한 몫을 했을 테지만, 자신들과는 다른 시민들을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평가하는 알량한 계급주의적 편견이 스스로가 다른 사회에 있다고 믿는 것으로 동일시 되어 나타나기 때문일겁니다. 저들에게는 다수의 시민 사회가 자신들이 위치하고 있는 사회와는 명백히 다른 곳임을 스스로 현명하게 구분해 내는 감각과 훈련을 체득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선 인식적 매개들과는 달리 우리의 민주주의는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 희생에 기초한다"고 헤지스는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수 우파들에 의해 자유주의 (엄밀히 따지면 신자유주의)가 마땅히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스스로의 정치 인식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러한 범주에 들어가는 정치인은 1920년대 대공황 이후 전부 소멸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사실 많은 시민들이 체제 전반의 건전한 변화와 개혁을 요청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부르짖은 모두를 위한 이익이라는 관념이 그저 사기임에 드러났음에도" 아직도 지배 계급은 이러한 앵무새 같은 말을 거듭 반복하고 있습니다. 저는 헤지스의 이 글을 통해 얼마나 시민과 대중이 무력화되어 있는지 깨닫게 되었는데요. 시장 자유에 따른 개인주의의 폭발적인 영속화가 얼마나 제대로 된 견제를 받지 못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올더스 헉슬리 류의 허무맹랑한 음모론 따위로 치부하는 자들이 더많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냉엄한 현실음은 분명합니다. 전반적인 사회정치적 상황이 저들을 제대로 견제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문제가 하루 이틀의 상황이 아닌것도 명백합니다. 그래서 헤지스가 지면을 할애해 이처럼 거듭 인문학의 복귀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의 말대로 "끊임없이 독서를 하는 시민들을 경멸해 마지 않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시점에서 이와같은 현실의 '시민 건전성의 복귀'라는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지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득권의 권력 남용이라는 부분이 참으로 마음에 와 닿았는데요. 민주주의적 여론 자체가 이미 시민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마음만 먹으면 주도할 수 있기에, 사회 전방위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그려볼 수 없는 것이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가 이미 너무나 가까운 상황임을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글의 5장은 매우 중요하게 읽어야 될 부분으로 여겨졌는데요. 현재의 사회경제적인 모순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가 어떤 현실을 바라봐야 할 지 명확하게 구분해주는 헤지스의 노력이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인간이 '선악이 혼합된 존재'라는 것에 일차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3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반지성주의 윤리"에 대해 다시금 집중하게 되었는데요. 이 반지성주의 윤리는 오늘날 우리의 양면적인 정치를 설명하는 아주 정확한 잣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 책도 역시 꽤 오랫동안 제 머리에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 글에는 현재의 상황을 비판하면서 코포라티즘과 함께 '기업 군주'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데요. 과두제와 더불어 생각해보니 실로 적절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책을 구입한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그동안 이 책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틀에 박힌 내용일거라 짐작하고 전혀 건드리지를 않았는데 일단 제 어리석음을 탓해야겠습니다.

조지 오웰이 두려워한 것은 책을 금지하는 자들이었다

외모, 효용성, ‘성공‘하는 능력 외에는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

고전적인 연극, 신문, 책은 읽고 쓸 줄 아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문화생활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우리 사회는 미합중국과 그 동맹국들이 가자 지구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이거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사람을 대량 학살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 냉혹한 사회다

우리의 정치 경제 체제가 파산한 직접 원인은 인문학에 대한 폭력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지배 계급은 폭넒고 보편적인 문제들, 인문학 교육의 주제들, 즉 문화의 기본 전제들에 도전하고, 정치 경제 권력의 가혹한 실체를 조사하는 주제들을 제기할 능력이 없다

의사, 변호사, 기술자는 부자가 될 수 있지만, 그 직업의 진정한 의미는 그들이 건강, 정의, 좋은 정부, 안전을 떠받친다는 것이다

이 나라의 도덕적 쇠퇴는 물리적 쇠퇴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도로, 다리, 하수 시설, 공항, 열차, 대중교통 등 우리의 기간 시설이 과부하 상태이고, 낙후되고 보수가 힘들 정도로 암울한 상태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제국주의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제국주의에 투입되는 막대한 자원과 예산은 민주주의가 불가피하게 시들고 말라 죽는다는 걸 의미한다

1911년에 실업가 리처드 텔러 크레인은 인문주의자들이 "정신 활동"이라 부르는 것을 훨씬 더 신랄하게 비난했다. "쓸모 있는 사람만이 행복할 자격이 있으므로 문학 취미를 가진 사람은 누구도 행복할 권리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