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거 대디 자본주의 - 친밀한 착취가 만들어낸 고립된 노동의 디스토피아
피터 플레밍 지음, 김승진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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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대학의 카스 비즈니스 스쿨의 교수인 피터 플레밍은 영국 내의 대표적인 신자유주의의 비판자입니다. 그는 비즈니스와 사회 간의 변화하는 관계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이를 공시적으로 '탈공식화'라는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시장의 비즈니스 전반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전반적인 고통을 시민들에게 전가하는 등의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그는 비판적 인식을 보이고 있는데요. 사실 제가 그동안 '신자유주의'에 대한 글을 많이 읽기도 했습니다만 보통은 신자유주의의 실체에 대해 비판하는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을 향해 소위 보수 우파들이 이를 음모론으로 공격하고 그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논리 등으로 맞받아치고 있기도 한데요. 이에 저자는 신자유주의는 밀턴 프리드먼이 사망한 2006년에 이미 종말을 고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도 세계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대표적 경제 이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자유 지상주의 및 극단적 개인주의를 연계해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다양한 사례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실체가 없다던 신자유주의'에 사실상 '실체'를 규명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봐도 무방할 것 같아 보입니다. 이 책은 2019년에 원제, "Sugar Daddy Capitalism : The Dark Side of The New Econom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1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플레밍의 이 책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요. 플레밍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비판하면서 그의 유명한 논저 '노예의 길'을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와 같은 글로 비난하고, 밀턴 프리드먼과 하이에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잘 작동하는 시장이 모든 인간의 갈등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불행하지만 허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증명해 냈습니다. 이것은 플레밍의 표현대로라면 '하이에크의 뒷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에크를 아꼈던 대처에 의해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강화되어 왔고, 여기에 밀턴 프리드먼은 하이에크의 그런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말년에 노구를 이끌고 강연에 뛰어들었던 것은 매우 유명하기도 합니다.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가 얼마나 사회학과 철학에 올바르게 심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홉스와 로크에 의해 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사회라는 계약을 맺게 되었던 것을 망각하고 오로지 자유지상주의와 마찬가지인 시장 자유가 개인들의 갈등을 '경제적 계약'을 통해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던 것은 의도된 무시라고 생각되는데요. 왜냐하면 프리드먼이 애덤 스미스의 글을 작심하고 제대로 읽었다면 그의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과 '노동의 가치'에 대해 인지하고 '노동'과 '근로 단체'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보다 프리드먼은 일찍이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없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의 사상적 체계가 어느쪽으로 향해 있는지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을 겁니다. 

초기의 이들 신자유주의자들이 집중했던 것은 '정부'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이들은 사실상 정부가 '최소한의 법이 얼마나 유지되는지 제3자의 입장에서 관리하는 정도"의 그것을 열렬히 원했는데요. 정부를 악마화시킨 것은 둘째 지더라도, 사회진화론에 심취해 사회 자체에 '약육강식론'을 대입시킨 것은 매우 유명합니다. 정부나 사회의 개입 필요 없이 개인들간의 자유로운 계약이 이 자연 상태를 벗어나게 하고 더 나아가 인간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은 오늘날과 같은 통합된 지식의 시대에 얼마나 그 궤를 벗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자인 플레밍도 이 글의 2장과 3장에서 이런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에 대해 여실히 비판하고 있기도 하는데요. 신자유주의자들의 기본적인 사고 메커니즘은 "시장에서의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가 이를테면 "경제는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저들의 잘못된 명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의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 글의 2부의 제목인 "당신의 가격은 얼마?"에 사례로 인용되어 나오는 브랜던 웨이드의 사업 아이디어에서 현 자본주의의 왜곡된 본질이 거의 과감없이 드러나 있다 생각됩니다. 제목의 모티브가 된 브랜던 웨이드는 소위 3~40대 재력가 남자들과 10대에서 20대의 젊은 여성을 연결시켜 주면서, 거의 매매춘과 다름없는 사업으로 부를 획득하게 되는데요. 이 '슈거 대디'들과 직접 만나 데이트를 하는 이 '슈거 베이비'인 젊은 여성들은 데이트의 마지막엔 이들 남성들과 성관계를 해야만 하는 압박을 받으며, 그 일련의 남성들의 호의는 바로 이 최종적인 목표를 위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들간의 금전 거래와도 같은 일례들이 성까지 사고 팔 수 있게 만들었으면 이러한 심각한 자본주의의 비인간화는 '오로지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는 미명하에 이미 도덕과 최소한의 법이 유명무실해진 시장에서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3부에서는 '규제' 자체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는 이 신자유주의가 정부와 국가에는 최소한의 법으로 야경 국가만을 위해 존재할 수 있도록 그동안 거의 강제적인 사회 체제 변용을 저들은 추인했고 더 나아가 민주적 통제 자체를 '급진적 민주주의'로 몰아가면서 오늘날과 같은 돈과 거래에만 극단의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했습니다. 사실 신자유주의자들의 규제에 대한 증오는 전반적인 관료제에 대한 거부감과 멸시로 이어지는데요. 밀턴 프리드먼이 조직화 된 의사 단체들에 대해 공격을 퍼부었던 것으로 보아 '조직화 된 힘'에 대한 거부감과 더불어 자신의 조국이 너무 집합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터무니 없는 공격을 했기에  플레밍이 강조하는 탈공식화는 물론이고 사회에서 인간성을 제거하는데에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짤막하게 미국의 의료 시스템을 고찰해 본다면 이미 극단적인 자본의 논리에 융합되어 '환자를 돈의 유무'와 '보험의 등급'으로 나눠 사실상의 생명 경시를 초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1장에서 플레밍은 개인이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계약에 나설 때, 이미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한계는 명확하며 병을 얻게된 그 자체의 이유 마저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 '마땅히 시민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짓밟게 하는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적 가치에 부합되는지 저는 깊은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플레밍의 이 글에서는 논증상 한가지 미흡한 부분이 있는데요. 그것은 어떻게 보수 우파들이 신자유주의와 영합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저자가 주장에 대한 논거를 위해 공들여 사례로 입증하는 것으로 볼 때, 이 점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그저 보수주의적 법학자인 리처드 엡스타인을 통해 어떻게 보수주의가 신자유주의와 한 몸이 되었는지에 대해 약간 짐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만 '개인이 추구하는 경제적 이익'을 자본주의적 논리에 부합한다는 결론을 내린 보수주의 정치가 80년대 이후 '사회적 부조'에 치를 떨게 되면서 이어지는 이 신자유주의적 탄생에 이바지 했던 점은 거의 분명합니다. 마찬가지로 플레밍은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로 변화되었다는 문장으로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종래의 자유주의의 변질이 결국은 사회에 대한 배신이 되었던 것도 거의 확실합니다. 거듭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사회에서의 도덕주의와 인간성의 상실은 개인의 보호라는 사회적 의무가 단순한 계약관계에 의해 축소되면서 모든 책임은 오로지 개인들에게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자유 경쟁과 시장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왜 의사나 변호사를 비롯한 일반 전문직에 관료제의 의한 공적 시험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다 종사할 수 있게 하자고 하지 않는지 아주 의문입니다. 물론 저들이 위의 전문직은 타고난 사람들이 맡아야 한다는 인식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지는 않을겁니다. 다만, 그런식으로 입맛대로 이뤄지는 사고는 시민들에게 더욱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약간 덧붙여 플레밍은 극단적인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인식을 피력하면서, "자유지상주의 사상의 역사에는 산업 활동에 대한 담론에서 '노동'을 공식적으로 제거하려 했던 오랜 전통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들의 시민의 노동을 공장을 돌아가게 하는 일개 부품의 역할로 여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본주의적 자아 실현에 대해 그만큼 강조하고 긍정적으로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을 자본 축적의 방해물로 여긴 것은 극히 유감스러운 부분입니다. 결국 이러한 체제적 강화에서 신자유주의를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구축되지 못했고 2008년의 그 극명한 붕괴 이후에도 아직도 신자유주의적 노선이 건재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경제에 대한 맹신에 그 역사는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비판했던 바가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은 제약에서 벗어난 자본주의가 우리를 더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게 해주리라 믿었다"고 언급하기에 이르는데요. 저는 저 두 사람이 실제로 그렇게 믿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시민들이 자신들의 힘든 삶을 영위하고 있을 때, 사회는 그저 시장 규칙이나 준수하라는 일갈만을 외치던 자들이 과연 인간성을 갖고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과연 이러한 사회와 삶 자체가 우리가 원했던 것일까요. 어처구니가 없게도 이 신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스스로 이러한 세상을 원했다고 주장들을 하고 있지요.

-번역이 크게 문제가 있어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피터 플레밍의 논조는 대체적으로 신랄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그의 주장이 콜린 크라우치보다 더 극적이면서 강조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비판적 의견을 담고 있다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한 번쯤은 읽어보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저자의 비유대로라면 신자유주의는 "당신의 가격은 얼마인가"로 함축된다고 생각됩니다. 저 문장에는 실로 핵심이 담겨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인식하고 동의할 수 있을 만큼의 ‘공동의 선‘은 분명 존재한다

고립된 개인은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권력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자유지상주의 사상의 역사에는 산업 활동에 대한 담론에서 ‘노동‘을 공식적으로 제거하려 했던 오랜 전통이 있다

모든 이가 평평한 운동장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시카고 학파의 유토피아적 판타지가 무엇을 말해 주겠는가

불평등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논리는 약화되기는 커녕 강화됐다

정부는 그저 카지노의 딜러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최저임금법이나 실업 복지와 같은 국가의 개입에 맹렬히 반대한다

산업 자본주의가 생긴 이래 소유주는 늘 노동자와 전쟁 상태였다

시장 자유주의는 ‘자유로운 선택‘과 별로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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