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은 없다 - 사회이동이 우리를 어떻게 호도하는가, 2021 7월 책씨앗 인문교양부분 추천도서
하다스 바이스 지음, 문혜림.고민지 옮김 / 산지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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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하다스 바이스는 이스라엘 출신의 문화인류학자이자 현재는 베를린훔볼트 대학의 아시아-아프리카 학과에서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녀는 미국 사회과학의 요람이라 불리우는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독일과 핀란드 등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던 이력을 갖고 있는데요. 이번에 ‘중산층은 없다‘라는 책은 거의 처음 출판되는 바이스의 논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녀는 경제인류학과 사회비판이론 및 자본주의의 금융화 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학자에게 경제학은 조금 상상하기 힘든 분야일 수도 있겠는데요. 다만, 이 책을 읽어보니 그녀가 왜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학이 인간 사회와 밀접한 학문이고 특히 인간의 역사적 변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왜 현 시대의 인간 사회가 과거와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에 어떻게 종속되었는지에 의문을 품고 이를 규명하는데 온 노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의 무리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녀의 학문적 진정성은 높이 살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은 원제, ˝We have never been middle class˝로 지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제목과 더불어 그녀가 이 책을 통해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점을 먼저 소개하고 싶은데요. 현재 우리가 익히 관념적으로 혹은 체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중산층 혹은 중간계급‘이라는 용어 자체가 자본주의가 노동력을 근간으로 하는 시민들을 착취하고 이를 잉여 자본의 축적으로 이용하면서 그것에 대한 본질을 호도하기 위해 이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일관되게 논증되고 있습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 ˝중산층 이데올로기˝ 자체가 교묘하게 진보와 보수 그리고 좌와우 할 것 없이 사회정치적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여기에는 자본주의의 꽤 면밀한 작업이 동반되었다고 저자는 보는 듯 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이데올로기 자체가 강요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맥락으로 저자인 바이스는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이 중산층 middle class 은 현재의 전반적인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평범한 시민들의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자본의 축적과 잉여 가치의 지속적인 생산을 위해 이용되고 있어서 그에 따른 자본에 의한 사회적 작업을 면밀하게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으로 판단됩니다.

우리에게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프랭크 나이트는 금융 자본주의의 인정을 위해 ˝소유와 불확실성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강력한 논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즉, 오늘날의 금융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시장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대적으로 금융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홍보하면서 금융 자본주의에 의한 장미및 전망을 이론적 기반에서 정립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마찬가지로 밀턴 프리드먼 역시 이와 유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 체계는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을 분석하며 한스베르너 진이 꼬집은 ‘카지노 자본주의‘의 일면이라 봐도 지나치지 않아 보입니다. 그동안 저는 포스트 포드주의에 따른 자본주의의 금융화에 대해 인용을 자주 해왔는데요. 또한 자본주의 자체가 자아실현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체계로 시민들의 활발한 계급 이동을 원칙적으로는 옹호한 것으로 재생산 되어 왔습니다. 물론 현실은 이와는 매우 다르죠. 애초에 이 자본주의는 계급주의적 고착화를 용인하거나 긍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는 본래 자본주의의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 3장에서 이 시스템에 대한 대략의 얼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수많은 시민들이 교육을 통한 인적 자본의 투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회경제적 우위였습니다. 즉, 사회적 자원을 부모로부터 지원받아 그렇지 않은 다른 계층의 사람들보다 더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불평등한 전제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따라서 척 콜린스나 매트 스튜어트가 이 계급 세습에 대한 비판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의 견고한 교리와는 별개로 극심한 불평등을 양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능력주의 meritocracy 의 역설적 측면이라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흔히 수많은 부유층들이 자신들의 근면과 성실로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주입된 능력주의의 일면이며 실상은 사회적 자원과 인적 자본의 화려한 네트워크로 인한 결과물인데도 그것을 오로지 개인의 노력으로 치부하는 것은 오늘날 금융 자본주의의 불확실성을 감추려는 노력이라 손 치더라도 그것은 실질적으로 대다수의 시민을 기만하는 행위라 여겨집니다.

그런 연유로 이 글에서도 금융 자본주의의 시대의 도래는 ˝모두가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체제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잉여 가치만을 위한 체제 우선이 금융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이익의 편중화는 더 노골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일부 시민들이 주식과 여러 금융 시장에서 기초적인 자본가의 위치를 경험할 수도 있으나 현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삶의 지표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인데요. 흔히 ˝포드에게 좋은 것이 미국에도 좋다˝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관념을 차치하더라도 1980년대 이후 소수의 자본가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오도하게 만든 자들이 너무나 많았으며, 또한 이 글 4장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이러한 주의(主義)를 주장하는 자들이 도덕적 한계 뿐만 아니라 공익을 위한 정치 마저도 제거시키기에 이르자 사실상 민주주의가 쇠퇴하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입으로는 일절 내색하고 있지 않지만 민주주의 자체를 매우 불편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자본주의적 체제 하에서 주도하는 세력 이라든지 계층이라든지 뭐라 부르던 간에 소수 엘리트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관점은 저들이 어떻게 자기들 입맛대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저자가 다시 강조하고 있듯, 시민들이 자신 스스로와 가족만을 위한 협소한 이익에 몰두하게 만들고 그것이 사회의 이익과 결부되어 있다는 식으로 오도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 왜곡된 관념이라 할 수 있을텐데요. 이렇게 주입된 소위 개인주의적 관념이 사회적 개선에 시민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하고 더욱이 여론을 파편화 시켜 시민들 내부에서 일상적으로 불협화음을 조장하게 만든 것은 고약한 현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과적으로 현재 진행된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앞선 ‘중산층 이데올로기‘로 인한 소위 일부 국가에서의 중산층 확대의 현상을 분석한 후쿠야마의 이해는 명백하게도 이들 중산층 확대로 해석되는 국가들에게서 실질적으로 ˝민주주의적 요구 또는 민주주의의 확대˝의 목소리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중산층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떨어져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생각합니다. 소위 이들 중산층에게서 사회적 맥락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객관적인 도덕적 공동체‘의 개념을 분리시키고 다수의 시민들을 일개 개인들로 파편화 시켜 오로지 자신들의 문제에만 몰입하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차별적인 자본주의의 모순을 체념하게 만드는 것으로 작용되어 왔다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금융화가 내세우는 수많은 미사여구˝는 공공의 이익을 결여한 것은 기본으로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체제를 강고하게 만들면서 어떠한 개선이나 개혁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점에서 실로 우려할 만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자본주의가 정치의 영역을 잠식시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임에도 그것에 대한 아무런 의문을 표하지 않게 되는 현 시점의 중산층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사회 이동이라는 미명하게 시민들을 근본적으로 잠식하고 조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손에 넣을 수 없는 목표를 던져놓고 다수의 사람들을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이러한 체제 자체가 시민들의 비판적 인식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다는 점에서 금융 자본주의의 대단한 성공을 축하할 만하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랜들 콜린스가 부동산 금융화에 따른 배타적 금융 자본주의를 부채질 한 것이 신자유주의였음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나는 중산층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투자 주도의 자기 결정을 가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사회이동으로 돌림으로써, 노동 가치 저하와 이러한 저하로 인한 사람들의 고충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자유주의 사상의 주류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재산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어떤 것보다 많이, 그리고 더 잘 투자하도록 유혹한다는 것이 나의 논지이다

중산층의 몰락을 진단하면서 이를 실질임금 상승의 정체, 공적 지원의 감소, 일자리의 자동화, 보건 및 교육비용의 상승, 투기적 금융과 기업 이익의 무제약적인 힘, 금융 위기에의 취약성, 부당한 수수료의 불공평한 세금 부담 등에 기인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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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5 1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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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5 19: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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