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옹호함 -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버나드 크릭 지음, 이관후 옮김 / 후마니타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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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자, 사회 민주주의자이기도 했던 버나드 롤랜드 크릭은 런던 대학을 거쳐 런던 정경대 (LSE)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은 뒤, 런던 정경대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수행하였습니다. 특히, 그에게서 ‘크리키안‘이라는 정치학에서의 학문적 조류를 선도했으며 영국 정치학 협회 (PSA)의 부회장으로도 활동한 바가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는 영국 내에서 손꼽히는 조지 오웰의 연구자이기도 합니다. 1974년에 조지 오웰의 자선전 작업을 시작하기도 하였는데요. 여기에는 정치적으로 노동당의 고문을 지냈지만 학계의 명성과 미국에서의 수많은 인용 등으로 여전히 영국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세계 2차 대전을 거치고 지성이 성숙되는 시기에 냉전을 몸소 체험하며, 정치와 자유에 대한 고유 이론을 확립시켜 나가다, 지난 2008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따라서, 버나드 크릭의 이 책은 냉전이 막 무너진 1992년에 ˝In Defence of Politics : Against Ideology, Democracy, Nationalism, and Technolog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책의 제목에 대한 간단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저자인 크릭의 이 ‘정치‘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은 이 책의 3장. ‘민주주의로부터 정치를 옹호함‘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그가 말하는 ‘정치적 가치‘는 어느 정치 체제보다 중요한 관점이며, 정치 자체가 모든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목적임을 글 전반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크릭의 이런 관점이 조금은 불편하게 여겨졌는데요.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3장에서 보여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통념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있고, 이 부분은 독자들에게 2부에서 논증하고 있는 전체주의에 대한 인식과 쉽게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소 우려스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그가 스스로 정치 행위에 있어서 강고한 윤리주의적 추종자였으면서도 4부 민족주의와 관련된 논증에 있어 사실상 시민들에 대한 도덕적 교육 내지는 도덕적 인식의 필요성을 아주 불필요하다는 관점을 내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 정치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겠느냐에 대한 노골적인 회의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 글 전체에서 보이는 크릭의 ‘정치체제‘ 자체 대한 회의주의가 설득력이 없다거나 개연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정치와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대결주의적인 해석으로 일관하는 것은 저명한 정치학자의 논법 치고는 가벼워 보입니다. 더욱이 어떤 부분에서는 체제 자체가 정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영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민주주의가 쉽게 선동이 된다는 아주 표면론적인 편견과 어느 사법 관료의 입을 빌어 ˝민주주의가 군중이 원하는 것˝이라고 인용하는 것은 비판적 인식을 선점하던 안하던 간에 마찬가지로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아주 멀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냥 일반적으로 봤을 때는 홉스로부터 시작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정치의 역할로 이해되는 이 역사적 과정은 매우 험난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날 개인의 권리가 아주 쉽게 자유로 해석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지만 자유만을 위한 자유주의 시대 혹은 자유만을 위한 정치를 옹호하는 것은 1980년대의 대처와 레이건을 통해 이미 실감나게 체험해 본 바가 있습니다. 사실상 루소로부터 시작된 자유를 위한 긴 여정은 루소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공화주의가 우리의 자유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낳게 했습니다. 이에 크릭은 ˝일반 의지의 무오류성에 대한 루소의 강조가, 그가 동등하게 강조했던 열성적 개인주의와 일관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오래된 것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합니다. 루소는 그 스스로 자발적 격리주의자였지만 그만큼 개인주의를 강조했던 점은 그의 의도를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반의지가 그가 신봉했던 개인주의를 사회발전과 정치 체제의 확립시기에 충분히 충족하지 못한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루소의 이 일반 의지가 궁극적으로 발현되는 지점이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고 이해한다면 이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에는 저 역시도 동의합니다. 크릭이 2부에서 말하는 ˝어떤 정부가 시민들이 선택한 사적인 삶 혹은 공적 영역 바깥에서 살고자 하는 적극적 권리를 부정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정치적 정부라고 할 없다˝는 점과 ˝민주주의란, 설령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동료라 할지라도,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언제 좋아하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누구를 싫어하는지, 심지어 운수노동조합 TGWU의 다수를 싫어한다든지 하는 발언조차도 허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은 마찬가지로 옹호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 부분은 저에게 있어 아주 과도하게 해석하여, 로버트 달과 지그문트 바우만을 같은 비율로 섞은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하였습니다.

사실상 정치를 왜곡한 것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는 나치즘을 비롯한 전체주의는 ˝진정한 자유란 곧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이라고 너무나 빈번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왜곡된 민족주의가 전체주의와 비슷한 맥락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정치 대 전체주의, 정치 대 민족주의에서 정치적 가치가 저들을 극복할 수 있어야 체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조차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폭력에 대한 강조˝를 통해 모든 국민을 하나의 대오로 획일화 시킨 점은 우리가 과거에서 배우고 반성해야 될 부분일 것입니다. 사실 말로는 이렇게 떠들고 있지만 ‘껍데기에 불과한 프로파간다‘를 구분해 낼 수 있는 분별력을 어떻게 시민들이 갖출 수 있겠느냐는 현재에도 중요한 기로에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릭은 이 글 3부에서 민주주의가 쉽게 선동된다는 점을 들어 결과론으로 자의반 타의반 시민의 다양한 분별력을 거부하고 있는데요. 선동 정치를 오로지 민주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너무 현실 회의주의적인 입장이라 뒷맛이 씁쓸했습니다. 선동 정치 자체를 민주주의의 약점으로 몰고가는 것은 너무나 쉽고 편의주의적인 주장이어서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거의 제시하지 못하는 수많은 정치학자들의 전철을 크릭 역시 답보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민주주의와 자유 정치의 결합에서 정당들은 곧 민주주의는 자유를 시기하며 자유는 종종 민주주의를 두려워한다는 그 유명한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는 주장은 그것에 대한 진지함을 차치하더라도 1980년 이후 경제에서 정치를 적극적으로 분리한 신자유주의자들의 매우 통속적인 주장과 그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이 인용 또한 아쉬운 부분입니다. 차라리 한 장을 더 할애해 ˝정치 vs 시장˝이라는 부분을 새로 썼다면 앞뒤 논증이 좀 더 정교해질 수 있다고 보는데, 크릭은 로버트 달에 비견되는 인식의 확장은 이뤄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제 5장, 기술로부터 정치를 옹호함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는데요. 사회학적 발전의 법칙들을 논하면서, ˝그것들은 관찰되고, 실천되고, 사회에 적용돼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가 낡은 것이고 과학이 최신의 더 필요한 가치라는 세간의 인식을 약간이나마 불식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가 이른바 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다수 지식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데요. 기술 과학이 우선되어 결국에는 사회와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테크노크라시에 대해 역시 우려할 부분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일전에 라이트 밀즈가 강조했던 것처럼 테크노크라트 자체가 과두제로 나아갈 수 있는 우려가 있다는 것은 헛된 공상이나 터무니 없는 상상이 아닙니다. 다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전반적인 기술 과학의 발전이 인류의 진보에 부분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진보 자체가 사회학적 기여가 없었다면 과학 기술의 발전 또한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주도하는 사회 기반의 여러 형태가 축적된 총아로서 기본 지식의 기여가 결국 기술로 이어진 것입니다.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소위 기술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인물들이 사회적 기여를 망각하고 오로지 기술이 홀로 일어선 것처럼 묘사하고 수긍하는 것은 매우 오만한 관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크릭은 이에 마지막으로 ˝확실히 기술적 성취 (또는 그것의 소유) 는 주권의 근대적 상징이다˝라고 강조하는데요. 이 부분도 꽤 귀담아 들을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끝으로 서두에서 제가 따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홉스는 정치 자체를 개인의 권리를 일종의 보호하게 되는 어떤 장치로 여겼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수 개인들의 권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홉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도 확실하고 (물론 존 스튜어트 밀도 함께였지만) 이를 근거로 정치의 확대라든지 정치적 가치라는 것이 다수의 사상가들을 통해 이어져 온 것은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노정이라고도 여겨집니다. 이렇게 저자인 버나드 크릭의 정치에 대한 진실된 관점은 이후 6장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반대의 무분별한 이데올로기의 맹신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치가 최우선인 시기가 분명 왔다고 볼 수는 없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이 스스로 자유주의적 가치를 표방하여 ˝자유로운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해 본다는 것은 책임감을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위대한 스승이다˝라는 관점을 끝내 크릭이 도출해 내고 있는 점은 그가 줄곧 내내 표방하는 ‘자유와 정치적 가치‘에 대한 일관된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자유를 무시하는 민주주의는 지양해야 하지만 마찬가지로 평등을 이념화하는 자유주의 역시 기피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시민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말의 회의에 대해 저는 대체로 동의하지 않으며, 단순히 민주주의가 아름답고 고명한 어떤 고차원적인 정치 체제여서가 아니라 공화주의에 근간된 민주 정치야 말로 모두의 자유와 모두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너의 그 권리를 위해 함께 싸워주겠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각자의 권리는 이웃의 권리와 함께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며, 자유 역시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보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자유 정치의 결합에서 정당들은 곧 민주주의는 자유를 시기하며 자유는 종종 민주주의를 두려워한다는 그 유명한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이런 지독한 잔혹함은 전체주의 정권에서 아주 일상적인 국가 행정의 일부였다. 그것은 드물게 나타나는 사디스트들의 황홀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 공리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거나 -후기 자유주의자들처럼 -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주의는 여러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정체성이) 명확한 정치적 신조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부정하는 많은 도그마적 요소들은, 사실 (정치로 해결해 할) 문제들을 정치의 외부에 두려는 바로 그 시도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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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5-08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월 구입 예정도서에 찜 해야겠습니다^^ 읽고싶은 책이었는데 더 궁금해지게 하시네요 ㅎㅎ

베터라이프 2021-05-08 14:50   좋아요 1 | URL
제 서평이 아주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치에 대한 개념 정리에 관해 꽤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거에요. 특히 크릭이 스스로 정치적 회의주의자라고 자임하면서도 이런 논저를 썼다는 점은 높이 사고 싶은데요. 2차대전과 냉전을 동시에 겪은 인생의 경험은 귀중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하여튼 잼나는 일독 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