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양장)
로버트 커트너 지음, 박형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의 리버럴 내지는 진보주의적 저널리스트인 로버트 커트너 (혹은 로버트 쿠트너)는 일종의 리버럴적인 가치로 공신력이 있는 전문지, ‘아메리칸 프로스펙트‘의 공동 창업자이자 공동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 오하이오 주의 오벌린 대학을 나와 버클리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는데요. 특히, 전세계적인 민주주의 연구의 요람인 영국 데모스 (Demos)에서 시니어 펠로우로 연구에 참여한 바도 있습니다. 더불어 현재는 메사추세츠 주의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사회 정책학과 관련된 강의를 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Can Democracy Survive Global Capitalism?˝ 으로 지난 2018년 미국에서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20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특별하게도 커트너의 이 글의 대한 헌사로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대니 로드릭이 글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논저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점은, 역자의 번역도 원저에 못지않게 훌륭하다는 것을 밝혀두겠습니다.

우선, 이 책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면 ˝전후부터 자본주의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파편에 이르게 했느냐에 대한 거의 모든 일례를 포함한 역사적 증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 저자 역시 책의 제목대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전지구적 자본주의화에 있어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에 대해 간략한 해답을 글에 남기고 있는데요. 그는 우리가 정신만 차리면 다시 민주주의를 회복할 수 있을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약간 무분별하게 민주주의 대 자본주의라는 논법으로 현재의 모든 문제를 치환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 8장에서 커트너는 ˝자유무역 이론의 주장과 달리, 자유시장에 완전히 의존하여 산업화된 국가는 없다˝고 단언하며, 그동안 금융 자유화를 비롯한 자본주의의 강제된 시장 자유화만이 열악한 저개발 국가의 산업화를 이끈 원동력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이것은 달리 풀어보면 온전히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자유방임주의 내지는 신자유주의의적 기조가 산업화에 이른 국가들의 번영을 이끌었던 것은 아님을 지적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자본주의의 파트너로서 민주주의가 있었기 때문에 번영의 길이 열렸던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 케인스주의에 따른 사회적 경제의 기조와 더 이전에는 사회계약에 따른 공공 정부의 의무 내지는 엘리트들의 사회적 책임감을 오래된 민주주의적 가치가 이를 알게모르게 강제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민주주의와 관련해 저자는 ˝민주주의가 파시즘의 방패막이가 되기에˝ 민주주의 자체를 시장의 걸림돌으로만 여기는 신자유쥬의자들과 나아가서는 유일신의 교조주의와 엇비슷한 자유방임주의에 경종을 올리는 점 또한 오늘날의 인류 역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지점일 것입니다. 이 부분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수많은 의견과도 동일한데요. 그런 의미에서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맹종 또한 사실상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특히, 1970년 이후 급속하게 불어닥친 신자유주의는 허무맹랑하지만 ˝노동 권력이 시장의 권력을 침해할 수 있다˝는 미명하에 벌어진 양태를 글 5장에서 이를 다루고 있고, 나아가 7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사회 민주주의의 몰락‘ 가운데, 신자유주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중도 좌파들의 터무니없는 맹종이 자유 시장이라는 경제적 이행을 다수의 시민들이 속절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러 이를 비판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전에도 종종 밝혔던 대로 샹탈 무페가 강조한 것처럼 ‘이 좌파들의 몰락‘이 신자유주의적 주입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사회 문제들의 사실상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겠습니다. 결국 이러한 논의 가운데 이 전지구적 자유화의 파고에 대응하기 위해 ‘우파가 아닌 좌파 포퓰리즘 혹은 진보적 포퓰리즘의 행동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는 것‘에 저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듯이, 레이건과 대처에 의한 ‘대안이 없다‘는 식의 전환이 가깝게는 노동계층의 무력화와 멀게는 정부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의무에 대해 쓸모없다는 식으로 치부된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과정을 역사적 증거와 불균형적인 정치적 이행들로 가감없이 마찬가지로 글을 통해 인식시키고 있습니다. 사실상 노동 계층의 구매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도출했던 노동 전반의 사회적 퇴출이 고학력자의 이익을 신자유주의가 철저히 보장했던 것과는 달리 노동계층과 중간 계급의 이익은 스스로의 자구책으로만 전가되었습니다. 커트너 역시 앞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사회계약에 따른 사회 보장과 정부의 공공성˝은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꽤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가치였습니다. 철저한 자유 방임이 이와는 전혀 반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이 시장 자유가 누구의 이익이 될 것인가는 아주 명백합니다. 바로 이 글의 4장과 5장은 이를 논증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가 유일하게 성공한 것은 상위 계층의 이익을 아주 절실하게 대변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대처 집권기의 영국 정치가 루퍼트 머독과 같은 자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과 개혁이 일반 시민들의 권리와는 매우 상충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이를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단순히 공공의 이익과 사익을 비교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동안 사익이 이 신자유주의 밑에서 공공의 이익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현재의 사회적 파행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인 프레카리아트 현상‘을 말하는 것이며, 전반적인 케인스주의의 후퇴 내지는 철회로 그 이익을 숱하게 얻은 글로벌 부유층들의 존재 유무일 것입니다. 이 막대한 부유층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벌이고 있는 수많은 행적들이 탈세와 허위 신고 및 자산 유출 등과 같은 반사회적인 행위 자체가 공공성과는 완전 다른 대척점에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단순히 반자본주의적 입장이나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를 밑도 끝도 없이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수많은 학자들이 강조하는 것과 같이 모두가 누려야 할 사회적 자본을 자신들의 부와 이익을 위해 가감없이 사용한 일부 계층의 행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민주주의의 쇠퇴가 초래한 것은 미국과 유럽의 극우 정치와 우파 포퓰리즘입니다. 소위 대안 우파라 불리우는 자들의 행태와 트럼프를 꼬집어 저자가 ‘가짜 포퓰리스트‘라고 언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이득을 취한 자들이 이런 정치의 쇠퇴와 사회적 붕괴를 진정 바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들의 사회적 이익을 위해서도 이러한 포퓰리즘의 대두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특히, 이와 관련해 1장에서 기업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등장한 대중 정치 자체가 지금도 파편화에 이르고 있으며, 이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정치 집단의 등장은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를 한 무더기로 뭉뚱그려 자유 시장에 의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로 모조리 국한 시킬수는 없겠으나 극단주의자들과 정치적 선명성과는 거리가 먼 포퓰리즘을 잉태하는 토양을 만든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시장과 정치가 무슨 연관이 있어 이렇게 과도한 해석을 하느냐 할 수 있겠으나 정치의 실패는 무분별한 시장의 권한 확대와 관련 있으며,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의 부패 내지는 시장에 있어서 민주적 통제의 실패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2008년에 있었던 금융 자본의 사기 행각은 일종의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초래했지만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전통적인 자본주의자들에 의한 금융 자유화에 대한 경고를 한 귀로 흘려들은 것입니다. 특히 저자는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요. 금융 자유화를 원했던 그룹과 지지자들은 은행들의 방만한 경영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실물 경제에 있어서 은행의 이 아슬아슬한 칼춤을 뭔가 혁신이라고 보기보다는 불안정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이후, 은행에 대한 규제가 미국 행정부에 의해 마련되었지만 금융 자유화 자체가 아마게돈이 될 가능성은 아직도 현존합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에 의해 이 금융 자유화에 대한 경고가 숱하게 있어 왔는데요, 금융 자체가 자본주의의 아름다운 꽃이라는 통화주의자들과 자유 방임주의자들의 논법이 경제 자체를 나락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존 IMF의 설립 의미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은행에 대한 규제나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견제를 반자본주의나 자본주의를 배격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몇번이나 강조해도 부족한 부분임에도 많은 이들은 이를 가볍게 생각합니다. 시장 경제의 뿌리 자체가 몇몇의 손안에 들어가 있는 상황을 우리가 여실히 비판해야 하며, 이제는 민주주의가 제 목소리를 내는 일련의 개혁의 길을 모두가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약간 궤를 벗어나는 얘기지만 현재의 중국 경제를 ‘중상주의‘로 이해하고 있는 저자의 평가는 실로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없는 중국 경제를 그저 중상주의로 표현한 것은 너무나 그에 부합된다고 여겨졌습니다.


-104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 꼼짝없이 9시간을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오랜만에 책에 대한 흡인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을러진 나머지 너무 오랜만에 책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꽤 오랫동안 커트너의 이 글이 기억에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우파의 광범위한 공격에 저항한 대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시장이 더 진보한 기술과 교육 수준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보상을 한 반면 기계나 역외의 더 싼 노동력에 이해 수행될 수 있는 일자리를 가진 평범한 노동자들은 밀려났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소득을 상층으로 이전시켰다는 한 가지 점을 제외하고는 경제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과거의 유럽 좌파는 신자유주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지구화 된 금융은 이러한 사기적인 금융 공학의 시녀였다

자유 무역 이론의 주장과 달리, 자유 시장에 완전히 의존하여 상업화 된 국가는 없다

대처 시대의 규제 완화, 민영화, 반노동조합 정책은 계속되었다

중국의 중상주의를 용인한 것이 더 이상 국내에서는 별로 생산하지 않으면서 중국과 광범위한 역외 제조 동반자 관계를 누리는 미국 국적 기업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알아채기 전까지,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미스터리였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풍오장원 2021-01-21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야 할 책인듯 합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베터라이프 2021-01-21 11:45   좋아요 1 | URL
오랜만이시네요 ㅠㅠ 이 책은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가격이 사악해서 아주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오랜만에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읽었던 것 같아요. 하여튼 건강하게 잘 지내시죠?

추풍오장원 2021-01-21 18:27   좋아요 1 | URL
하루하루 무료한 일상입니다 ㅎㅎ 사악한 가격이지만 구입할 만한 책인듯 하여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