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다수의 프랑스인들에 의해 빅토르 위고와 버금가는 소설가로 일컬어지는 파트릭 모디아노는 프랑스의 저명한 문학상인 콩쿠르 상의 수상을 거쳐 2014년에는 끝내 노벨 문학상까지 거머쥐기에 이릅니다. 그동안 문학계에서는 그의 작품들과 관련해 탁월한 스토리 라인과 더불어 훌륭한 인물 묘사라는 평가를 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이 작품 이전에도 몇몇 작품이 평단의 반향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아 앞선 설명은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특히 이 작품의 번역은 알베르 카뮈의 번역으로 유명한 김화영 교수가 맡은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판본 역시 바뀔 때마다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아온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Rue Des Boutiques Obscures˝로 1978년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1990년 이전에 판권 없이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오다 1990년대에 정식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제가 구매한 판본은 양장본 개정판으로 지난 2010년 번역 출판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기 롤랑은 자신의 뇌리에서 사라진 1943년부터 1955년까지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자 자신을 구해준 은인인 콘스탄틴 폰 위트와 함께 일한 지난 십 년간의 흥신소 생활을 청산하게 되는데요.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과거의 단초를 추적하는 것으로 그 의미심장한 행로가 비로소 시작됩니다. 점차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주인공이 스파이 내지는 살인면허를 가진 정부쪽의 암살자로 추측되었습니다만 과거의 정확한 직업과 하던 일이 다소 베일에 가려져 있음에도 히트맨이라는 가정은 거의 터무니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중간에 파리에서의 행적을 뒤쫓아가는 장면에서 이런 저의 억측이 꽤 신빙성있게 느껴졌습니다만 비시 정부 당시의 프랑스 정보를 수집하는 남미의 외교관이라는 설정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이와같은 맥락과 동시에 주인공을 포함한 5인방의 행적이 마지막 스위스 국경지대와 가까운 휴양도시 므제브에서의 불확실한 결말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스토리상의 큰 흐름에서 자신의 진정한 이름과 신분을 찾고 왜 그가 12년간의 기억상실증에 걸렸는지 대략적인 원인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럽 각지에서 모인 이 5인방이 불안한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스위스 국경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는지 그러한 시대적 배경이 앞선 부분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죠. 자포자기하며 보내고 있던 당시 프랑스 유력 가문의 출신들의 패배감이랄지, 그저 매일매일 단조로운 유흥이나 사소한 즐길거리에 정력을 소진할 수밖에 없는 패배한 프랑스와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라는 배경은 실로 감정이입이 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당시 파리에서의 삶이 여성들에게 있어서 불확실성의 연속이라는 것을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소득이라고 할 만합니다. 불안정한 시국에서 버팀목이 될만한 남자를 찾거나 아니면 아예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이 제법 안타깝게 여겨졌는데요. 물론 파티 놀음에 치중하게 되는 남녀 불문한 사람들이 일정 부분 묘사되기도 합니다만 전반적으로 그 시대의 많은 프랑스인들에게는 거창하게 말할 필요도 없이 허무주의의 덫에 빠진 무력한 생쥐와도 같은 하루하루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구조적인 측면은 훌륭한 소설의 르포르타주 기법으로서 일견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중반 이후부터는 어떤 결말이 놓여져 있을지 견디지 못할 정도로 다급해지기도 했는데요. 특히, 주인공과 구도상 연인이라고 봐도 무방한 드니즈와의 예견된 이별이 어떤 연유로 벌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결말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는 다소 어이가 없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상황에서 보이는 주인공의 독백이 전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순간 스스로 미심쩍음을 인지했음에도 행동에 나서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끝으로, 원문의 충실한 번역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인종적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비하가 인물 묘사의 틀로서 등장하고 있는데요. 과거 제국주의 시기의 탈각되지 않은 인종주의의 영향을 작가가 담아내려고 했을수도 있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그외에도 감상적인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주인공과 드니즈와의 엇갈린 삶에 대해 마음이 아팠는데요. 마지막 부분에서 프레디와의 만남을 목전에 두고 있는 주인공의 하릴없는 마음과 드니즈를 잃고 나서 받은 충격이 몸에 깊은 각인을 남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진정한 사랑은 그 묘사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본질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주인공의 기억상실 원인은 작가가 교묘하게 열린 결론으로 설정해 놓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드니즈와의 그 황당한 이별이 큰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여자가 나에게 이 질문을 어쩌나 강요하는 듯한 어조로 물어왔는지 나는 처음으로 절망감에, 아니 절망감보다도 더한 감정, 모든 노력, 모든 유리한 점, 모든 선의에도 불구하고 넘을 수 없는 장애물과 부딪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느껴지는 그런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 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반 알렌은 여름 컬렉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는 과연 또 여름 같이 돌아올 것인가에 대하여 의심스러워하고 있었던 터라 그토록 대단한 낙관주의가 매우 놀랍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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