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이 돌아온다 - 공공적인 것의 귀환을 위하여
댄 하인드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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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언론인으로 특히, 언론 개혁과 관련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댄 하인드 (혹은 댄 힌드)는 전작인 논저 ‘이성에 대한 위협 The Threat to Reason‘으로 영국 보다는 미국에서 큰 관심을 받은 바 있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하인드와 관련된 학력과 기타 정보를 찾기 위해서 구글에서 검색을 해봤지만 위키 백과에는 그의 정보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개인 트위터 계정과 몇장의 사진은 구글에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하인드와 관련해서 개인적으로는 시민의 적극적 언론 참여라고 볼 수 있는 ‘공공주문취재 제도‘가 눈길을 끌었는데요. 이는 시민이 기존의 언론과 별개로 개방성과 공공성을 목표로 적극적인 취재 활동에 대한 취지 등을 담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인드의 이 글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공중‘과 관련해, 얼마전에 서평을 쓴 존 듀이의 ˝현대 민주주의와 정치 주체 문제˝의 현대적 버전의 보론이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원제, ‘Return of the Public‘으로 지난 201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2년 3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근래, 대중 정치와 관련해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공중 The Public‘과 관련해 저자는 라이트 밀스의 독착정 개념인 ‘대중 The Mass‘와 ‘공중 The Public‘을 통해 우리가 궁금해하는 공중에 대해 대략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밀스가 해석하는 전자의 대중은 기존의 엘리트체제에 적극적으로 동화되어 공공성을 잃어버린 일반 대중들을 뜻하고 후자의 공중은 자신의 이성을 바탕으로 사회와 체제에 관심을 두고 공공성을 추구하며, 최종적으로는 모두가 바라는 정의로운 사회에 목표를 두고 있는 계몽된 대중입니다. 저자인 댄 하인드는 이 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공중‘을 바탕으로 기존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쳐온 현재 언론의 대체물이 될 수 있는 개혁의 실마리까지 잡는 것으로 논증 가운데 이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즉, 1부는 과거 인류의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시민과 이들이 주체가 된 정치 관념에 이르는 고대 로마부터 현대에 이르는 정치적 과정을 살펴보고, 2부는 앞선 1부 5장에서 논의된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퇴락한 공공성과 그 가운데 발생한 개인들 간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와 도를 넘어선 민영화의 이행을 바탕으로 어떻게 오늘날의 정치가 상업주의의 근간에서 어떻게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렸는지에 대해 논하고, 3장은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 가운데 어떻게 하면 다시 공중을 되살리고, 언론이 과거 토크빌이 강조했던 바와 같이 어떻게 하면 ˝다시 건강한 민주주의의 조건˝으로 회귀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현실적 방안을 살펴보는 것으로 하인드의 이 글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 자크 루소의 ‘인간의 이원적 본성론인 인간의 욕심과 정의감‘ 과 임마누엘 칸트의 ‘인간의 사적 이성과 공적 이성이라는 구분‘으로 대다수의 인간은 3부에서 저자가 확언하는 바와 같이 ˝누구나 정의로운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길 바란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굳이 전제 왕권을 교수대에 보냈던 지난날의 영국이나 베르사유 궁전의 주인을 단두대에 보낸 지난날의 프랑스인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꼭 인간에 대한 계몽주의의 반사적 혜택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이성과 감정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굴레를 벗어왔습니다. 바로 1장은 이러한 인식 가운데 시민과 공화주의를 시작으로 ‘정치적 인간사‘의 일면을 살펴봅니다. ˝신경증에 가까운 경계심은 공화국 시민의 자연스러운 상태다˝라는 당시 자유에 대한 일념과 이를 성공적으로 쟁취하기 위해 광범위한 연대에 나섰던 시작점을 저자는 언급합니다. 뒤이어 이러한 공화주의를 시작으로 현대에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했음에도 자본의 영향력에 놓인 다수의 시민들에게 경제적 생존권이 정치적 자유와 정치적 신뢰와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한 것은 차차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다수의 시민들이 이러한 배타적 경제적 이행과 관련해 저자인 댄 하인드는 한가지 색다른 의견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놓인 처지에 더욱 불만을 느끼게 마련이다˝라는 주장입니다. 사실 몇 번이나 뇌리에 되내이면서도 왜 시민들은 이렇듯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이 글의 3부에서 ˝주요 언론매체에 의존하는 대다수 국민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빈부격차, 세계무역 불균형, 그리고 최근 금융위기의 주범은 금융규제 부재가 완전히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들어보지 못했다˝고 단언하는데요. 외형적으로는 언론에 화살을 돌리고 있지만, 같은 장에서 일반 시민이 세계의 진실을 강구하기 위해 스스로 진실을 찾아야만 한다는 일련의 논점에 저자는 일단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면서 왜 시민들이 결국에는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되는 종착점에 이르는 이러한 노정을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만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칸트는 ˝우리가 국가를 포함한 사적 기관들이 부과하는 제약을 극복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소통할 수 있을 때에만 계몽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처럼 이것에 이르는 과정은 오로지 일개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즉, 앞선 1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자유인은 공동으로 한 국가의 주체를 이루어 집합적 의지를 행사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다˝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체제에서 자신의 자유와 사회의 정의를 위해 ‘다수의 자유인들‘과의 연대는 중요하며, 각자는 정치와 정치인들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을 갖는 동시에 쉴새 없이 자신의 입을 여론의 도구로 삼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3부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뒤로하고 ‘사심없는 정의에 이르는 길‘을 논하고 있습니다. 앞선 루소의 말대로 인간은 개인의 이기심과 더불어 정의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엘리트 계급은 피지배자의 동의에 기반을 두는 정부라는 존 로크의 사상을 수용하고 나면 새로운 감수성을 갖추고 등장한 공중의 판단을 무시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공중의 의견은 압도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고 이와같이 밝힙니다. 그동안 대다수의 엘리트 계급과 이들의 이익에 적극 수렴한 지식인들은 ˝대중은 ‘무의미한 존재‘이다˝라고 설법해 왔습니다. 더불어 소수 기득권층과 이 엘리트들은 대중이 주도한 정치가 종래에는 군중정치로 파급될 가능성이 있으며, 좀 더 면밀한 이성과 합리적인 주도력을 가진 엘리트들의 판단을 대중은 믿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소위 다수의 ‘언론‘을 통해 이러한 인식을 퍼뜨린 바도 있습니다. 더욱이, 지난 1980년대 이후로 ˝국가는 시장의 작동에 감히 제한을 가할 수 없었다˝는 지난 신자유주의의 우울한 음영이 지금까지도 정치는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을 재계와 금융 엘리트 들에 의해 주입되어 왔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아야 할 명백한 사실은 바로 무식하고 쓸모없는 대중으로부터 시작되는 이러한 왜곡된 인식을 무너뜨리고 각자 모두가 정치적 및 경제적 자유를 갖고 있는 자유인임을 명백히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인드의 글을 통한 저의 이러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공화주의 전반의 가치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퇴색되어 버렸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가 ˝정치인들에게 공공성을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로부터 시작된 경제 전반의 정치에 대한 불신과 쓸모없음은 그로부터 어떤 자들이 이익을 얻었는지에 대해 숙고해 볼때 그 결론은 아주 명확합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무슨 만고의 진리이자 불변의 진실인양 받아들이는 요즘의 세태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대체 인류의 역사에서 경제가 인류의 태동과 더불어 발생했다고 철썩같이 믿는 사조˝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 바가 있습니다. ˝고도로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과연 공정하게 이성을 발휘할 것인가˝와 더 나아가서는 이들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공공성과 공공의 이익을 보존하고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관대한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정부-시장-언론에 이르는 이 견고한 삼위일체가 소위 ˝합리적 이성과 그에 따른 소수의 이익˝으로 귀결되었다면 이제 이 시점에서 시민인 우리가 다시 ‘공중‘이 되어 이러한 시스템에 대해 반기를 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에서 살고 싶은 아주 기본적인 욕구에 대한 대답˝이며, 이 책의 저자가 스스로 언론계의 개혁을 통해 근본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과거에 스치듯 지나가며 봤던 어떤 이의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에 반하거나 배신을 한 것은 아니다‘라는 단언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저는 하인드의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적 이익을 좇다가 붕괴 직전에 놓인 금융 시스템을 국가가 구제하는 순간, 정책 수립에 있어서 일반 대중의 의미 있는 역할을 부인하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에게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자는 결국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불의에도 눈 감는다

현 시대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칸트가 말한 의미,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적으로 이성으로 발휘할 수 있을지, 즉 어떻게 사심없는 개인으로서 타인과 성공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성을 발휘할 것인지에 대해 숙고하라고 촉구한다

공중에 봉사한다는 공공 서비스 정신은 점차 그 내막과 동기가 불분명한 ‘국가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변질되어 갔다

신자유주의에 적극적으로 영합한 영미의 군산복합체는 정부 고용, 로비 활동, 기업 경영, 개인에게 유리한 순환계로 이해된다

과거 조지 W. 부시 정권은 핵 테러 위협으로 사회적 히스테리를 조장하고, 불안감 해소용 선입관을 꾸준히 만들어내 국민이 진실을 못 보고 화려한 총천연색의 도덕적 감상에만 젖어 국가가 하는 일을 긍정하게 만들었다

신자유주의 교리는 온갖 진지한 외양을 갖추고 국민에게 반복적으로 주입되었다

미국에서는 공화 민주 양당에 대한 오랜 재정 지원을 통해 재계는 정치 논쟁이 일정한 선을 넘치 못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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