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존엄에 대한 요구와 분노의 정치에 대하여
프랜시스 후쿠야마 지음, 이수경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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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역사의 종언’ 내지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구절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프랜시스 요시히로 후쿠야마는 일본계 미국인 3세로 과거 첨예한 냉전시기에 견고한 자유주의라는 프레임으로 자유진영의 사상계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헨리 키신저와 후쿠야마를 자주 비교해서 보기도 하는데요. 특히 후쿠야마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당시 지대한 영향을 끼친 네오콘들이 자주 인용하고 학문적 영향까지 받은 산파로도 매우 유명합니다. 사실 후쿠야마가 네오콘들의 각광을 받는 것에 대한 어떤 개인적 소회를 피력한 바는 없었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사소한 조언이라도 했던 것을 보면 그런 인정에 대한 그의 감정을 잠시나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는 코넬대와 하버드 그리고 스탠포드를 거치면서 국제 정치경제학과 국가 발전학과 관련된 연구를 지속해 왔고 관련된 많은 저작들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아주 간단히 그를 설명한다면 미국 자유주의 보수 우파 지식인들 가운데 꽤 중요한위상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책은 지난 2018년 원제, ‘Identit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출판한 곳 때문에 잠시 구입을 망설였는데요. 먼저 원서를 구입해서 읽어봐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번역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곳은 없어보였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번역된 책 제목과 관련된 부분인데요. 다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후쿠야마의 이 책은 현재 미국의 진보에서 집중하고 있는 정체성 정치 및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다 후쿠시마는 예상외로 신자유주의 여파로 인한 불평등 문제에 대해 눈을 감고 있지는 않습니다. 뭐 소위 ‘레이건과 대처의 신자유주의 혁명’이라고 이상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그만큼 비판적으로 읽어야 될 부분은 분명 있어보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그의 이 글 전반은 꽤 논리적 근거가 있고 전개 자체는 거의 미려하다고 봐도 될만큼 문장의 가독성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유주의 우파의 지식인인 것만은 분명하게도 11장에서 밝히는 ‘진보주의 세력의 한계 내지는 이론적 근거의 불명확성’은 꽤 교묘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의 공화당이 티파티 운동과 같이 극단적으로 변화되고 있음에도 반대편도 사실상 마찬가지였다는 양비론적 근거는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는데요. 전세계를 포함해서 진보좌파가 사실상의 지리멸렬한 상황인데 이 한줌 안되는 이들이 어느 정도로 극단화가 이뤄졌는지에 대한 근거가 희박하며, 더욱이 과거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혁명을 외치는 진보 좌파는 거의 없다고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미국의 진보주의에 이런 혁명 분자들이 있을지는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후쿠야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경제 성장의 수혜를 받은 것은 주로 고학력 엘리트 층이었던 것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물론 앞서 언급해 드린대로 레이건과 대처의 신자유주의 혁명과는 다소 매치가 안되는 설명이지만 심각한 불평등 문제를 인지하고 (하지만 인식에 대한 약간 다른 관점을 보이지만) 경제적 수준의 극단적 상황을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어지는 논리적 전개로 9장 ‘보이지 않는 인간’에서 “존엄과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라는 존엄성의 문제로 이 경제적 불평등을 그는 해석하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경제적 불평등의 그 현안의 문제보다도 그것을 통한 자신에 대한 비참함과 “가난한 것은 곧 다른 동료 인간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과 같다”고 주석을 덧붙이기도 합니다. 또 여기에는 다음 10장, ‘존엄성의 대중화’에서 과연 존엄성이 일반적으로 대중화되는 것에 대한 어떠한 영향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주저하고 있습니다. 물론 10장의 결론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이 하나의 ‘개인’으로서 갖는 존엄성을 평등하게 인정하는 전제로 한다”는 자유주의 보수주의자들이 보이는 꽤 광범위한 인식을 깔고 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후 현재 미국의 정체성 정치를 논하는 11장과 12장을 거치며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를 서로 연계시키는 인상을 다소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전개 과정에는 초반 1장과 2장을 거치며 루소와 헤겔 그리고 투모스라는 개념을 통해 원래 인간 본성에 대한 이론이 “각자가 속한 다양한 공동체의 규범 및 관습에 뿌리를 둔 특성이 아니다”라는 점으로 규정하고 그가 밝히는 바대로라면 현재 사회를 구성하는 각 개인들의 경제적 요구와 그 인식적 판단에 따른 여러 정치 행위들이 그 자체로 경제적 자원 문제와는 무관하며, 바로 여기에는 이 존엄성 개념과 존엄성 정치가 기반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된 논의들을 조합해보면 현재의 이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인간성의 상실은 불평등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로인해 초래되는 인간 존엄성의 상실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존엄성 개념을 가지고 현재의 도널드 트럼프의 나르시즘과 그로 인한 포퓰리즘 정치를 해석하는 수단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이 부분은 먼저 11장과 12장에 논의되는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트럼프는 기존의 미국 정치 무대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후쿠야마의 표현대로라면, “각 개인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사견으로 히틀러의 나치즘을 찬양하고, 흑인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피력할 수도 있지만, 정치인이 그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미국 헌법의 평등의 문제에 위반되는 것으로 그는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이런 인식의 차원에서 고찰해보면 현재 트럼프의 진면목은 정치인이 공적 무대에서 해서는 안되는 언행을 아주 여실히 해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을 그의 지치층들은 속시원하다 혹은 솔직하다 라고 여기고 있지만, 이것 자체는 미국 정치의 후퇴 정도가 아니라 매몰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혹자들처럼 트럼프의 언행과 정치 과정을 “불량배 정치”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정치인의 급과 도를 무슨 도덕주의적으로 언급하기 보다 과거 18세기 계몽주의가 발전시킨 정치 발전 과정에서 이러한 반문명의 (정치적) 잔재물들을 제거하기위해 노력했던 것에 대한 사실상의 반동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이러한 트럼프의 언행과 정치 발언에 대해 그의 지지층들이 자신들의 존엄을 간접적으로 회복하는 일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포퓰리즘 정치 전반이 후쿠야마 역시 (약간 애매하지만) 인정했던 민주주의적 다원주의에 위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를 통해 포퓰리즘과 전체주의가 한 배를 갖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뜬금없게도 후쿠야마는 이런 트럼프에 대해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자기 진실성이라는 윤리를 완벽하게 실천하는 인물이다”라는 표현은 그가 14장의 대미를 장식하는 “정체성 정치가 오늘날의 포퓰리스트 정치를 치료하는 해법일 것이다”라는 것의 모순된 자기 부정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다시 11장에서 후쿠야마가 비판하는 진보 세력에 대한 비판은 다소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일부 진보 세력에게 정체성 정치는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돼온 30년간의 추세를 반전시킬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대신하는 편리한 대용물이 되었다”는 평가는 딱히 부정할 만한 곳이 없었는데요. 후쿠시마는 미국 헌법의 자유주의 정신을 먼저 언급하면서 흑인에 대한 인종적 수사나 나치의 히틀러를 찬양할 개인적 권리들을 갖고 있다고 보았지만, 이 뿐만 아니라 동성애와 페미니즘 운동 등과 같은 부분에서도 수많은 보수 우파들과 전통주의자들이 이들에 대한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비난을 해왔던 것을 우리가 양극단의 첨예한 정치 갈등을 눈을 감고 그냥 개인적 차원의 자유 발언 권리에만 집중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들기도 합니다. 현재의 미국 정치가 정체성 정치 및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경직성에 매몰되어 정치인들을 비롯한 정치에 참여하는 수많은 시민들의 발언의 주저를 그는 언급하는 듯 합니다만 앞선 동성애와 페미니즘에 대한 뿌리깊은 경멸과 혐오를 감안한다면 이에 대한 발언의 신중은 꼭 필요해 보입니다. 뭐든지 새로운 정치적 행동과 인식이 도입될 수록 그것에 대한 거부는 항상 있어왔으며, 대다수의 민주주의적 다원론자들은 열린 다원주의 사회를 위해 모두가 존중받는 구성원으로서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후쿠야마 역시 10장에서 “개인 해방이 행복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대신에 강한자가 약한자를 억누르고 지배하는 탈 기독교시대의 도덕 체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일반적인 사회의 도덕 체계는 반드시 필요하며, 도덕적 가치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개별 사항에 대한 한쪽의 우선만은 이것이 사활적 문제가 아니라 공개된 수준에서 논의가 진행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다시 한번 후쿠야마가 진단한 오늘날 좌파들의 문제는 “그동안 특정한 형태의 정체성들에 초점을 맞춰오며 노동자 계층 또는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이들과 같은 커다란 집단을 중심으로 결속을 강화하는 대신, 특정한 방식으로 소외된 점점 더 작은 집단들에 집중해온 것이다”라고 그 한계를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후쿠야마가 그동안 이행되어 온 신자유주의적 결과에 대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어느 정도 개선의 필요성이 있다고 여기는 듯 했으며, 미국 정치 전반에 있어 포퓰리즘의 대두와 나르시즘 정치에 대한 우려를 분명 이 책을 통해 밝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가지 통찰들도 분명 있었는데요. 우리의 계몽주의적 공화정치에 기여를 해 온 장 자크 루소와 관련하여, “외부 사회의 관점 및 공통된 규범 보다 개인의 주관적인 내면을 더 중시했던 장 자크 루소가 있다는 점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언급은 꽤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사실 루소가 개인 스스로 외부와 단절된 사색적인 삶에 대해 집중했던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사회 계약과 정부의 수립이라는 우리의 개별적 권리들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그의 주장들이 오히려 홉스가 바랬던 “도덕주의적 공동체 이익의 실현”과 토크빌의 “이기적인 개인들의 출현”에 대한 경계가 어떻게 보면 루소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다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앞서 제가 언급한대로 저자는 꽤 교묘한 근거와 그에따른 논리의 함정이 있어서 이에 대한 독자들의 정확한 일독이 무엇보다 필요해 보입니다.


“개인들은 종종 경제적 곤경을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정체성 상실이라는 의미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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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04-30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후쿠아먀는 역사의 종말로만 알고 있었는데 주목할 만한 책이네요. 후쿠야마의 통찰에 대해서는 좀 의심스러웠는데, 베터라이프님의 리뷰 덕에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베터라이프 2020-04-30 19:20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확실히 후쿠야마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어느 정도 보이긴 합니다만 (물론 이념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논의에 대해서는 보수적 자유주의자의 논법이 분명이 있으며, 본글에서는 탈기독교주의에 대한 여파와 인식에 대해서도 약간 애매한데요. 탈기독교주의에 따른 도덕주의의 쇠퇴인지인지에 대해 명확하지 않은 측면이 개인적으로는 보이더군요. 기존의 좌파에 대한 비판도 일정 부분 들을만한 부분도 있었지만 우파와 좌파의 양극단이라는 논법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저도 이 참에 후쿠야마에 대해 좀 더 글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 하여튼 오랜만에 뵈어서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