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
로베르트 미지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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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이 글의 저자 로버트 미지크는 1989년 ‘아르바이터 차이퉁’을 거쳐 92년부터 97년까지 프로필의 독일 베를린 특파원을 역임한 좌파 언론인입니다.또한, 그 이후에도 팔터, 프라이탁, 융에 벨트, 노이에 도이칠란트,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및 자이트 지에 기사와 칼럼을 기고 하는 등 오스트리아와 독일 양국에서 비판적인 언론인으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흔히 좌파 지식인이라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던 분야인 비디오 블로그에 자신의 정치 비디오쇼인 “FS 미지크”를 운영하고 있기도 한데요. 스스로를 말하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성격이라고 겸손을 담고 있지만,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대로 지식은 단순히 앎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에 그 스스로 몸소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저에게는 미지크와 관련해 얼마전 “고장난 자본주의”에 이어 두번째 서평이기도 한데요. 구글에서는 오스트리아에 출판된 그의 책이 여럿 검색이 되는데, 조만간 그의 다른 책도 국내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Was Linke Denke”로 지난 2015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6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저자인 미지크가 책의 결말에서 이 책의 취지에 대해 “좌파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로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국문으로 번역된 이 책의 제목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는 상당히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 제목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오만하게 느껴질 수 있기도 한데요. 물론 독자들의 눈에 쉽게 들어오게 하려는 의도야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이런 시도는 조금 지양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다시 본래 글로 들와서, 저는 여기에다 “소위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좌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좀 더 드러난 의도라 여겨집니다. 아주 단순한 구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구체적 담론을 드러내는 매우 진지한 논저라기 보다는 ‘좌파의 생각’ 그리고 이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사고, 인식 등이 꽤 단순하고 설득적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지크 본인 뿐만 아니라, 번역가의 노력도 이에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래서 번역 역시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세계의 자본주의가 최근 한차례의 심각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경제적 이데올로기와 체제로서 대안이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신자유주의와 한몸이 되면서 이 틈에 정치가 들어올 자리는 분명 없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마거렛 대처의 말대로 “대안은 없다”는 식의 맹목주의적 믿음이 과연 모두에게 합당한 결과를 낳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이 신자유주의적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기 위해 진보주의와 좌파의 지리멸렬이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연유에는 아마도 샹탈 무페의 “좌파가 일반 시민들과 유리되어 있었다”는 해석대로 그 원인의 일부가 설명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 미지크는 “1980년대의 좌파에 경도된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은 스스로 의문을 갖고 수많은 서적을 읽으며, 사고를 확장하고 사색하는 일에 몰두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사회에 해악이 되지는 않았다”고 돌아보고 오히려 이러한 학생들은 분명 소수였지만 주변에서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고 그는 회상합니다. 더불어 “생각과 이론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우리가 계속 깨어 있도록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그즈음 도래한 포스트 모더니즘에 분개하고, 다 같이 치열하게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했으며 그것이 사회와 지배논리에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의 모습이기도 했다고 돌이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미지크는 우리의 자본주의가 모두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나아갔고 어떤 부분은 후퇴했다고 특히, 좌파는 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오늘날 내면화된 자본주의가 개인의 창의력과 성취욕, 개성에 있어 이바지한 부분은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식대로 냉전 이후의 세계 유일의 무결점 이념이라는 식의 해석은 물론 과도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애초에 우리가 좀 더 건전한 자본주의를 기대한다면, 미지크의 주장대로 “좌파에게도 적당한 표를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겠죠. 그전까지는 많은 좌파는 혁명 담론에 매몰되어 현실적으로 거의 가능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다른 좌파와의 갈등도 심화시켜 왔습니다. 수많은 연결된 시민들과의 연대를 그동안 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들이 존재합니다만 1장에서 표명한 대로 좌파가 여러 사람들과의 연대에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 점은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와 연계해서도 매우 중요한 행동 양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의 의견 교환이 구시대물이라고 하지만, 이미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세계에서 토론하고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온라인상에서의 수많은 사람들과의 연결 만큼이나 오프라인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끊임없는 의구심과 의문을 갖고 많은 지적 탐구를 병행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부속품’이 되지 않는 길임은 명확해 보입니다.

다음, 우리의 비판, 좌파의 비판은 이렇습니다. 저자인 미지크의 말대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반대하기, 흠잡기를 일컫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방식의 해부, 개념에 대한 분석, 전제 근거와 비난에 대한 분석, 숙고와 이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오로지 비판만 있었으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패착이 숨겨져 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에 근거한 이런 비판 인식이 자본주의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선명성을 견지하는 좌파들의 도덕적 측면’이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우월감을 가져다 주웠을 뿐, 좌파 자체가 시민들과 괴리되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우리의 노동을 어떤식으로 규정지어야 할지에 대해 폭넓은 의견 제시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개개인의 개성의 표출이라는 명목으로 과도한 소비 지상주의에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하지 못했던 것은 ‘좌파의 정신’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들 주변에서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만드는 증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시민 개개인들의 삶이 전체적인 체제의 측면에서 ‘품위있는 삶과 마땅한 행복 그리고 도덕적 건전성’을 마땅히 답보해야 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프레카리아트’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당시에 좌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역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지크가 강조하는 대로 푸코가 우리가 얼마나 권력에 취약한지에 대해 예견했던 것은 뭔가 계시로까지 여겨지기도 합니다. 자본주의가 있는 그대로 여러 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체제의 권력과 또한, 그 체제의 권력 마저도 누가 휘두르고 있는지 불명확한 시대에 우리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권력에 대한 사안은 매우 복잡하다”는 그의 평가는 이렇게 정확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권력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는 찾을 수가 없으며, 마땅한 시민의 권력을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트들의 야합에서 빨리 되찾아야만 하는 당위를 이 글 6장과 7장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인간 소외’를 좌파 역시 짐작해 냈지만,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스스로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심각한 인종주의적 오류에 빠져 있었고, 자신들의 역사 이외에는 다른 역사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격이기까지 했는데요. ‘이 겹겹으로 축적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히려 인간 소외와 식민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화해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봤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화해는 이처럼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고 봐야하겠죠.

이처럼, 좌파가 관심을 가지로 지켜봐야 될 사회의 여러 이면은 아직도 많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이 글의 결론에서 “의문을 품으며 우리는 전진한다”는 끝맺음은 다음 세대의 좌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어떠한 믿음이라도 최소한 세번 정도는 의심해야 한다”는 어떤 비범한 개인의 통찰은 앞선 미지크의 논법과도 매우 부합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저자인 미지크의 숨겨진 의도가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그가 왜 좌파일 수 밖에 없는지는 이 글을 통해 약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럴때는 그와 같은 용기가 매우 부럽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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