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의 시대 - 유동하는 현대사회의 문화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윤태준 옮김 / 오월의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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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은 폴란드 유대인 출신으로 바르샤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후 바르샤바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당시 팽배하던 폴란드의 반유대주의 운동 때문에 이스라엘을 거쳐 영국으로 망명해 세계적으로 명망있는 근대주의 비판 이론가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그에게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은 과거 시오니즘과 같은 폐쇄적인 유대주의 운동에 대해 여지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세웠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알베르 카뮈가 알제리 독립 운동과 관련하여 다소 후퇴한 모습을 보인 것과는 달리 바우만은 버틀란드 러셀과 비견될 정도로 지식인의 비판적 인식과 사유를 여실히 잘 보여주었는데요. 근래 어느 유튜버는 알랭 바디우와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및 슬라보예 지젝과 함께 그를 유럽의 5대 좌파 지식인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만 단순히 좌파 지식인이라는 수식어 가지고는 지그문트 바우만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쥘리랑 방다가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말할때, 샹탈 무페가 오늘날 지식인들이 변질되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할때, 오직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일하게 이 범주에 해당이 되지 않는 지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개 독서인의 평가이니 여러분은 깊게 생각하지 않으셨음 좋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1년, “Culture in a Liquid Modern World” 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3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제가 구매해 읽었던 판본이 벌써 4쇄를 찍었을 정도인데, 이 점은 다른 바우만의 번역글과 비교될 정도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원제와 번역된 제목의 뉘앙스가 상이한 편이라 이 책을 읽으실 분들은 이 부분을 감안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주요한 분석 대상인 문화에 대해 저자인 바우만은 초기 계몽주의 시기를 거쳐 그저 민중에 그치고 있던 이들을 ‘시민’으로 만드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문화가 ‘사회를 개선하고 민중을 발전시키는 것’ 이라고 세부적인 내용을 점검하는 것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데모스 demos 에서 기인한 이 민중이라는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뭔가 멸칭에 가깝게 느껴지는 이 음절의 의미는 꽤 거슬리기까지 한데요. 원래 데모스 demos는 초기 사회과학 번역글에서 인민이나 국민으로 소개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민중으로 또는 시민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저는 마땅히 ‘시민’이라고 규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본래의 글로 돌아가서, 바우만은 문화가 지식을 지니고 다루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암시하며, 바로 이들에 의해 “최근 새롭게 형성된 국민국가 Etat-nation에서 시민 citoyens의 역할을 맡은 민중 le peuple 을 승격시키고 기품 있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만약 지식을 다루는 사람들을 소위 ‘지식인’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 지식인들과 문화의 관계와 사회에 대한 지식인의 역할을 밝힌 4장은 이러한 인식의 확증된 논증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음 2장에서는 오늘날 ‘유동하는 근대’의 명목을 이어온 자본주의적 소비(지향)사회가 과연 우리들의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해 평가하고 동시에 비판하는 장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유행에 대해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고 시민 및 소비자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사형으로 처벌받는 의무”의 오늘날의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어떠한 실체적인 희망도 더는 진지하게 품을 수 없다”고 바우만은 평가하는데요. 뒤에 5장에서 일부로 논증되는 부분입니다만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는 이 자유가 세계화 과정과 지구화 시대에 직면에서 각 사회의 여러 규범들이 해체되면서 일개 개인들이 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추론합니다. 꼭 더 많은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추진했다 하더라도 이미 세계화 과정에서 각 사회의 도덕 규범을 비롯한 사회적 규범들이 수많은 개인들의 원자화에 이르러 유명무실해졌다는 점은 굳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언급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요점인데요. 제가 왜 이런 자유가 얻게 되었던 부가적인 측면을 꺼내게 된 것은 이처럼 사회를 이루는 개인들이 자신의 자유를 과거보다 제약없이 누리게 됨으로써 마찬가지로 공동체 의식이 옅어졌으며, 앞선 문화가 민중들을 시민으로 도약하게 어떤 매개라고 규정한다면 소비지상주의와 결합한 개인들의 자유주의 문화가 과연 공동체 의식을 회복시키고 더 나아가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3장에서도 이러한 논지의 글이 이어지는데요. 로티나 프리드먼의 입을 빌어 비판하는 현대 지적 엘리트들의 사실상 변질은 국가 건설 시대에 기대되었던 교육자, 지도자, 교사 등의 역할을 그들 스스로 거부하고 다른 역할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바우만은 파악하는데요. 바로 그것은 이들 하이브리드 지식인들이 세계 특권층이나기업가 계층을 모방하고 심지어 그들과 결탁하는 경향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 발전의 접점에서 물론 상아탑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로서 문화의 분석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 문화를 올바른 쪽으로 이끌어가는 건전한 지식인들의 존재와 2장에서 존재감을 보이는 인간 문화의 유행, 유행의 영구운동은 소비시장의 대두와 함께 그 존재감을 위협받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가 자의에 의해 이 유행을 설명하는 부분을 다소 함축해버렸습니다만 전통적인 사회 규범으로 정착되는 문화의 유행을 앞선 소비와 자본주의의 논리가 익히 “소비시장이 힘과 지혜를 모아 문화를 유행의 논리로 일단 지배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증명해야만 한다”고 그는 일침합니다. 어쩌면 그런 연유로 4장에서 “즉, 누구나 남들과 구별될 권리가 있다는 것과 타인의 개성에 무관심할 권리도 있다”는 당위는 꽤 의미심장한 부분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4장과 5장 그리고 6장은, 디아스포라와 문화적 다양성, 다문화주의를 기반으로 현재의 유럽과 앞으로 유럽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는 서경식 선생의 일본사회에 우리 재일동포에 대한 의미로 뇌리에 박혀있습니다. 물론 여기의 디아스포라는 2차대전 전후에 벌어진 중동의 이스라엘 건국 운동과 같은 종래의 질서에 유입되는 이민과 그들 고유의 전통과 개별적 문화의 대결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탈공동체주의적 상황에서의 소수 이주민들의 유럽 유입과 사회적 갈등이 물과 기름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을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식은 바우만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소수의 이슬람 이주민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굳이 고수하지 않아도 그 사회에 녹아들 수 있을만한 적절한 당근책과 이점이 있었는가에 대해 본질적인 어려움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날이 긴장감이 높아가는 유럽의 현 상황에 이득을 볼 존재들은 세계화 권력이나 세계화주의자들이라는 점은 꽤 통렬한 해석인데요. 이런 세계화 과정에는 무엇보다 ‘현대적 정신이 없는 현대성’이 약간의 계몽주의적 결과론이지만 “인간의 갈등과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해 준다는 희망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는 점을 들어 본질을 들춰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번 바우만이 강조했던 것으로 인간이 인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 없이는 기존 사회에 도덕적 전통이 바로 설 수도 없으며, 우리가 그동안 수없이 직면했던 신자유주의의 이행의 그 결과 역시, 인간과 사회에 탈도덕과 탈윤리의 참혹한 현실입니다. 물론 매번 도덕주의적 이상을 늘어놓는 것으로 보여져 이러한 논법을 몇번이고 강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어찌됐든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것이죠.

글을 마무리 하기에 앞서, 한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바우만이 다소 다문화주의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한 주장입니다. ‘세계화의 압력’이 지대한 현 상황에서 문화적으로 견실히 규정되지 않은 다문화주의가 일차적으로 인식의 방해를 이차적으로는 기존의 사회에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마누엘 카스텔이 일찍이 옹호했던 다양성의 정치는 저로서도 민주주의가 지켜내야 하는 가치임을 의심하지 않고 있는데요. 다만, 앞선 바우만의 우려는 공동체주의가 실종되고 정치와 권력이 분리되어 사회적으로 더욱 경제, 정치, 문화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오히려 분별없는 다문화주의의 주입이 상황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 원동력으로 보는 듯 했습니다. 따라서 세계화의 탈규제가 무조건적으로 이상향이 되지 못하는 것은 설사 이러한 이행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가 더 확대되었다 하더라도 탈규제와 세계화의 압력은 꽤 본질적으로 직접적인 공동체의 분산과 더 나아가 시장 주도의 소비지상주의를 더욱 강조하는 문제로 나타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몰개성과 비인간화는 차치하더라도 인간이 마주하고 있는 고통과 갈등에 온 평생을 기울였던 바우만에게는 이러한 전제가 깔리는 무분별한 다문화주의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꽤 합당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민중을 시민으로 만드는 문화적 발전주의와 더 나아가 문화를 이루는 여러 뼈대들이 세계화의 강요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 귀담아 들을만하고, 과거 전통적인 사회 질서 유지에 힘을 쏟았던 지식인의 책무가 오늘날에 자신들의 이익에 영합하는 쪽으로 변질된 상황은 단순히 세계화 시대의 공동체 해체이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파행을 부채질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책을 덮으며 고민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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