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사회란 무엇인가
피터 코닝 지음, 박병화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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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회과학에 생명과학을 접목시켜 비판적 사회 이론으로 무장한 이 글의 피터 코닝은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복잡계 과학자이기도 한데요. 여기서 복잡계 과학이란 인간,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 얽힌 복잡한 요소들을 학문적으로 규명해 내고자 하는 일련의 과학입니다. 브라운 대학을 거쳐 뉴욕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코닝은 이런 자신의 학문적 운명을 위해 워싱턴 주에 소재한 복잡계연구소 Institute for the Study of Complex Systems 의 소장을 역임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일종의 복잡계 과학의 해법이 녹아든 공정과 공정사회의 필요성이 담긴 이 책은 지난 2011년 “The Fair Society”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같은 해인 2011년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태입니다.

우선, 이 책은 총 8장의 연관된 주제별과 마지막 결론을 포함한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공정과 공정 사회의 가치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적절한 요구와 대안이 담긴 8장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졌는데요. 뿐만 아니라 19세기형 이데올로기의 한계라고까지 규정짓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해석한 6장 또한 나름 중요하다고 언급하고 싶습니다. 책에서 인용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하이에크는 정의 자체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냉소했는데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서 다소의 불평등과 차별은 불가피한 일이며, 전통주의적 경제학에서 신성시 되는 개인의 합리적 이기심과 이윤추구가 어찌됐든 최종적으로 시민들의 보편적 복지를 포함한 사회 안전망에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었지만 그것은 사실상 허구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졌습니다. 여기에 더 1980년대에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던 “가능한 자들의 지대한 이윤추구”는 확실히 보장된 반면 전자를 위해 희생당한 민주주의와 평등, 법의 지배 등과 같은 도덕주의적 관념은 깡그리 무시됨으로써 나온 결과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일 겁니다. 저는 제 입으로 이런 아포칼립스적인 상황을 읊어대는 것을 즐거워하지는 않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죽기전에 우리에게 경고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이 과연 인간다운 충족을 통해 존엄성을 가져갈 수 있겠는가와 쓰레기가 되는 삶에서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에 대해 그 전망이 불확실한 것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생태학과 진화론의 풍부한 관점과 동물과 인간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느냐에 대한 개괄을 포함해 어떤면에서는 동물이 인간보다 더 ‘사회적 교환 즉, 상호주의’에 기반하고 있는지 아주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박쥐가 자신의 군체가 모여있는 동굴로 돌아가 활동하지 못하거나 약한 개체에게 획득한 피를 다시 토해내 이들에게 먹인다는 사례는 꽤 놀랍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루소에 의한 일반의지에 따라 자연상태의 불안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사회 계약을 인정했던 것은 명백합니다. 앞선 사회적 교환이라는 가치는 바로 저자인 코닝의 공정 사회에 대한 단초로서 작용하게 되는데요. 제가 전 문단에서 강조했던 바와 같이 7장에서 보편적 복지와 모두에게 돌아가는 공동재라는 측면에서 바로 이 ‘사회적 교환의 법칙’을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과거 미국에서 시도되었던 ‘사랑의 집짓기 운동’과 같이 길거리를 전전하는 노숙자들을 자발적으로 투입시켜 자신이 살 집을 스스로 짓게 만드는 꽤 합리적인 대안 등을 여기에 기반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점은 많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말하는 복지의 인센티브라 불릴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과거 애덤 스미스가 그의 묻힌 논저 ‘도덕감정론’에서 옹호한 정의의 감정과 찰스 다윈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특별한 점을 ‘도덕주의’에서 찾은 것도 그 의미도 명확해보입니다.

더불어 6장에서는 우리가 옹호하는 공정과 공정 사회의 가치가 19세기적 이데올로기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가 당연히 실패했다고 비판합니다. 전자의 자본주의는 분배의 원칙을 거부한다는 점과 사회주의는 개인의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강제적으로 인본주의적 평등을 주장하는 것으로 양쪽이 사실상 실패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옹호론자인 밀턴 프리드먼이 눈이 멀 정도로 집착해 마지 않았던 ‘바람직한 최적의 실업률’이라는 허상은 결국 자본주의 자신이 모두에게 합리적이고 납득할만한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주의 역시 국민에 대한 군사적인 강요와 핍박이 정권의 안위를 위해 동원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모습이기도 하겠죠. 물론 사회학과 경제학의 인간적인 개선점의 단초를 제공한 다윈과 그를 따르는 많은 생태학자들과 진화론자들 그리고 이에 기반한 사회학자들이 모두가 공정한 사회에 대한 가치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사상에 진화론을 접목시킨 허버트 스펜서와 같은 이는 마땅히 도태되어야 할 자들은 도태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일련의 동물들도 무리지어 마땅히 상호적 재화를 교환하는 마당에 만약 인간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동물만도 못한 무언가로 규정해야 될까요. 이것의 답변에는 차치하고 다만,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서라도 우리가 공정이 추구하는 결과와 공정한 사회의 필요성을 위한 이론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족하지 않을까 고민해봅니다.

그래서 요즘 근래 계속 듣게 되는 이름은 아르마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입니다. 후자인 누스바움은 말할 것도 없이 센이 기여한 HPI와 같이 자본주의 위에 인간이 서는 입장을 대변했던 경제학의 개선이 아직도 소수에 불과한 것은 매우 불행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경제학이 개인이 자신의 선호를 ‘충분히’ 추구해야만 비로소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밝혀내는 데 집중한다”는 건 경제학이 갖는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다르고 있는 이 책의 4장과 5장이 함의하는 것을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이를 무시해왔고, 오로지 자본주의의 양적인 성장 및 그 토대의 견실에만 이바지했던 것은 아마도 부인하기 힘들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경제학이 인간 본연의 삶과 충분한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일련의 조건들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것이 필요해 보입니디만 자본의 우월을 옹호하는 이들이 이러한 겉치레에 발을 담그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결국 왜 우리 사회에 공정이 필요한 것에 대해 정의와 평등이 철지난 타블로이드와 같이 밑바닥에 흘러다니지 않기 위해서라도 근본적인 평등의 원리부터 그리고 저자가 강조하는대로 훌륭한 민주주의란 사회적 조화와 평등을 갖춘다는 점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생물학자인 피터 코닝의 이 책은 꽤 밝은 명료성을 주고 있으며, 어떻게 우리의 사회를 개선시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도 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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