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홍지수 옮김 / 봄아필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울리히 벡과 앤소니 기든스와 함께 후기 근대 및 근대주의를 냉엄히 비판했던 지그문트 바우만은 지난 2017년 영국 리즈에서 삶을 마칠때까지 인류에 대한 애정으로 도덕주의와 사회적 정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의 유작이 되어버린 ‘레트로토피아’의 남겨진 사회에 대한 간절한 희망이 뇌리에 박혀 있기도 합니다. 일개 개인인 저에게도 이와같은 바우만의 회한이 깊게 남아있을 정도면 그의 통찰력을 아꼈던 사람들과 수많은 독자들은 어떨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이 책은 “The Individualized Society”이라는 원제로 지난 2001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비교적 한참 뒤인 2013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약간의 첨언으로 바우만의 이 글을 번역한 홍지수 씨의 번역은 나무랄데가 없었습니다. 다만 2013년 출간이후 현재는 절판된 상태인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라 생각됩니다. 이 이유에 대해선 이어지는 내용에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크게 3장의 주요한 논제로 이에 총 18장의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꽤 상당한 분량의 본문에서 바우만이 견지하고 있는 입장은 19세기 근대화의 어두운 측면에 기인된 오늘날 사실상의 주권 국가의 역할 축소와 대량 생산의 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한 무차별적인 세계화와 이것의 기반이 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러한 기조 가운데 진행된 개인들의 삶의 전방위적인 악화와 전통주의적인 도덕과 사회적 정의가 퇴출당한 결과를 매우 직접적이고 다양한 인용을 통해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로 이 글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건 자신의 논증에 대한 그의 꽤 면밀한 독서와 글을 통해 소개되고 있는 저명한 학자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바우만이 주장의 합리적 근거를 위한 인용이 여기의 이 글처럼 다양했는지에 대해 꽤 놀랍기도 했는데요. 그에 대한 위키 백과를 간단히 검색해 보면 바우만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의 면면을 알 수 있습니다만 그것과 비견될만큼 꽤 많은 지식인의 주장들이 인용되었습니다.

우선 사실상 우리의 삶을 고통에 빠트린 19세기의 근대주의화의 이행과정이 그동안 보여왔던 바우만의 고유한 인식론에 합당하게 ‘액체 근대’, ‘유동하는 근대’ 및 ‘쓰레기가 되는 삶’에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첨예한 냉전적 대결에서 이념이 개인의 삶을 초월한 중대한 목표이자 가치가 되면서 그에따른 “이념이 반드시 그것에서 이득을 얻는 누군가가 있다는 개념과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글의 서두에서 그는 밝혀둡니다. 이와같은 진술은 오늘날 수많은 개인들이 ‘인간적인 품위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단순히 노동 시장에서의 장기말로 국한된 것에 대한 원인이라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초국가적이고 점점 더 탈지역성을 띠는 자본 (자본의 새로운 진화)”은 더욱 개인들을 피폐한 삶의 한 가운데로 몰아 넣었고 이렇게 폭발적으로 이행된 자본주의화에서 이를 극명하게 논증한 14장, ‘개인의 도덕성, 부도덕한 세계’는 “학식있는 엘리트들 가운데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정책이나, 미래에 대한 구상, 사회 정의의 본보기를 제시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권력과 가까운 이들의 의도적인 침묵을 꼬집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다수의 권력 바깥에 있는 개인들의 영향력의 소외 뿐만 아니라 가일층 권력과 가까운 기득권과 엘리트들이 기본적인 도덕적 문제와 사회 정의에 대해 아무런 의지가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선 우리가 적절하고도 확실한 시민의식을 갖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실효성있는 도구로 만들 것에 대해 사활을 걸고 노력을 기울여만 한다는 점이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신자유의적 세계관이 다른 이념들과 극명하게 다른 점은 신자유주의 세계관은 그 자체가 독자적인 하나의 부류이고 의문이나 비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바우만은 다시 밝히고 있습니다. 매번 신자유주의를 비판할때마다 진보 좌파에게 꽤 과도하고 감정적인 편협성을 갖고 있다고 치부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어리석인 시민들의 입놀림으로 국한시켰던 자유지상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른, 단 한번도 지난 40여년 동안 이어진 신자유주의 이행에서 이 이념을 정상적으로 비판을 당한 적이 없었다는 진실을 가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의 날 것과 같은 진실은 2008년 이후가 되어서야 겨우 진정성을 갖고 비판을 하는 이들이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재검토와 검증과 비판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점이죠.

즉, 3장에서 자유와 안정이라는 가치적 대립에서 “품위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분명한 방법, 확고하고 안정된 지향점, 삶의 여정에서 예측 가능한 목적지의 결핍”이 원인이 된 이상의 부재는 결국 인간을 고통에 빠트렸다는 결말을 잉태했습니다. 이러한 개개인들의 박탈감들이 모여 ‘공동의 이익’에 대한 요구가 근대화가 완료되고 자본주의의 격렬한 대량화가 지속되면서 이상하게도 수많은 개인들의 정치에 대한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감소했습니다. ‘개인은 시민의 최악의 점’이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인용된 뒤르켐의 “사회적으로 강요받지 않는 개인은 변덕스러운 본능과 욕망앞에 무력한 희생자일 뿐”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명확합니다. 시민의 기능과 역할에서 개인들이 무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이런 상황의 근본적인 측면에서 “경제가 정치로부터 분리되고 정치의 규제와 개입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발생한 경제의 이상한 변곡점이 ‘경제 행위로서의 자유로운 인간’이나 ‘인권적인 측면에서는 필요없는 자유’를 강조하기 위한 사실상의 사회적 기득권자들의 교묘한 술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중이 주도하는 민주주의가 위협적인 요소’라는 주장을 펼쳐왔던 자유지상주의자들을 감안해보면 음모론적 시각으로 ‘이러한 전방위적인 고통스런 이행’을 원했던 자들이 많았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이처럼 근대의 전성기를 ‘포드주의’와 같은 이념이 지배했다는 사실은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시민들에게는 앞선 논증의 결과물로서 어떠한 고통이 뒤따랐는지 바우만이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근대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반자본주의자’와 같은 낙인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수의 이익과 사회 공동의 이익을 결여한 경제의 외형적 발전과 정치 권력을 낙후시켜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 시킨 경제 권력과 이러한 모든 것을 ‘정치의 후진성’과 ‘정치의 쓸모없음’으로 치환시킨 교묘하고 자의적인 ‘이익 영합의 지식인들’이 주도해 왔습니다. 어차피 신자유주의는 자유로운 경제적 자유를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니 다른 말로 ‘경제적 자유’는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이익을 침범하는 ‘경제적 이익’으로 재탄생했고, 바우만의 말대로 “도덕이 타인에 대한 책임”을 뜻하는 것으로서, 근대주의가 이런 도덕의 상실과 사회적 정의를 휴지통에 넣어버린 것은 반쪽의 성취도 아닌 내면에 숨겨진 소수의 이익을 위한 외형의 극대화로 귀결 되었다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저의 평가는 꽤 도발적이고 공격적이기까지 합니다만 달리 어떤식으로 표현을 할 수 있을지 명확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끝으로 결말에 이르는 15장 ‘두 개의 전투를 치루는 민주주의’에서 바우만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는 두가지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공적 권력이 ‘좋아 보이는 것’을 입법화하고 제정한 법을 집행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과 둘째로, “공공 이슈와 사적인 문제들 간의 소통과 해석이 사라지고 있다”면서 이것은 최종적으로 “국가 주권의 약화”와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제도와 법의 기반해야 한다는 윤리도덕적인 명제에 기겁을 하는 자들이 많은 것처럼 국가가 마땅히 보위해야 할 다수의 시민들에 대한 권리와 사회적 보장책 및 사회 정의의 신념을 경제적 자유를 일순위로 놓고 나머지를 주변부로 격하시킨 이들의 ‘그 고유한 신념체계’가 어떻게 사회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지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에 아주 단순한 면모로 다수의 노동자들을 자판기에 보관된 인형들처럼 ‘까다롭게 고용하고 쉽게 해고하는’ 장기말로 취급해 온 것은 프레카리아트식 처방을 일부러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절로 향하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일전에 마누엘 카스텔은 “시민들에게 다시 온전한 권력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앞으로 민주주의의 진로에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포스트 민주주의’의 콜린 크라우치 역시 ‘정치에 대한 경제의 비타협적 영향력을 해소’시키는 것이 우리의 민주주의가 포스트적 결론으로 치닫지 않는 길임을 밝혔습니다. 아마도 시민 한명, 한명의 권리와 삶의 품위는 결국 모든 사회의 시민들이 자신들이 바라는 건전하고 질적인 삶의 결정을 보장하는 것이며, 민주주의가 이러한 방화벽으로서 소수의 정치인들과 기득권층에게 단순한 수사에 그치지 않도록 우리가 끊임없는 견제와 정치 참여로 지켜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을 몇번이고 되내였습니다만 이것의 성취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에 대해 자크 랑시에르는 “권력층 태생이 아닌 이들을 침묵시키거나 정치적 과정에서 배제하고, 자신들만의 전문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통치를 독점하려는 권력의 집요한 특성을 ‘붕괴’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다소 긴 글을 정리하겠습니다.



-며칠동안 이 책을 일독하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번역된 바우만의 여러 논저들 가운데 이 책은 모두가 꼭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언급했던 것과 같이 불행하게도 현재는 절판된 상황으로 다시 재간 예정이 불명확한 상황입니다. 모쪼록 돈이 안되는 사회과학 서적이지만, 출판사의 관대한 노력이 너무나 필요해보입니다. 꽤 일방적인 생각이지만 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이 책을 읽게 되는 날을 앞으로 기대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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