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의 <공리주의> 입문 컨티뉴엄 리더스 가이드
헨리 R. 웨스트 지음, 김성호 옮김 / 서광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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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R. 웨스트는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 있는 맥켈러스터 칼리지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학자입니다. 저는 매번 외국 학자가 쓴 책의 서평을 쓸때마다 구글링을 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 웨스트 교수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었습니다. 그의 얼굴로 추정되는 사진도 몇장 나오긴 했습니다만 확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자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 선에서 그쳐야 할 것 같습니다. 앞장의 역자의 소개에 따르면 웨스트의 이 책은 컨티뉴엄 출판사의 ‘리더즈 가이드’ 시리즈의 한 권으로 이 리더즈 가이드의 기획 논저들은 꽤 명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찬가지로 검색을 해봤더니 해외 북 블로거들의 다양한 글들이 나타났습니다. 지난 2007년 “Mill’s ‘Utilitaianism’”이라는 원제로 출간된 것을 국내에는 지난 2015년 서광사에서 번역 출판을 하였습니다. 한가지 사족으로는 원제의 책의 표지를 그대로 서광사에서 사용한 것으로 여겨졌는데요. 책 표지 디자인을 새로 하지 않고 책을 펴낸 점은 개인적으로 꽤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우선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미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밀의 공리주의를 제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인 웨스트의 이 책은 밀의 ‘공리주의’에 대한 일종의 해제라고 볼 수 있는데요. 원전을 먼저 보지 않고 해제 만으로 밀의 주저를 판단하는 것이 어쩌면 어불성설일수도 있지만 이 점은 양해를 부탁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칸트가 등장하고 난 이후로 제임스 벤담과 제임스 밀을 거쳐 존 스튜어트 밀에 이르는 영국 경험론에 입각한 이 공리주의가 상당한 비판을 받아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칸트가 주장한 개인의 이성을 통한 행동의 결정 및 결과물은 단순한 수학적 산출이 아니라는 점은 일정 부분 공감할 부분이지만, 이성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이성은 목적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다라는 양자의 입장이 첨예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후자의 의미에서 밀은 이성이 선한 목적에 이르는 수단일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합니다만 이 점에 반대하는 경우도 분명 적지 않겠죠. 이 공리주의를 간단히 요약해 본다면 (물론 상당히 도식적이겠지만요) ‘쾌락의 산출, 고통의 회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제러미 벤담의 입을 통해 나왔던 그 유명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라는 전제도 역시 귀에 박혀 있습니다. 밀은 그의 저서 공리주의의 마지막 정의에 관한 부분에서 ‘행위 규칙’과 ‘그 규칙을 위반을 제재하려는 감정’을 정의의 요약이라고 제시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를테면 전체적인 공리주의의 맥락은 규범의 이론으로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사회적 기본 원리에 입각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공리주의의 이론인 “법칙과 정책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제도 등을 그것이 낳는 결과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은 개인의 공리적 입장과 그 결과를 포함한 ‘다수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이렇게 결과론적 인식론에 걸쳐 있는 것이 공리주의라 볼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이 부분에 대해 첨예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반공리주의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발전을 이끌었던 개인의 이익 추구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든 제도와 법의 규명이 결과론적 입장에 치우쳐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오로지 개인의 자유와 이익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사적 개인의 행위의 정당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권리의 제한이라는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 실정입니다. 저자인 웨스트의 평가대로 밀도 약간 소급해서 적용하고 있었지만 반대편에 있는 많은 이들의 직관주의적 태도가 공리주의를 비판해 온 가장 큰 흐름이었고 이 양자가 해석상의 대립을 유지하면서 다른 화해를 시도할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꽤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이 직관의 절대주의적 관점이 공리주의를 터무니 없는 사상으로 몰고 왔고, 과연 쾌락의 수적 산출이나 고통의 회피 결과가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구체적인 영역에 어떤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려면 더욱 궁극적인 기준이 필요한데, 밀은 이 기준이 바로 공리의 원리”라고 주장했습니다. 단순히 직관의 이성만으로 개인의 행동의 선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어떤 구체적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내용입니다. 다만, 단순한 쾌락 산출과 고통의 회피라는 측면을 넘어 “2차대전 당시 홀어머니를 놔두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여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이 청년이 충분히 개인으로서 납득할 만한 선택이어야 한다는 점은 공리의 경계와 그렇지 않은 부분의 인식적 분리를 가늠하게 합니다.

공리주의에 대한 큰 반박이라 여겨도 될만한 “이 이론이 오직 행위의 결과만을 중요하시는 냉정한 무감각한 인물로 만들며, 그 행위를 행하는 사람의 성품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밀의 입을 빌어 설명합니다. 행위의 옳고 그름 외에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요인이 있을 수 있다는 밀의 인정과 다른 도덕 체계를 지지하는 사람들 또한 개인의 가치 기준의 가볍고 중한 기준에 따라 다르게 적용한다면서 이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특히 밀은 여기에서 종교적 도덕 원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마찬가지로 공리주의가 (특히 사회학에서) 다른 어떤 이론보다도 더욱 종교적이라는 이해도 의미심장합니다. 더욱이 밀은 “기독교를 도덕을 포함한 모든 종교적 도덕이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은 별도 설명이 필요할 듯 싶은데요. 밀은 일찍이 ‘여성의 예속’을 통해 여성의 권리를 위한 주장을 펼쳤고, 종교에 대한 비판을 해왔던 인물입니다. 당시에는 그의 의견이 급진주의적 주장으로 읽혔다는 점에서 밀에 대한 개인적인 약간의 해명이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따라서 공리주의는 전체의 공리 혹은 전체의 복지에 기여하는 행위나 행위자들을 지지해왔고, 밀은 여기에 “개인의 쾌락이나 이익에 반하는 오로지 다수의 복지에 삶을 건 사람”을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입장을 걸고 이를 긍정한 바가 있습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이런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죠. 이렇게 개인의 이익과 쾌락을 배제하고 다수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의 도덕적 원리에 비롯된 것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습니다만 공리주의는 어찌됐든 그 결과에 집중하는 원리로서 큰 틀에서 앞선 행동을 이끈 개인의 의지 내지는 요인보다는 그런 행동을 한 개인이 얼마나 사회의 복지를 이끌어냈는가라는 측면의 결과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쯤에서 밀의 개인의 도덕적 관념 내지는 원리를 과신하지 않는 입장이 수긍되었습니다. 우리가 꼭 도덕적 양심을 통해 이해하지 않더라도 각 개인들은 “우리가 이미 전반적으로 어떤 종류의 행위가 유익하고 해로운지를 잘 안다”고 언급하며, 양심을 비롯한 내적 제재를 염두해 둔 행위의 검토는 사실상 경험과 취득을 통해 이해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즉, “밀 자신은 우리가 도덕적 감정들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얻는다고 믿는다”는 저자의 이해도 이와 비슷한 관점이라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정의라는 관념에 이르러 개인의 행복 추구와 쾌락의 산출에서 이 정의라는 부분이 어떤 식으로 이해되어야 할지에 대해 밀은 밝히고 있습니다. “정의나 불의의 경우를 보고 사람들이 느끼는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감정이 행복의 증진이나 불행의 예방을 보고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과 다르다는 점을 인정한다” 밝히고, 이런 정의감이 공리의 관념에서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는 도덕적인 감정이 공리에 의존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은 해석의 확장된 측면에서 새로운 사회 계약을 주창한 존 롤스와는 상반된 입장이기도 합니다. 또한 밀은 “정의의 관념 또는 정의감은 공리나 행복의 관념과는 구별되는 듯이 보이며 때로 이들은 상충하는 듯도 하다”고 덧붙입니다. 즉, 정의는 개인의 이익 추구를 단순히 제재한다는 것 보다는 개인들의 법적 및 도덕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한 명제로 작용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공리주의자들의 공리가 얽히는 듯 보이며, 저로서도 다수의 개인들의 권리를 위해 정의를 세우고 필요하다면 자유의 제한이나 법적인 제재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초창기 사회 이론과 그 맥을 함께하는 것으로 아마 많은 학자들이 이에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타인의 권리들을 침해한 개인들에 대한 보복 감정은 그것의 대응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밀은 개인의 보복 감정과 법적인 제재 나아가서는 사형수들의 마땅한 사형 언도를 긍정한 바가 있는데요. 대체로 많은 공리주의자들이 법과 제도를 신봉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기본적인 개인의 양심이나 내적 제재가 자신들의 부정의한 행위를 완벽히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개인의 이익추구나 자유의 보장이 과연 법과 제도에 우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겠습니다만 사실상 공리적 원칙이 가장 필요한 부분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이런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웨스트의 이 책은 단순한 해제를 넘어 개인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느냐와 그 행위의 요인과 정당성의 문제라든지 그 결과에 따른 이해를 밀을 통해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3장에서 “전체의 선이 사회 전체의 복지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밀이 밝히는 정의감에 포함된 도덕적인 것이 반드시 전체의 선일 필ㅇ는 없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규칙이라고 여기는 꽤 절충된 주장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만 과정과 결과의 도식적인 이해를 통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야만 하는 당위적 주장에 회의하는 입장일 수도 있겠습니다. 과정이 좋지 않은데 결과는 좋았다는 문장이 과연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실마리를 한 철학 교수가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더욱 조만간 밀의 공리주의가 현대의 우리에게 더 필요해지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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