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36
카스 무데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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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출신의 정치학자 카스 무데와 마찬가지로 칠레 출신의 정치학자인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의 공저로 나온 이 ‘포퓰리즘’은 최근까지 나온 포퓰리즘, 즉 대중주의를 이론적으로 설명한 책들 가운데에서 분명 의미가 있는 논저라 불릴만합니다. 특히 앞의 카스 무데는 극우 운동과 극단주의 및 포퓰리즘과 관련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연구자로 명성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저자 개인의 이름값이 책 전체를 보장해준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포퓰리즘을 주제로 한 글들 중에서는 이에 관한 최근의 세계적 경향과 일목요연한 인식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제공해주고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Populism : A Very Short Introduction’ 이며,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꽤 최근이라 할 수 있는 2019년 8월 12일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 논의에 앞서 이 책에 인용되었던 두 가지 주장에 대해 먼저 동의하기 힘들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로 “필리핀 조지프 에스트라다, 남한의 노무현 같은 포퓰리스트 ‘아웃사이더들’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는 것과 관련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저런식으로 인용한 것은 심각한 인식적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변호사로서 일반적인 생활인으로 살다가 인생의 중반 이후에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정치인이었습니다. 대통령 임기 시절의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그를 포퓰리스트로 규정한 것은 꽤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로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은 사회 운동 단계를 넘지 못하고 단명한 포퓰리즘의 완벽한 예다”는 이 부분 역시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마누엘 카스텔이나 필립 페팃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이 그들만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정보와 경제 행위로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실망스러운 대처와 마땅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모두 면책된 결과는 미국이 엄격한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많은 제도와 토대를 비웃는 상황과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일종의 자발적 시민운동을 포퓰리즘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은 매우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그럼 다시 논의에 들어와서, 이 책은 총 6장의 주제로 현재 전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포퓰리즘적 현상과 이론적 배경을 꽤 세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포퓰리즘 (다른 말로 대중주의)은 “대체로 민중에 대한 호소와 엘리트에 대한 비난을 포함”하고 그 반대에 위치한 것을 소위 엘리트주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엘리트주의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와 같은 이들이 ‘민중의 어리석은 정치적 행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 자체의 가장 큰 위협을 중우정치 내지는 군중정치로 인식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민주주의 내부에 도래하고 있는 표면적인 위협인지, 아니면 민주주의로 인해 발생한 요소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기도 합니다. “부정직하고 자기 잇속만 차리는 기득권들”에 반대해 민중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포퓰리즘은 매우 연관이 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여기에다 일찍이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언급한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이 거의 한몸과 같은 상황인 것을 우선 밝혀두고 싶습니다.

유럽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이탈리아와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페루 등의 정치적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이 이미 엘리트에 준하거나 부유한 기득권에 속하면서도 기존의 엘리트 기득권과 거리를 두면서 오직 자신들만이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선동주의적 정치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탈리아의 총리를 역임했던 베를루스코니와 현재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표적으로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해악은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가 옹호했던 다원주의에 심각하게 반한다는 것이며, 더불어 양극단주의와 매우 쉽게 결합된다는 점에서 다수의 많은 학자들이 포퓰리즘 자체를 일회성이거나 단순한 정치적 흐름으로 보는 것을 지극히 경계해야만 하는 증거라고 여겨집니다. 즉, 이 글의 4장에서 소개되는 이 ‘카리스마적 스트롱맨’이 포퓰리즘 정치인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단어라고 볼 수 있으며, 대체로 이러한 포퓰리스트들이 “모두 절대 권력자로 여길 수 있고, 따라서 결코 민주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점이 강조하는 의미는 명백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들은 이처럼 관례적 입장에서 포퓰리즘 자체가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위험이라는 것에 간접적으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점도 어떤식으로 포퓰리즘이 발현되던 간에 끝내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저자들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하기보다 자유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하기 때문”이라는 것에 대체로 수긍되기도 하였습니다만 민주주의를 배경으로 태어나 결국 민주주의를 끝장낼 수도 있는 위험성은 바로 과거에 타생한 파시즘과 다를바 없다고 여겨집니다. 파시즘 역시 ‘선동하는 카리스마적 정치인’의 출현이 매개물이 되는 것과 같이 이 포퓰리즘도 역시 거의 마찬가지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곳의 저자들은 포퓰리즘의 양면적인 측면에서 “기존의 엘리트들이 진짜 민중의 일에 안중에도 없다”는 점과 “여러 나라에서 민주적 엘리트주의자들은 정치적 선택지를 제한하기에 이르렀다”는 판단 등으로 이런 상황에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만한 것이 있다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즉,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독려하고 왜곡된 기득권층의 행위를 견제하게 하는 동인을 유인해 낸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 자체가 반지성주의와 결함해 쉽게 극단주의에 이를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앞선 긍정적인 요인도 거의 유명무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민주주의의 축소에 관련한 최선의 해결책은 시민들의 경쟁과 참여일 뿐이며, 더 나아가서는 열린 토론과 적극적 의사의 개진일 뿐일 것입니다. 이것은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가 주창했던 것으로 이외에 현실적으로 마땅한 해결책은 찾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즉, 5장 말미에서 “포퓰리스트들이 충분히 강해지고 나면 민주주의의 쇠퇴 과정을 촉발할 수 있을것이다”라는 경고는 그래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러한 전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이 대두하는 시기에는 얼마만큼 기존의 정치 권력이 대의에 충실하고 시민들을 기만하지 않는 것에 달려있다고 봐야겠죠. 나날이 정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금권정치에 매몰되거나 소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사실상의 과두제를 방치하게 된다면 포퓰리즘의 독이 우리의 민주 정치를 끝장낼 시기는 그만큼 빨리 다가올 것입니다. 저는 이 포퓰리즘이 앞선 나치즘과 더불어 매우 사악하고 광범위한 정치 자체에서 크나큰 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존 정치와 시스템을 아무런 근거없이 비난하는 선동 정치인들을 경계하고 미국의 티파티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이 책을 다 일독하고 나서 머릿속에 한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는데요. 지난 전정권의 부정으로 인한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지금의 정부가 최소한 포퓰리즘에 기반한 정권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는 선동하는 정치가는 민중들에게 말도 안되는 직접적인 반란을 획책하지, 그들에게 민주주의를 지키게 위해 힘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그때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켜달라고 말했고, 그것을 수락한 한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지극히 명확한 사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약간의 사족으로 번역가인 이재만 선생님께 한가지 아쉬운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분명 원문에서는 우리나라를 South Korea로 표기되어 있었겠지만, 글 전체에서 따로 북한이 언급되지도 않는데, 우리 국명을 ‘남한’으로 표기한 것은 뭐랄까 아쉽다고 해야할까요. 한국이라고 표기해도 충분했을 것을 굳이 뉘앙스가 이상한 남한으로 했어야 했을지 이에대한 약간의 의문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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