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사회와 이익사회 - 순수사회학의 기본개념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번역총서 7
페르디난트 퇴니스 지음, 곽노완.황기우 옮김 / 라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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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 등과 동시대인으로 독일 사회학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에 오르면서 초기 독일 사회학의 기초를 쌓으며 큰 명성을 얻은 페르디난트 퇴니스는 1933년까지 킬 대학의 특별한 연구 교수직을 역임했는데요. 특히 1932에서 1933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그가 행했던 나치당의 비판으로 스스로 궁지에 몰리게 되며, 히틀러에 의해 강제로 대학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왠지 칼 슈미트와는 유독 대비되는 행적이기도 합니다. 두 공역자의 해제에는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던 퇴니스의 학문적 경향과 양심에 대해서도 잘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28세때 저술되었으며, 이번에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번역총서로 묶어 1912년 개정판을 바탕이 되었다고, 또한 정부의 재원을 지원받아 출간된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제대 교수였던 황성모 선생의 1982년 국내 번역판을 다시 새롭게 정비하여 낸 것으로 공역자들이 다시 한번 주지하고 있습니다. 독일어 원제는 ‘Gemeinschaft und Gesellschaft’ 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책의 원제를 바로 표현한 게마인샤프트, 게젤샤프트는 매우 유명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당시 독일은 말할것도 없고, 프랑스를 비롯한 미국에서도 이 개념을 여러 곳에서 차용해 의미를 확장시켰는데요. 더불어 우리말로 공동체와 결사체라는 의미로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저자인 퇴니스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라는 대비되는 개념으로 후자를 바탕으로 전자의 우월성을 다소 증명하는 방법을 글의 논리적 전개를 이끌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자식, 남편-아내, 형제-자매’ 등으로 인식된 기반의 전통적인 공동사회에 대해 개인의 향락 (아마도 안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을 위한 자원 분배의 차원에서 가부장제를 차악의 문제로 수용하고 있고, 후에 전개된 서술 기반에서 권력 관계와 장원을 언급하면서 농노와 노예 제도에 대해 ‘법적 노예 신분은 그 본질상 의롭지 못하다’고 평가하지만 앞선 가부장 제도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역사의 문제로 치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익사회가 출현하기 이 전의 모든 가용한 생산물이 자급자족 형태로 순환된 공동사회의 생산형태가 앞서 밝힌대로 각 구성원들의 향락의 문제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이후 잘 알려진 바대로 ‘잉여생산물’을 판매의 형태로 출현한 이익사회에 대해 상인과 자본가의 해석을 크게 할애하면서 잠정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평등의 한계를 넘어서면 서로 상이한 것들의 통일체로서 공동사회의 본질이 지양된다”는 측면에서 자본가와 상인의 화폐권력적 우위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촌락의 구조에서 노동과 생산의 거의 완전한 구조는 선순환의 입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각각의 개별 노동력이 수단화가 되는 이익사회의 생산체가 기존의 공동사회가 추구했던 여러 중요한 가치들을 망각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고 보는데요. 이는 “상호간의 믿음과 신뢰가 기반한 관계가 매우 성립하기 어렵게 되는” 이익사회의 단면을 평가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렇게 1부에 이르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의 개념의 일독을 마치고 다음 2부를 읽어나가는 도중에 명백하고 1부와 2부는 구조상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부도 전자인 1부와 마찬가지로 서로 대비되는 규명으로 본질의지와 선택의지를 다루고 있는데요. 2부는 약간 미흡한 선택의지의 해석을 감안한다면 거의 본질의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본질의지의 인간 전반의 사고와 관념, 감정에 대한 퇴니스의 해석은 본질적으로는 의지를 유기체로 인식하고, 감정과 사고의 영향이 서로 연계되고 주고받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는 큰 틀의 인식을 고려한다면 꽤 일관된 논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유한 기억을 의지의 영향을 주는 중요한 인자로 파악하고, 기억 자체가 ‘필연적 의견, 정언적 명령’으로 호의-습관-기억으로 비롯된 의지 형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은 의지와 자유에 비롯되는 것으로 자유와 의지는 곧 하나라는 관념을 잉태합니다. 이렇게 도출된 인간 의지의 개념은 욕망과 욕구와 관련해서 인간의 특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인식이며, 인간 의지 자체가 동물적, 정신적 의지에서 결정된 유기체적 의지로 확신된다면,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이득을 위해 이기심을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거의 이해가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선택의지는 앞선 본질의지와 명백하게 대비되고 이점은 이익과 이기심의 선택의 문제로 규정됩니다. 결국 “이러한 개개인은 자기의 본질의지에 자신의 태도를 정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의지를 사실상 본성을 나타내는 명제로 받아들이고 해석되는 것은 일찍이 쇼펜하우어가 시도했던 철학이며, 스피노자 역시 의지와 본성의 문제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태도와 유사합니다.

그리고 3부는 정의와 테제, 자연법을 정리하면서, 마찬가지로 정의와 자연법을 본질의지-선택의지 및 공동사회-이익사회라는 대비되는 논리적 전개로 확실히 표명되고 있는데요. 이익사회에서 선택의지로 기반되는 정의가 과연 반대의 본질의지와 공동사회에서의 가치로 과연 우월한 개념으로 도출될 수 있느냐와 전통적인 관습과 인습의 기반이 되는 공동사회의 관습법을 역사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퇴니스가 규명하는 마지막 자연법과 관련된 문제는 인간의 의지와는 조금 거리가 먼 관념성과 보편성의 측면에서 찾아보고 있습니다. 따로 독특한 이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공동사회의 관습법이 자연법의 일부로 귀속되고 이후 스스로 고유 영역으로서 공법적인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측면의 해석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익사회의 고리대금과 같은 불로소득과 관련된 채권법은 개인의 이익의 수단으로 나타났고, 전체적으로 상업 발달과 자본가 계급의 출현으로 탄생한 이익사회가 어떠한 성격을 갖고 있는지 마찬가지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펴본 양 사회의 분석적 측면은 과연 공동체의 국가론으로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혹은 공동사회나 이익사회 한쪽에 기반한 국가를 도출해야 하는지, 양자 모두에게서 공통되는 보편적 이익으로 취합해야 되는지에 대한 퇴니스의 고민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이익과 보편적인 구속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여론에 기반하는 국가체제를 갖추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겁니다. 저자 자신이 히틀러로 대표되는 국가사회주의를 목도한 바가 있듯이 자본주의 발달 시기의 독일의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양쪽을 극명하게 대립시켜 결과물을 살펴보는 일종의 경험도출론은 사실상 실행되기 어려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익의 문제를 최고 선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이익사회가 무조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믿음은 꽤 위험하기도 한 것입니다. 퇴니스가 자신의 독일이 거대하고 파급력이 큰 위험한 징조를 미리 본능으로 알고 이를 비판했던 것과 같이 온전한 자연법을 도덕적 기초로 삼아 국가의 기조로 삼는 것이 완전한 공동사회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 보다는 좀 더 나은 선택이 되지 않을까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자인 그가 이익사회의 단면을 과감하게 파악했듯이 우리 사회의 이 이익사회화는 꽤 변질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떠한 이해를 가져다줄지는 다소 불명확하긴 합니다만 초기 사회학에서 시도된 규명들이 오늘날에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약간의 희망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끝으로 덧붙여, 9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을 발견했는데요. 정부의 지원으로 출간한 책이 제대로 된 마무리도 안 된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이 팔릴 책도 아니니 다시 재출간하는 것은 익히 어려운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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