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하지 않은 몰락 - 강상중과 우치다 타츠루가 말하는 불안과 화해의 시대론
강상중.우치다 타츠루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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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재일 한국인으로서, 비판적 지식인이자 세이가쿠인 대학 총장을 거쳐 현재 구마모토현립극장 관장 겸 이사장으로 재직중인 강상중 교수와 일본내에서 프랑스 철학의 권위자이자 더불어 국내에도 큰 반향을 일으킨 ‘반지성주의’에 관한 연구서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 교수의 오늘날의 대표적인 세계문제인 난민, 미국 주도의 글로벌화, 테러리즘 및 일본의 개헌 움직임과 국내 문제에 관한 대담집 ‘위험하지 않은 몰락’을 일독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6년 출간된 것인데요. 2016년 미국 대선 전에 출판된것으로 추측됩니다.

책의 구성은 서장을 비롯해 총 7장의 주제로 되어 있습니다. 난민 문제를 비롯한 국민국가의 액상화, 미국 주도의 글로벌리즘 및 테러리즘 등은 서로 따로 놓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문제로서 연관되어 있는데요. 약간의 요점이 필요하다면 미국의 정치경제질서를 세계에 투영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이중적으로 난민과 그로인한 테러리즘을 불러일으켰다는 논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약간의 추측을 해본다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가 나치에 부역 했던 비시 괴뢰 정권의 과오를 프랑스인들이 제대로 자기 반성을 하지 않고 프랑스가 UN의 상임이사국에 진출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파시즘에 부역했던 불가리아, 크로아티아와 같은 국가들이 대전 말에 태세를 전환시켰던 것처럼 각국이 전쟁의 부역을 해소하지 않고 얼굴을 들고 다닌 이유 등의 만연한 도덕성 결여가 우드로 윌슨의 이 ‘국민국가주의’의 불완전함을 가증시킨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기원은 베스트팔렌 체제까지 그 개연성을 끌고 갈 수 있는데, 아마도 이 점에 대해서 헨리 키신저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앞의 드골의 프랑스가 사과와 반성없이 연합국의 얼굴을 쓰고 세계 무대에 등장한 것을 도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우치다 타츠루 교수의 언급에 속으로 “당신의 일본은 어떠했는지 아는가”가 문득 떠올랐는데요. 사실 뒤에 일본이 미국의 속국에 지나지 않는 자기 비하와 희화화로 부채를 대신하고 있지만 딱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일본의 리버럴한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전후 체제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너무나 많이 목격했기 때문에 우치다 교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습니다. 물론 일본의 대동아공영과 관련하여 “일본이 아시아에 나쁜짓을 했다”는 문장이 나오기는 했지만, “태평양전쟁 하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1942년 당시 일본 정부가 미국과 강화를 맺었으면 아마도 남방 영토는 상실했을테지만 대만, 한반도, 만주의 북방 영토는 보전했을 것”이라는 예측은 교묘하게 감춰진 이중성이라고 느꼈습니다. 저 표현의 문장은 문맥상 상당히 교묘해서 단순한 역사적 가설 내지는 과거의 가능성 정도로 치부하기엔 저 같은 한국인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현재 일본의 아베를 비롯한 정치권의 극우주의가 친미를 기반으로 한다면, 평화 헌법의 개헌을 주장하는 국수주의자들이 미국의 그늘을 떨쳐내려 하지만 소수이고, 그 반대의 리버럴과 좌파가 있지만 일본의 좌파는 한줌도 안되는 세력이고 다수의 리버럴은 이 역사 문제와 전후 체제에 대해 너무나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이 리버럴한 일본 지식인들 역시 앞선 프랑스의 비시 괴뢰 정부에 대한 자기 비판을 제대로 하지 않는 태도와 별반 다를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본내에서 불고있는 이 ‘전후 체제의 탈각’이 단순히 극우들의 정치 운동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본래라면 과거 전범 국가였던 국가가 미국의 개입으로 전후를 종식시키고 남은 유산인 평화 헌법의 개헌을 비롯한 전방위적인 탈각을 정상적인 사고라면 아주 역겨운 일이라고 말해야 되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우치다 교수는 이 평화 헌법으로 인한 평화 체제가 70년간 일본에 평화를 가져다 줬는데 아베의 개헌 시도는 이런 평화를 종식시키는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물론 요시다 독트린을 비롯한 한반도의 전쟁이 일본 부흥의 기초가 되었지만 한국 전쟁의 이득을 분명 적잖이 받은 일본 지식인이 미국이 서쪽으로의 전쟁만 일으킨다는 인식의 한반도 전쟁을 집어 넣은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성찰적 비판이라는 의미를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의 많은 일본 지식인들이 “우리는 미국에 진 것이지, 아시아에 진 것이 아니다”라는 일갈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겠죠.

물론 현재의 세계 상황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은 대체로 받아들일 만 합니다. 프랑스와 독일이 자신들의 경제 발전을 위해 받아들인 이슬람 이민들에 대한 오늘날의 사회경제적 배척은 이중적이다 라는 것도 충분히 공감되고, 이 이슬람 청년들에 의한 국내적 요인의 테러 행위를 일전에 미국 언론인의 “슬럼 지역의 꿈과 희망을 잃은 소외된 이슬람 청년의 아노미적 현상”은 바로 이 점을 짚은 것입니다. 여기에다 “오른손으로 난민을 만들어내면서, 왼손으로 난민을 되돌려 보낸다”는 표현도 이것들과 일맥상통합니다. 따라서 뭔가 거창한 이슬람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그야말로 인종차별에 따른 사회문제인 것이죠. 아마도 그런 해결책으로 “정교분리의 원칙을 철회하고 공적으로도 종교에 대한 관용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판단은 설득력이 있는데요. 다만 공화주의의 원칙인 정교분리의 원칙을 무조건 적으로 해제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죠. 이처럼 오늘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극우주의 운동은 국민국가의 개념적 상실 또는 액상화의 결과일 겁니다. 이 양자가 어느것이 우선인지는 약간 미묘하지만 이러한 과정에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기조가 주입됨으로써 더욱 파편화로 나아가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전체를 짚어보면, 오늘날의 세계가 얼마나 ‘야만의 시기’인지 자의로 깨닫게 됩니다. 극우와 포퓰리즘의 문제, 즉 역겨운 배외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 세계 패권 정치의 전면에 선 것과 일본의 3. 11 지진과 함께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과 그 안전을 지탱하기 위해 지금도 국가의 강요에 의해 투입되고 있는 하청의 ‘인간기둥들’, 과 “자국의 실패를 꼽아보고 규명하는 일은 항상 심각한 방해를 받게 마련이다.”는 뼈아픈 고백은 지금도 많은 실패 국가들에게 들어맞는 수사입니다. 위의 트럼프에 당선으로 인한 백악관이 과거 먼로주의에 의거한 미국 일국주의 가능성을 짚어낸 것은 통찰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시아에 있는 지식인들이 유럽의 난민과 극우주의의 발로에 대해서는 유럽의 지식인들과는 달리 꽤 정확한 분석을 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점이겠죠. 현상을 바라보는 객관적 타자화가 바로 머릿속에 떠오르더군요. 끝으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과거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준하는 지역 질서로 중동 지역에 수니파 벨트가 건설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현재 미국, 중국, 이란 등이 나서서 이를 제지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일대일로가 티베트와 관련 영토 문제와 관련되어 보입니다.

글 중간에 제가 한국인의 입장으로 약간 격앙의 감정으로 2차대전과 이후 전후체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다소 비판을 가했는데요. 이 점을 제외한다면 특히 강상중 교수는 후쿠시마에 손수 취재를 나설 정도로 실천적인 지식인의 전형이기도 합니다. 우치다 교수 역시 일전의 반지성주의와 관련된 일본의 현실 상황을 비판적으로 서술한 바가 있습니다. 이처럼 두 사람의 현실 인식은 꽤 설득력이 있고 우리가 잘 모르고 지냈던 문제들에 대해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꽤 훌륭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냉전의 종식으로 더 많은 자유주의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세계에 기대했겠지만 오히려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고 있는 문제들이 곳곳에 발생하고 있으니 이 점을 역사의 변덕이라고 받아들여야 할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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