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 - 정체성 정치를 넘어
마크 릴라 지음, 전대호 옮김 / 필로소픽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컬럼비아 대학의 인문학 교수이자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 근대 서구 계몽주의에 대한 연구 목적을 삼은 세계적인 정치철학자인 마크 릴라의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를 일독했습니다. 지난 2017년에 출간한 원제는 The Oncce And Future Liberal 이며, 국내에 번역 출간은 올해인 2018년입니다. 우선 저자인 마크 릴라에 대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그가 미국 정치 학회가 수여하는 ‘레오 스트라우스상’을 받았다는 점인데요. 제가 익히 알고 있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과거와 현재의 흑역사를 짚어본다면 뭔가 ‘뒤쪽의 불편함’이 다가온다고 해야할까요. 그래서 덩달아 구글에서 레오 스트라우스 상에 대해 검색까지 해봤습니다. 그리고 올해 62세가 된 이 노련한 정치철학자에게서 왠지 이안 샤피로와 리차드 호프스태터의 그림자가 보이기도 했는데요. 특히 이안 샤피로와의 학문적 유사성이 조금 느껴졌습니다.

이 책은 크게 3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로널드 레이건의 등장과 그의 임기 시절 도래했던 반정치와 사이비정치, 2장은 1960년대 신좌파의 급격한 몰락과 더불어 소통하지 못한 진보주의의 소멸 및 미국 사회에 범람한 사이비 정치적 현실을, 3장은 이러한 정치 현실에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진보주의 및 진보주의 정치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미국의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들과 자신과 보수주의 및 공화당을 동일시하는(마크 릴라의 기가 막힌 표현대로) 정치인들, 또 태평양 건너 일본과 한국의 레이건주의자들은 마크 릴라의 1장에 대해 어쩌면 다소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릴라는 이 레이건의 등장을 과거 대공황 시기의 미국의 위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협력했던 정치와 시민들의 훌륭했던 정치적 데탕트 시대를 빗대어, 이후 레이건 시대에 꽃피운 반정치와 사이비 정치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큰 정부’는 더이상 필요없고, 이 거대한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완벽한 정치적 낭만주의가 현실에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정치적 이상과 목적을 등한시하고 개인의 욕망으로만 돌아가는 매카니즘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처신으로 시민의 정치적 후퇴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꽤 신랄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부를 끌어내리겠다는 선언”은 노년의 공화당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말년의 연금을 지급보증 하는 것이 바로 그 ‘정부’임에도 반정치의 태세로 수많은 시민들을 거짓 선동시킨 것은 아마도 2016년에 도널드 트럼프를 탄생시킨 악화의 기운일 것입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양쪽의 실패라고 봐도 무방한 이 트럼프의 등장은 거대한 제3의 힘. 제3의 기운을 바탕으로 “이런 트럼프의 당선은 민주당의 중대한 패배였고 진보주의자들이 추구해 온 모든 것을 위협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반정치적 보수주의의 공허함을 폭로한 것”이라고 릴라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공화주의적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 세력이었던 티파티 운동과 일맥상통한 미국의 기독교 운동의 변질도 사이비 정치의 유산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자고 하는 이들이 현실은 그와 반대로 가고 있는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자신과 교회의 배타적 동일시는 점차 관용을 지워나가는 것으로 바뀌었고, 대통령들이 먼저 나서서 자신이 교회의 수호자로 자임하는 미디어가 꼬집는 ‘미국이 점차 정교일치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 점은 반지성주의와 종교의 역설이 만나 더욱더 미국사회를 교조주의로 이끄는 것으로, 릴라는 조심스럽게 이 부분을 언급했지만 이는 공화당과 보수 개신교가 얼마나 긴밀한지는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의 미국에는 계몽주의적 접근이 확실히 필요해보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상한 시대의 출현의 업보에는 진보주의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정치적 원칙으로서의 진보주의를 경멸하는 대중이 더 늘어났다”고 인정하며, 이것은 진보가 “여론의 동향을 살피고 합의를 이끌어내고 보폭을 좁히는 습관을 상실했다”는 문제점을 먼저 상기 시킵니다. 또한 그는 그동안 공화당과 보수주의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개인적 활동이 곧 정치적 활동이라는 말은 단순한 나르시즘이 아니며, 이것은 일견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에 나설 동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면서 사실상 그동안 진보주의가 정체성 정치의 함정에 빠져 소통과 합의 및 토론을 등한시 한 것은 분명 시민 정치의 근간을 도외시한 처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보주의 및 진보정치에서 앞으로 선거를 통해 승리하여 제도권 정치로서의 진입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선동주의자 트럼프의 출현은 저자도 인지하고 있듯이 급진주의자들과 급진진보주의자들 및 음모론자들의 등장도 포함되는 것이어서 역시나 다른 글들에서도 익히 보아왔듯, 현재의 여건으로 시민들이 지식과 토론으로 달성된 노련함으로 이것을 견제해야한 합니다. 이 점과 관련해서도 이 책 3장에서는 시민들의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언급하며,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라는 유명한 경구로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민주 정치의 관건은 설득이지, 자기 표현이 아니다라는 것은 건전하고 발전적인 연대와 토론을 말하는 것이겠죠. 개인의 무분별한 사적 이익 추구가 과거로부터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돈을 벌어서 사회적 성공과 부를 획득하는 과정을 아메리칸 드림적 시각이 아직도 깊이 내면화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성공유일적 정제되지 않은 나르시즘적 열망이 그동안 미국 사회에 얼마나 큰 불안 요소였는지는 증명할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평등의 심화와 각 계층의 더욱더 고착화되는 불편한 현실을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에다 우리의 법은 엘리트들의 것이지, 다수의 민중의 것이 아니라는 보수기득권적 시각도 함께 말이죠. 더욱이 미국 정치에서 기존의 자유주의적 합의에 의한 정치적 이상주의가 조지 W. 부시 정권을 거쳐 오바마 정부에 이르러 변질되고 쓸모 없게 된 것은 과거 설득과 토론, 건전한 견제, 발전적인 이상주의를 표방했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원하고 지속가능한 공화주의적 미래와는 달라 보입니다. 그래서 릴라의 이 책은 지리멸렬한 진보주의의 대책을 마련해주는 것 이상의 큰 공감대를 얻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를 우리에게 빼앗은 수많은 문제 정치인들로부터 다시 되찾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관심이 필요해보입니다. 정치적 이견의 상대방 뿐만 아니라 점차 도래하고 있는 반지성주의와 포퓰리즘적 파고 앞에서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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