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자들은 왜?
코리 로빈 지음, 천태화 옮김 / 모요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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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하고 현재 브루클린 대학과 뉴욕 시립대학원에서 정치학 등을 가르치고 있는 코리 로빈은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자 언론인이며, 그의 주요 관심사는 약간의 예상대로 과거 냉전시기의 미국 정치 전반인데요. 원제 The Reactionary Mind인 이 책은 2011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국내엔 이듬해인 2012년 후반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책에도 간략히 소개되어 있지만 코리 로빈의 이 글은 출판 당시 미국 정치 평론계와 일반 정치를 다루는 블로그로부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는데요. 저자는 서두에서 보수주의를 선악의 대비되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어쩌면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상황이 나타난 것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의도했다고는 보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요. 대체로 미국의 보수주의와 보수주의자들의 아픈 구석을 사정없이 드러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습니다.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1부는 6개의 장으로 2부는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처음 1부의 큰 맥락대로 보수주의 자체의 기원은 에드먼드 버크의 위기감 섞인 주장대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동적인 성격으로 잉태되었다고 저자는 요약합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혁명과 이상에 대해 주저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 현실 자체를 타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순응하고 적응하는 일종의 취향의 문제로 이들을 판단합니다. “보수주의는 원래 교조주의 운동이었으며, 취향의 문제”라고 저자가 단정짓는 이유에는 바로 이러한 해석적 기반이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1부 2장의 다소 노골적인 보수주의가 반혁명적인 측면이 있다고 밝히는 것처럼 보수주의가 현실 순응과 현재의 가치에 몰입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저로서도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수주의자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모두에서 민주주의의 진보를 가로막으려 했다”는 주장도 이것을 저자의 편협한 해석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혁명 자체의 반대, 이상의 거부라는 측면에서 인간 정치에 의한 민주주의적 체제를 보수주의가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기득권과 엘리트들에 있어서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하고, 그렇지 않은 계층에게는 달리 말하면 지배 계급에 대해 더 예속을 시킴과 동시에 그것 자체가 이들에게 더 큰 안정과 보장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에서 단편적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죠.

저는 이 책의 일독 중간에 “보수주의가 과연 민주주의를 존중하는가” 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는데요. 허버트 스펜서를 추종하는 사회진화론자들, 사회생태학자들 및 그것의 기반의 보수주의자들이 일종의 인간에게도 생태적 도태를 강조한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허버트 스펜서가 그러한 사회진화론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론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어찌됐든 그런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행태이기도 합니다. 또한 상당한 보수주의자들 가운데에서도 시장 자본주의와 자유 시장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있는 자들도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시장과 자본의 기득권을 갖고 있는 상위 계층에 대한 좀 더 지배적인 자유권을 보장하기 위한 기반으로서의 입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모든 평등한 인간이 누려야 할 자유가 아니라 전통적인 계급적인 이론의 수단에서 적잖은 보수주의자들이 이러한 관념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엔 이러한 보수주의가 민주주의적 가치에 얼만큼 동조하고 편입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사실상 회의적인 판단이 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지배와 의존이라는 관계의 존재만으로도 우리를 ‘자유인’에서 노예 상태로 전락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고 강조하는 것도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나 기득권의 좀 더 수월한 움직임, 반대의 진보와 좌파 세력에게 이러한 점을 주지시키고자 하는 것도 신념 체계로서 ‘보수주의’가 반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와 정치적 진보가 끊임없이 인류의 역사를 통해 노정해 왔는데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체제에 대한 소수의 결속과 이득을 표면적으로 내새울 수는 없겠으나, 그것을 잠정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이들의 본질이기 때문이죠. 물론 저는 사회 가치와 체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의 균형적 발전이 분명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만 현재 미국의 사회정치 현실이 트럼프를 포함한 우익 포퓰리즘의 대두 뿐만 아니라 종래의 티파티 운동이 진보와 좌파를 제거 대상으로 노골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할 만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보수주의 자체가 새로울 것도 뭔가 가치 중심적인 것은 이 책을 통해서도 별반 드러나지는 않지만 진보의 개혁 보다도 보수의 계급 정치적 폐쇄성이 시민 사회와 민주주의 자체에 있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미국은 이런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데요. 이 책 2부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격렬한 냉전 시기에 CIA와 보수 진영의 전략가들이 니카라과와 파나마, 온두라스에 효과적으로 투입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정치 및 군사 작전의 결과가무고한 인명 피해를 수반했다는 점에서 이것이 그냥 단순한 ‘부수적 피해’로 국한될 것인지는 모두가 자문해봐도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막대한 부수적 피해를 생산해가며 기존의 가치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미명이 언제까지 그 근거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이 책을 통해서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온전한 정치를 위해 보수주의가 자신들의 유일성만을 위해 움직일 것이 아니라 그외 다른 사상, 이를테면 동성애와 여성 인권, 진보주의와 공존하고 공생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저자가 말하는 보수주의 자체의 급락과 지지부진함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수주의가 다른 상반된 가치들을 제거와 도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민주주의가 주장하는 가치로서 토론과 타협 등으로 기득권과 엘리트 지배 정치, 계급주의적 동의에만 신경쓰지 말고 좀 더 대의적인 건전한 시민 정치와 민주주의의 성숙에 신경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오해와 억측을 받고 있는 허버트 스펜서는 보수주의자들이야 말로 민주주의의 온존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네오콘과 보수주의의 아이콘인 아인 랜드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등, 저자의 태도를 불편하게 여기고 터무니 없는 것이라 여기는 보수주의 및 보수주의자들이 이 책 자체를 백안시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양대 가치에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차포를 떼고 보면 이처럼 단순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그동안 여러 측면의 과오가 보수주의로부터 촉발되었고 그 명확하지 않은 태도로 말미암아 많은 시민들로부터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 어쩌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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