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 폭력과 갈등으로 얼룩진 20세기의 기원
로버트 거워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김영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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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현재 아일랜드 더블린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교수이자 전쟁 연구 센터 소장인 로버트 거워스는 올해 한국 나이로 43세인 젊은 학자입니다. 이 책과 같이 유사한 전쟁사론을 쓴 해외의 여러 학자들에 비해 연구 경력이 일천하다고 폄하될 수도 있겠으나 그의 책을 이렇게 일독해 보니 기우에 불과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만큼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 1차 대전에 대한 본질을 이 책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제는 ‘The Vanquished : Why The First World War Failed To End’ 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일찍이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는 1차대전이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학자들과 지식인 사이에서 이 전쟁 기간에 대해 다소 논쟁이 있지만 보통 1914년부터 1918년 11월까지로 인식하고 있는데요. 이 책의 저자인 거워스는 1918년이 아니라 그리스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국지전이 종료된 1923년경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기의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등장을 감안한다면 양차 대전의 경계 설정이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전쟁사의 연대기적 서술을 이해한다면 개략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1800년대 초반의 프랑스의 나폴레옹 전쟁을 제외하면 1차대전 이전 시기까지 빈체제 이후의 구체제 회귀와 유럽이 본격적으로 식민지 건설을 발전시킨 시기로 그전까지 식민지 지역에 있던 원주민들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과 같은 전투 경험만으로 유럽에서의 이 전쟁에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등의 왕정 체제와 귀족이 전후의 결과로 싸그리 소멸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겁니다. 이에 거워스는 제국의 소멸과 대다수 귀족들의 퇴출이 민주주의의 씨앗을 틔우는데 일조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론이 유럽 백인들만을 위한 테제로서 그외 유색인종에 대한 자결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강조한 윌슨의 태도는 이 당시에도 얼마나 오리엔탈리즘적 인종주의의 시기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발생한 볼셰비키 혁명의 결과로 이념적 투쟁이 실제로 처음 라트비아의 리가 등지에서 나타났고 그것의 증오의 결과로 무자비한 학살과 복수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런 폭력이 이성을 무너뜨리는 장면의 곳곳을 거워스는 여러 기록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1918년 6월과 12월 라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약 10만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고 언급되는 것은 뒤이어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종청소’의 무자비함이 1차대전에서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동안 이미 민간인과 전투원 사이의 구분은 이런 유형의 갈등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많은 증거 자료들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대전 기간중 프랑스와 독일간의 극렬한 참호전과 상대방에 대한 무차별적인 독가스 살포 외에도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1차대전을 설명하는 여러 수단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2차대전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항공 폭격은 그 즈음이 처음이 아니라 1차대전 당시에도 러시아 혁명 시기의 러시아 백군과 적군 사이에서도 초창기 이념 대결의 장에서 상대방에게 가해진 비참한 살육전에도 보여집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뤄진 종전 체제 기간 즈음에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후 세계는 ‘민주주의에 안전한’ 곳이 될 것이다”라고 판단했지만 이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자인 거워스는 글을 쓰는 내내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등을 중부 유럽이라는 특정 공간을 통해 1차 대전을 바라보고 있는데요. 이들 지역의 대두하는 민족주의적 열망이 크게 좌절됨으로써 뒤이어 따라오는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인 수정주의적 입장과 국민주의적 민주국가 수립에 실패함으로써 이미 붕괴의 결말이 예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쟁 자체가 무조건 정의로울 수는 없지만 이 시기의 많은 국가들이 이성을 도외시하며 벌인 일들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례와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강제력으로 억눌려 있던 이 중부 유럽의 민족주의가 이들 지역에 민주주의 국가를 완성하는데 일조가 되었을지는 이 점 자체가 이제 역사의 가정에 불과해졌지만 배타적 민족주의가 민주국가 수립에 조력자가 될지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입니다. 패전과 더불어 중부 유럽에 국경선이 재정립 되면서 관계국들은 서로 너나 할 것 없이 수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을 추방시키고 자국인들로 채우게 됩니다. 영토의 구획 과정은 역시나 정치 논리에 의해 사람들을 뒷전으로 만들고 이러한 경험은 아마도 고스란히 뒤에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인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히틀러가 자신이 총통이 되어서 오스트리아를 강제로 독일에 병합시키고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 야욕을 드러낸 것은 꼭 베르사유 협상 이후의 직면한 굴욕감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전후 과정을 스스로 이용하기 위한 학습 효과가 아니었을까 고민해봤습니다.

끝으로 저자인 거워스가 제시한 여러 정보들 중에서 레닌과 독일과의 관계가 흥미로웠는데요. 저는 일전에 켄 폴릿의 소설을 통해 러시아 혁명 시기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레닌과 그를 통해 러시아에 혼란을 부추기려고 했던 독일 제국의 모략을 접한바가 있는데요. 이것이 역사적으로도 신빙성이 있던 사료였나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더불어 여느 전쟁사, 대전사와는 달리 민족과 이념, 국가와 숨겨진 정치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읽다보면 가슴 아픈 기록도 너무나 많고, 특히 항간에 알려진 대로 전쟁이 고도의 정치 행위가 되지 못하는 것은 곳곳에 자리한 수많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붕괴와 최소한의 정의는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일 겁니다. 라트비아 리가에서 벌어진 ‘여자 소총수들’에 대한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복수 행위는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봐야겠죠. 또한 전쟁을 수시로 입에 담는 정치인들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도 이 책의 교훈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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