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전쟁론 (반양장) - 손자와 클라우제비츠를 넘어
마틴 반 크레벨드 지음, 강창부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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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마틴 반 크레벨트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일생의 대부분을 이스라엘에서 보낸 군사사와 전략에 대한 세계적인 석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런던정경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보아 엄밀히 말하면 그를 역사학 학자로 인식해야 하지만 이스라엘을 비롯한 노르웨이와 캐나다 등지에서 국방 조직 자문가로 활동했던 특이한 이력도 갖고 있습니다. 아마도 전쟁사나 군사사의 대부분이 역사와 관련되어 있어서 역사학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전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손자와 클라우제비츠와 같은 소수의 전쟁 전술 이론가들만이 알려져 있는데요. 과거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에 이르는 많은 전쟁의 일면들이 전략과 전술만으로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렵게 되었습니다. 총력전과 같은 단계에서 경제와 사회를 빼놓고는 설명이 안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책은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6장인 전략을 다룬 부분까지 종래의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전쟁을 설명하고 있고, 7장인 해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양상의 전쟁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인 마틴 반 크레벨드는 전쟁의 속성에 관해서 ‘전쟁은 국제적 무정부 상태의 산물’이라고 정의합니다. 일찍이 많은 학자와 사상가들은 전쟁 자체가 고도의 정치적 산물이라고 여겨왔죠. 국제 정치가 본래 무정부주의적인 어떤 틀에 연연하지 않는 혼란스런 상황임을 우리가 인지한다면 크레벨드의 앞선 전쟁에 대한 언급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더불어 글의 마지막 장에서도 ‘전쟁은 악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아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전쟁을 분석하고 분류했지만 이것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불행한 일이라는 인간의 양심이 느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보기에도 ‘전쟁의 원인이 전쟁의 일부가 아니다’라는 저자의 단언에 절로 동의하게 되는데요. 여기의 이 글에서도 많은 부분에 걸쳐 할애되고 있는 전쟁의 동기와 과정 그 결말이 연구적 결과물의 문체로 설명되고 있지만 ‘살육과 무차별적인 강간, 재산피해, 약탈’ 등은 고대의 부족 사회의 소규모 전쟁에서부터 있어왔던 파급물로 계몽주의 시대에 사상가들이 이런 전쟁에 대한 연구를 일정 수준의 틀로 해석하고 분석했지만 이 전쟁의 과정과 결과로 나타나는 인간과 문명의 파괴를 제대로 설명하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장자크 루소가 ‘인간의 기본적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말한 것은 간혹 인간 본연의 이성으로도 포장하기 힘든 최악의 모습을 전쟁 자체가 속성으로서 갖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전략, 전술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전쟁의 일반적인 측면의 언급과 주장을 위해 사용되는 대체적인 수단들은 저자의 전공답게 로마 시대부터 근현대의 여러 전쟁 등을 꽤 상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많은 전쟁사들의 향연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사실 많은 문명의 역사들이 정복과 지배가 빠질 수는 없어서 그것의 실현 수단으로 애용됐던 전쟁이 제외될 수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책의 제목만 봤을 때는 군사학의 측면에서 한정되고 유일한 개론서로 처음엔 느껴졌지만 크레벨드의 정확한 취지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일반인들을 위한 교양서적인 약간의 유익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갖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글의 장점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이후 7장부터 논하고 있는 해전부터 인류 역사에서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전쟁의 변화에 대해 단순히 전략의 유무에 대한 한정이 아니라 총력전과 같은 분위기에서 제한적인 성격으로서의 전쟁 유발은 이제 더이상 보기 힘들어졌다는 요지가 중점적인 성격인 것 같습니다. 1차대전에는 다소 미미했지만 2차대전 이후부터는 독일과 일본에 행해진 공군력에 의한 폭격으로 엄청난 민간인 희생과 괴멸적인 파괴를 불러와 상대 적국에 대한 제한적인 군사적 승리 만으로는 전쟁의 추를 바꿀 수 없어 총력전의 시점에서 대량 파괴가 수반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 전쟁을 더이상 정치적 수단으로만 여길 수 없는 의미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전쟁 수행에 대한 요건과 과정, 리더쉽과 같은 꽤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뒤이어 나오는 핵무기 시대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전쟁의 승리에 대한 전통적인 우리의 개념이 우리들의 손에서 멀어지지 않았나 또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가 아쉽게 이 부분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꼭 국제 사회에서의 전쟁법이 전쟁 자체의 비이성적인 측면을 강제할 수도 있고 그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전쟁 범죄를 행한 국가에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게 만드는 명분이 됨으로 승자와 패자로 갈리는 전쟁의 일반적인 결과론적인 상황은 핵무기 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의미해지지 않았나 싶네요.

저자인 크레벨드도 9개국이 보유한 핵무기가 그 자체로 어떠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없으며, 핵확산 방지에 나서는 비핵보유 국가들의 상당수가 이미 핵보유국들 간에 ‘핵무기적 국제 균형’이 이미 심각하게 불안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국제적 행동을 보이는 것이라고 저는 그리 해석이 되었습니다. 핵보유국 국가들간의 재래식 전쟁이 결국 그 끝에 인류 파멸을 항상 끌어들이려 하고 있는 측면의 절멸 파괴성으로 굳이 2격을 논하지 않더라도 이 ‘불안한 균형의 시대’가 어찌 될지는 학문의 방법으로 유추하기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케네스 월츠와 같은 신현실주의자들이 국제사회에 핵확산이 평화에 이롭다는 주장은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바로 이 점이 그 증거가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저자는 전쟁의 미래는 있는것인가? 라는 자문을 통해 우리 시대에서도 정치/정책의 산물이라고 봐도 무방한 이 전쟁이 거대한 아포칼립스적인 파멸로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국제 정치 행위자들이 이 짧은 시기의 평화를 우습게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에게 있어서 충동과 감정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엘리트들이 밝히고 싶지 않은 내심처럼 전쟁 상태에서 다수의 국민들을 익명의 지원병들과 같은 수단으로 취급해 여차하면 전쟁으로 해결하겠다는 매우 편의적인 생각을 우리들이 제어하고 관리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올더스 헉슬리나 조지 오웰이 전망했던 전쟁에 의한 디스토피아를 이렇게 예방할 수 있는 것도 분명 가능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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