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대 국가 -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허버트 스펜서 지음, 이상률 옮김 / 이책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한때 유럽과 특히 미국에서 각광받았던 허버트 스펜서는 소위 “지배 계급과 당시 기득권들의 이익을 위한 사상을 고안했다”는 아직까지도 검증되지 않은 위의 이유만으로 많은 학자들로부터 외면을 받아왔습니다. 특별히 이 책과 관련해서 역자는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이러한 흐름에 일조를 했으며, 그의 ‘미국 사상에서의 다원주의’의 스펜서와 관련된 설명이 명백하게 오류에 가깝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일단 호프스태터의 ‘미국 사상에서의 다원주의’는 일종의 사회적 다윈주의의 출현과 비판을 담은 글로써 그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호프스태터가 허버트 스펜서를 일방적으로 오역했다고 보기에는 이 스펜서의 ‘개인 대 국가’에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하더군요. 그것은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요. 사실 호프스태터의 큰 학문적 업적은 이후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천편일률적인 기독교 문화에 대한 비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는데요. 앞전의 사회학적 다윈주의와 관련된 호프스태터의 의견은 ‘매카시즘’의 광풍을 겪은 그 당시 학자로서의 특수한 배경도 영향을 끼쳤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는 역자의 분석대로 과연 호프스태터가 스펜서를 오독한 것인가를 조금 바탕에 두고 이 ‘개인 대 국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개인 대 국가’는 1884년 컨템포러리 리뷰에 발표한 4개의 논문을 엮어 한권의 책으로 출간한 것을 약간의 주석을 덧붙여 재출간된 1892년 판을 번역한 것이라고 역자가 후기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은 당시 영국 토리당에 대한 사회 전체에 대한 일종의 개입과 통제에 대한 비판이고, 2장은 점차 영역을 넓히고 있던 사회주의와 비슷한 정부의 개입에 대한 저자의 입장과 비판을 담고 있고, 3장은 시장에 대한 법적인 개입과 요즘 식으로 말하면 사회 소외 계층에 대한 입장과 이와 관련된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인 폭넓은 인용, 4장은 자연법과 국민 주권에 대한 소개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스펜서는 과학에서 특히 생물 진화론 적인 입장과 토머스 홉스와 유사한 주장들과 개인의 자유권에 대한 옹호를 여러 부분에서 밝히고 있는데요. 몇몇의 주장들은 문득 하이에크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일단 각 분야에 대한 정부의 통제가 여러 측면에서 과도하다고 여기고 있고, 개인이 타인에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마땅히 자유를 누리고 정부가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 의회 정치와 관련되서는 집단 지성이 주도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고 이의 배경은 아마도 인간과 사회에 대한 매우 강한 현실주의적 입장과 도태와 같은 진화론적 입장을 받아들여서 조금 과격하거나 받아들이기에 애매한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잘못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쓸모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용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 표현된 ‘쓸모없는 사람들’ 과 마찬가지로 요즘말로 사회에서 직간접적으로 도태된 사람들을 쓸모없다거나, 사악하게 가난하다거나 라는 식으로 배외된 사람들을 생물학식으로 분류하고 있는데요. 저는 이런 부분에서 호프스태터가 스펜서를 완전히 오독하지는 않았다고 여겨졌습니다. “재능이 적은 자들이 재능이 많은 자들 만큼이나 또는 더 많이 번성해 그 수가 늘어나도 사회에 아무런 해악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라는 주장은 매우 직접적이고 배타적인데요. 스펜서의 이러한 인식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맞는다고 여겼다면 그가 이러한 계층들을 위한 정부의 개입에 부정적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후술에 따르면 부유한 자들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세금으로 이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열등한 자들의 수를 늘어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도와준다면 그러한 도움은 해악을 수반한다”고 말하는 것은 후에 역사에서 히틀러의 나치가 주장한 것과 매우 흡사해 개인적으로 소름이 끼치더군요.

뿐만 아니라 공리주의에 대한 완전한 지지보다는 스펜서는 비판적 입장을 갖고 있고, 결국 이렇게 기반한 주장들이 못사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도로까지 저는 인식되어 정부의 역할론에 대한 스펜서의 입장이 어떤 식인지 대충 짐작이 되더군요. 현재로선 그가 죽고 없는 상태이니 그의 상세한 변명을 듣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책 하단에 크게 장식되어 있는 ‘국가의 의무는 정의를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이 책을 통해 대충 짐작이 되는군요. 경제관에 있어서 비교적 자유 시장에 대한 입장과 통제, 특히 가격 통제에 대한 부분과 개인들이 마땅히 누려야 되는 자유에 대한 입장, 당시에 통치권을 행사하던 정부와 정당, 사법체계에 대한 여기에 실린 비판 등을 봤을 때 글이 출판된 당시 시대 배경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오늘날의 인식으로는 꽤 논란이 많은 주장들이 주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이 이기적이고 악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 질서와 규범을 위해 해당하는 마땅한 체제를 각 국가마다 갖고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겠죠. 인권과 기본권과 관련된 부분도 헌법이 보장하는 체계로 이뤄지고 오히려 더 고도화되고 있는 상황인데요. 물론 상당한 민주주의화가 진행된 국가들이겠지만, 또한 가까운 사례로 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수많은 금융인들의 도덕적 해이를 마찬가지로 지금도 용인하고 마땅히 대마불사와 같은 논리로 정부가 세금을 들여 기업과 은행들을 지원하는 것이 마냥 올바르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양차대전이 끝나고 냉전시기를 거쳐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이제는 무조건적인 자유 이념 만으로는 사회를 꾸려나가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빈부의 격차 만으로도 이미 과거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스팬서가 살던 시절과 그가 주장한 것들이 얼마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좀 더 인간다운 삶과 균형적인 발전의 사회를 위해 이런 사회학들이 필요한 것처럼 실로 저같은 현대인의 인식으로는 전체적으로 스펜서의 말들을 이해하기는 어려워습니다. 물론 그의 글을 접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니 한번 다른 글을 찾아 읽어봐야겠단 생각은 들더군요. 부족한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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