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鄭敾: 1676 - 1759)의 호 겸재(謙齋)는 주역(周易)에서 유래한 겸(謙)괘와 정진(精進), 재계(齋戒) 등을 의미하는 재(齋)를 합한 말이다. 겸과 재를 합해 호로 쓴 사람이니 겸손한 선비라 부르는 것이다.
곤(昆)괘: ☷‘’가 위에 ‘간(艮)괘:☶’ 아래에 있는 괘가 겸괘이다. 정선은 진경 산수화의 개척자이자 완성자라 할 수 있다.
그의 출생 연도는 1676년으로 바흐의 1685년과 비슷하고 사망 연도는 1759년으로 바흐의 1750년과 비슷하다.
물론 바흐보다 9년 먼저 태어났고 9년 늦게 사망했으니 18년을 더 살았다.
내게 ‘왜관(倭館)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이란 책이 있다. 돌아온 문화재 총서의 첫 출간작인 이 책에 겸재정선화첩이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된 사연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겸재정선화첩의 귀환은 1964년 독일에 광부(鑛夫)로 파견되어 갔다가 계약 종료 후 공부를 시작하게 된 유준영이란 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분은 광부 계약(3년) 종료 후 쾰른 대학교 부설 본과 진학 과정인 슈투디인콜레그에 입학한 데 이어 우리나라의 학부 과정에 해당하는 쯔비쉔프뤼풍에도 합격했다.
후에 이화여대 등에서 교수(동양학과)가 된 이 분이 정선의 ‘청풍계도(淸風溪圖)‘와 마주친 것은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쾰른 시립 동아시아 미술박물관 도서실에서 일제 강점기에 출간된 책들을 뒤지던 중이었다.
그 후 이 분은 오스트리아 알프스 북쪽 도나우 강 지류인 암머 호수가에 위치한 분도회(베네딕트회) 오틸리엔 수도원 박물관에서 겸재정선화첩을 발견하고는 숨이 멈추는 듯 했다고 한다.
이 분은 ‘청풍계도(淸風溪圖)’를 보았을 때는 중국이나 일본 수목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거친 붓질에 죽비(竹篦)로 한 대 얻어맞은 듯 했다고 했다.
겸재정선화첩이 어떤 경위로 오틸리엔 수도원에 가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107 페이지)
겸재가 우리 산천, 우리 사람, 우리 의식을, 자화상이라 할 것을 그린 배경에 관심이 간다.
겸재가 활동한 18세기 전반기는 산천 유람을 다녀와 그것을 기록(그림)으로 남기는 문화가 유행한 시대였다.
나는 겸재가 보인(또는 취한) 기법보다 정신(가령 중국 진서晋書에서 유래한 ‘날개가 돋아 시선이 되었음‘을 뜻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우화정에서 배를 탄다는 뜻의 우화등선羽化登船으로 비튼(?) 패러디 정신!)에 관심이 있다.
[화가의 천분을 타고나지 않은] [대기만성형의 화가](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62 페이지) 겸재, 그가 어떤 책들을 읽었는지 아주 궁금하다.
그리고 그가 알았던 풍류(風流)보다 그가 대기(大器)가 되기까지 치른 노고와 쌓은 내공과 결행한 분투(奮鬪)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