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3일 패치라는 이름의 비디오 게임 디자이너가 미국 오리건주 법원으로부터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무성(無性) 판정을 받아냈다.

패치는 원래의 성과 이름을 무효로 하고 무성 판정과 함께 새로 사용하게 된 ‘성명 구별 없는 이름’이다. 패치의 사례는 사상 최초이다.

지난 2013년 앤서니 보개트의 ‘무성애를 말하다’를 읽은 이래 약 4년여 만에 듣는 희유(稀有) 아니 초유(初有)의 소식이다.

무성애는 성욕은 느끼지만 상대와 성관계를 원하지 않는 경우, 감정적으로 끌리지만 성욕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성욕도 느끼고 감정적으로도 끌리지만 성관계를 거부하는 경우, 성을 혐오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 등을 말한다.

보개트는 무성애자의 비율을 1%로 추정한다. 이들 가운데 13% 정도가 자신의 정체성이 남성 또는 여성으로 규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 성애자들 가운데 남성 또는 여성으로 규정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비율은 1 ~ 2%이다.

구글에 무성과 무성애의 차이를 논한 글들이 많지만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여섯 살 무렵부터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말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자신은 트랜스젠더도 아닌 것 같다는 패치의 말이다.

한 외국 사이트는 성 정체성은 넓은 스펙트럼을 지니지만 패치는 그 스펙트럼의 어떤 곳에도 위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궁금한 것은 이 부분에 대해서이다. 판결 이전 패치가 간직했던 정체성은 정확하게 남성과 여성의 중간이었을까, 란 점이다.

뷔리당의 당나귀란 개념이 있다. 뷔리당은 14 세기 초, 중반에 주로 활약했던 프랑스의 철학자겸 물리학자인 장 뷔리당을 말한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을 반박해서이기보다 뷔리당의 당나귀란 개념으로 인해서이다.

당나귀가 질과 양 양면에서 정확히 똑같은 두 개의 건초더미의 정확히 중간 지점에 있을 경우 즉 어떤 차이도 없는 경우에 처하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굶어죽는다는 것이다.

뷔리당의 이야기는 뒤얽힌 채 알려져 있다. 뷔리당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했다. 조롱의 의미가 다분한 뷔리당의 당나귀란 개념은 뷔리당이 제시한 것이 아니다.

이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했던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부정(결정론을 제시)한 뷔리당을 조롱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다.

수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이란 책에서 뷔리당의 반대자들이 제시한 가정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한다.

피셔는 물론 뷔리당에 대해서 반박하는데 이는 그가 역사적 배경에 무관심해서일 것이다.

피셔의 논리는 현실에서 완전히 동일한 건초더미는 없고(“물리학적 세계는 통계적 편차로 가득하고, 생물학적 세계는 변이들로 가득하다.“),
두 물체 사이의 정확한 중간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이상적인 공간에서만 가능하기에 당나귀는 어느 한 쪽으로 가서 건초를 먹어 주린 배를 채워 굶어죽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정신의 동요에 빠져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인간은 당나귀이지만 그런 정신의 동요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것 즉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사유의 힘이라는 말을 했다.

잘 알려졌듯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를 부정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자유는 인정했다.(이 부분은 길고 복잡한 논의를 거쳐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심강현의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3부 ‘자유, 전염된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의 욕망으로’를 참고하면 좋을 것.)

이제 처음 이야기로 돌아와 말하면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성 정체성 스펙트럼의 정확히 중간 지점에 위치할 수 있을까, 란 의문이다.

미세한 차이의 물매(기울기)가 있음은 물론일 것이다. 물론 패치는 극히 사소한 차이는 가지 치고 크게 보아 중간이라 의미 없다고 말했을 테니 내 이야기는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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