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분이다. 정치에서 배제되었으면서도 실학적 작업에 몰두하지 않고 “주자학의 심장부를 정면으로 돌파”(이정우 교수의 표현)한 분,

주역(周易)의 세계관을 가졌으면서도 음양오행을 비판한 분, 서양의학을 수용한 뒤 중국의 의학사상을 조선의 의료현실에 수용, 발전시킨 분,
오늘 밤에 마셔야 할 술을 자꾸 내일로 미루면 저 환한 달빛 아래 술을 마실 기회가 영영 사라지고 말 수도 있다는 시(友欲月下飮: 우욕월하음/ 勿放今夜月: 물방금야월.. 若復待來日: 약부대래일, 圓光已虧缺; 원광이휴결)를 쓴 분,

“수십 년간 역(易)을 연구하였지만 나 자신의 일을 가지고 점을 쳐 보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신유년 봄에 장기(長鬐)로 귀양을 가서 꿈에서 운명을 점쳐 ‘둔지복(屯之復)의 괘를 만난 뒤

“처음에는 둔했지만 이것이 변해 양복(陽復)이 되었으니 모르긴 해도 마침내 기쁜 소식이 있겠구나!”하고 말한 분.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하기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하지 않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그만두어야 할 일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에 남아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두지를 못한다.”고 스스로를 표현한 분,

’의심도 하지 않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하는 것’은 ‘망설임이여, 겨울 내를 건너는 것이로다. 주저함이여,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함이로다’란 의미로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내세운 것과 대조적이게 “의심도 두려움도 없”었던 분,

‘천주학으로 인해 서양 과학 사상까지 섭렵하여 사상의 폭이 넓어졌지만 쓰라린 유배 생활을 감내해‘(박석무 교수의 표현)해야 했던 분, 한 동양철학자로 하여금 ’주희에서 정약용으로’에서 ‘정약용에서 주희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게 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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