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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 그 후 - 우리가 만난 비체들
이현재 지음 / 들녘 / 2016년 10월
평점 :
이현재의 '여성혐오 그 후, 우리가 만난 비체들'은 여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실에 개입하고 싶었고 차이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던 저자가 비체(abject)라는 개념을 재고하면서부터 용기를 내 쓴 글이다. 어떤 규정된 오늘 상도 아님을 의미하는 비체라는 말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에 의해 학술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개념이다. (부정어를 의미하는 a와 대상을 의미하는 object가 만난 단어인 abject.)
최근 나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는 입장을 내세웠으나 그것은 약자에 대한 폭력 즉 권력관계에 의한 것이니 약육강식 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물론 그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말을 했을 뿐이다. 문제는 약자에 대한 폭력은 괜찮다는 투로 말하는 그의 태도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약자에 대한 폭력의 한 부분이 아닐지?
비체는 흐르고 있기에 경계없는 존재, 공포감을 주는 대상이자 더러운 존재로 여겨져왔다. 비체들은 통일된 이념을 갖지 않으며, 남성과의 경쟁에도 익숙할 뿐 아니라 페미니즘을 거부하면서도 페미니즘의 전략을 수행한다.(13 페이지)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비체의 해방적 잠재성에 주목해아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론적 언어는 한계를 가지고 그런 한에서 잠정적일 수 밖에 없다.(15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문제는 뿌리 깊고 광범위한 여성혐오, 그리고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여성들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특정 생각이 담론화하는 방식을 문제삼는다. 저자는 게일 루빈, 뤼스 이리가레, 우에노 치즈코 등의 논의로 여성이 대상화, 타자화되는 메커니즘을 논한다.
저자는 여성혐오의 구조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는(못하는) 논자들을 지적한다. 여성혐오의 구조가 강고하다는 사실을 강조할수록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음을 자인하는 셈이 아닌가?라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저자는 집단 내의 다양한 차이들을 논한다. 남성이 남성들이듯 여성 역시 여성들인 것이다. 타자 배제적인 여성적 주체가 되지 않고서 타자화/대상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관건이다. 마사 누스바움에 의하면 혐오는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문제이다. 혐오는 상대가 공격이나 손상을 주지 않을 때에도, 특별히 부당하게 취급되지 않은 경우에도 발생한다.
누스바움에 의하면 혐오에 대한 핵심적인 관념은 전염이다. 혐오 대상은 전염성이 있는 오염물로 간주되는 것이다. 비체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그것이 동일성이나 체계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비체는 경계를 넘나드는, 그래서 더럽다고 여겨졌던 것이며 잡힐 수 없기에 공포스러운 것이다.(3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여성들이 비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우리는 또한 여성 혐오를 벗어나는 다양한 비체화의 전략들을 가시화할 수 있다. 젠더 패러디, 가면 쓰기, 잡년 되기와 비참하게 되기, 여성성의 재전유 등은 비체 되기의 전략들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패러디를 원본의 모방이 아니라 모방의 모방으로 보았다. 젠더 정체성에는 어떤 원본도 없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미러링 역시 젠더들의 패러디이다. 관건은 패러디를 수행하는 비체가 기존의 지배적 남성 주체와 어떻게 다른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녀/ 창녀 구분을 넘어서는 것도 필요하다. 여성들간의 관계만으로도 충족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레스비어니즘, 성의 정상성을 이야기하는 모든 지배적인 사고에 의문을 던지는 퀴어 되기의 전략 역시 여성 혐오에 대항하는 다양한 실천들이다. 문제는 비체가 된다는 것은 혐오의 타깃이 된다는 것이다.
비체는 주체적 인식틀을 벗어나는 급진적 타자이다. 비체 혐오의 깃발은 사랑이라는 욕망의 이름표를 달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양한 비체 되기 전략들은 소통이나 연대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저자는 우리 시대를 도시화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51 페이지) 도시화는 전 지구, 전 행성 곳곳에 스며들었다.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도시가 아니라 도시적인 것, 도시적 사회 안에 살고 있다.
전지구적 도시화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의 확산을 의미한다. 저자는 도시화를 감정노동과 불가결의 것으로 보며 노동 현장에서 생산에 필요한 감정은 과도하게 요구되는 반면, 불필요한 감정은 억압되고 억제된다고 설명한다. 도시는 권력이 집중되는 곳이기보다 문화의 거점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신념, 젠더 정체성에 대한 관념들은 다양하게 얽혀 있다. 도시적인 삶은 그야말로 다양한 신념체계들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내가 이해하기 힘든 급진적 타자를 경험하는 과정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58 페이지)
도시화는 다양한 문화의 거점화를 의미하지만 우리는 아직 도시적 삶 속에서 타자에 대한 폭력을 피해 가는 문화와 규범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59 페이지) 도시적으로 산다는 것은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감정을 안고 산다는 것이며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감정의 격동을 안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59 페이지)
여성 비체들은 여성혐오가 지닌 혐의를 폭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여성혐오의 논리를 그대로 차용한다.(71 페이지) 저자는 여성 비체들이 여성혐오 세력과의 완전한 동일시(미러링)로 인해 비체성이 탈각(脫殼)되는 것을 우려한다.(73 페이지) 저자는 감정적 결속만으로도 자족한다면 이들은 말을 원치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 없는 한 연대 세력은 형성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75 페이지)
저자는 경계를 넘나드는 비체의 탈경계성은 역설적으로 언어적 경계를 필요로 하며, 비일관성은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하고, 궁극적인 목적을 상정하지 않는 변이의 과정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설득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76 페이지) 저자는 인정(認定)이 나와 타자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한 라캉의 말대로 나는 어느 정도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물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해서 타자의 욕망에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와 타자의 욕망이 어디서 결합할 수 있는가, 이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모든 타자들과의 연대를 이룰 수 없음에 주의하자. 새로 부상한 비체들의 말 만들기는 기존의 페미니즘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고 혼종(混種)의 성격을 띨 수도 있으며 다양한 입장 차이로 나아갈 수도 있다.(79 페이지) 저자는 페미니즘들의 역사는 잡히지 않는 여성 비체를 주권의 사각지대에 남겨놓지 않기 위한 시도였다고 말한다.(79 페이지)
국내의 경우 여성혐오의 부상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의 경제적 위기감 및 신자유주의의 확산을 기점으로 분석된다. 중요한 것은 여성 혐오는 남성들이 여성과 경쟁하게 되면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의문은 경제적 위기로 인한 불안감은 왜 분배투쟁으로 연결되지 않고 여성혐오로 나타났는가, 이다.(84 페이지) 주목할 것은 평등주의자 퇴색하고 무한 경쟁만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경제적 불안이 난민, 이주민, 유색인, 성소수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로 투사(投射)되었다는 것이다.(84 페이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정치개혁의 실패와 신자유주의의 가속화를 제도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의 것이자 자연적인 것으로 느끼게 하는 전략이 먹혔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대안적 질서를 생각하기보다 실망과 좌절, 허무와 무관심 등에 빠지거나 혐오와 같은 반동적 복고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 임옥희는 이런 상황을 정치적으로는 반동, 심리적으로는 퇴행의 시대로 규정했다. 앞에서 강남역 살인 사건을 이야기했는데 피의자는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저자는 성취원리에 따르는 도시적 삶 속에서 경제적 차원의 요구는 인정의 수사학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91 페이지) 문제는 성취원리가 제도적, 물질적 차원들과 결합하지 않은 채 개인적 경쟁 관계만을 부추기도록 작동하면서 병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들은 자신들의 자아를 계발하여 변신하기 바쁜 개별화된 개인으로만 남는다. 홀로 자기계발을 함으로써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부담을 안는 시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이다. 저자는 도시적 삶의 양식이 되어 가는 과열된 성취원리에 따른 개인의 경쟁을 성취인정을 둘러싼 투쟁으로 명명한다.(93 페이지)
저자는 여성을 혐오하는 집단들이 강한 인정욕망을 드러내는 일차적인 이유를 성취원리, 성취인정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인정(認定) 행위가 궁극적인 변화와 연결되지 않은 채 과거의 관계를 재생산하기만 한다면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99 페이지) 규범적 인정은 언제나 물질적 변화와 함께한다. 제도적, 물질적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자아계발의 경쟁은 불평등을 재생산할 뿐이다.
이데올로기적 인정의 폐해는 젠더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저자는 남성 독자들이 있다면 자문하라고 요구한다. 즉 여성의 자율성과 권리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대학 내 압도적인 남성 전임 교수 비율을 조정하거나 여성에게 부과되는 양육과 돌봄의 책무를 시정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거나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거나 여성노동의 저임금화를 극복할 물질적 토대를 고민하는 일을 방기하거나 외면하고 있지 않는가? 라고.(10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개인들로 흩어져 과열된 성취인정에 몰두하는 남성들은 끊임없는 자기과시의 경쟁에 몰두하게 되고 무한 경쟁에서 위기감을 느끼는 남성들은 집단적 남성성을 고착시키는 젠더관계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를 상쇄하려 한다.(102 페이지) 이데올로기적 인정의 논리 안에서 남성의 정체성과 젠더관계를 교란하는, 새롭게 부상하는 여성 주체는 비체로서 혐오된다.(104 페이지)
저자는 젠더 내부의 개별적 차이를 고려하는 가운데 젠더 정체성에 대한 성찰적 변화를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107 페이지) 신자유주의 시대는 개인들이 물질적, 제도적 보완장치 없이 유동적 성취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시대이다. 위기감에 내몰린 남성들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보다 자신의 우월성을 확보해줄 지배적 남성성을 유일한 안전 장치로 활용한다.(107, 108 페이지) 물질적, 제도적 변화를 부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비체로 혐오되는 것이다. 물질적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성취원리는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뿐이다.(108 페이지)
저자는 소리를 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과열된 상호 인정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상호성, 자율성의 상호확장이 가능한 미래의 젠더관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110 페이지) 여성혐오를 극복하는 인정 투쟁은 분배투쟁과 교차되는 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110 페이지) 저자는 구성적 외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구성적 외부란 우리를 구성하는 외부라는 의미이다. 집단적 정체성이 형성되려면 우리와 그들의 구분이 불가피하다. 이로부터 그들이라는 외부는 우리를 구성하기 위한 필수 전제라는 말이 가능하다.
저자는 비체를 지배적 젠더 체계 내부에서 혐오되기 위해 만들어진 구성적 외부라 말한다.(115 페이지) 이 구조가 얼마나 강력한지 성토하는 대신 구성적 외부인 비체들에 의해 체계가 균열되는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115 페이지) 저자는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 해석에 따라 가부장제에서 남근을 가지려는 자와 남근이 되고 싶은 자로서의 성차가 어떤 소외를 겪게 되는지 살펴본다. 저자에 의하면 라이트의 라캉 해석은 가부장적 조건에서조차 여성들은 상징계의 안팎을 드나드는 비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117 페이지)
라이트에 의하면 남성들은 상징계 안에서 거세되고 소외된 채 이러한 결핍을 여성에 대한 환상으로 대신한다. 저자는 도시화와 함께 가부장제의 조건들이 변화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여성과 남성들이 정해진 성차의 종속과정을 좀 더 벗어날 가능성 역시 커지고 있다고 말한다.(11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도시화가 과열됨으로써 여성혐오라는 퇴행이 생기기도 했지만 젠더의 영역 구분을 뒤흔드는 더 큰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저자는 비체를 지배적 젠더 체계를 교란하는 유령이라 부른다.(122 페이지)
저자는 비체에 의한 비체의 혐오를 여성 혐오 집단의 혐오보다 더욱 통탄하기까지 하다고 말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수치심이 완전해지고 완전한 통제력을 지니려는 원초적 욕구에 기원하는 한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은 공격성- 나르시시즘적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격렬하게 비난하거나 폄하하게 될 수 있다고 보았다.(125 페이지) 혐오하는 자가 자기 정체성의 뚜렷한 경계를 지키기 위해 대상을 혐오하듯 수치심을 갖는 자는 완벽성과 완전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존성을 드러내는 타자를 공격할 수 있다.
혐오하는 자가 대상을 비체로 보는 믿음 체계를 갖고 있다면 수치심을 느끼는 자는 대상을 자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환경으로 규정한다.(125 페이지) 저자는 비체들간의 소통에서 동정심은 한계를 갖는다고 본다. 동정심은 자신이 타자에 비해 우월한다는 전제하에 베푸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저자는 동감 역시 인간의 유사성 또는 동일성을 전제로 하지만 자신의 경험에 기반하여 상상적으로 타자에게 동감하기에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타자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바 한계를 갖는다고 말한다.(129 페이지)
저자는 공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공감에 의해 추동되는 배려의 윤리는 자아와 타자의 결합과 상호의존성을 흔쾌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공감은 타자를 판단하거나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태도를 가리킨다.(132 페이지) 자아와 타자가 다르다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공감은 타자의 곁에서 타자의 경험에 참여하는 가운데 타자의 다름을 경험한다.(132 페이지) 저자는 공감이 비체와의 관계, 그리고 비체들간의 연대를 추동하는 윤리적 감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33 페이지)
저자는 버틀러는 자아가 있고 타자가 자아 밖에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아는 오히려 타자의 발견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말할 것이라 말한다.(135 페이지) 저자는 공감을 통한 연대는 소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136 페이지) 저자는 공감은 어렵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본다.(137 페이지) 저자는 도시 사회를 부정적인 것으로 본 한편 도시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이 도시화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본 르페브르를 예로 들며 자신의 논의도 같은 차원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혐오도 분노도 아닌 공감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