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적절한 말, 정확한 지적을 둘러싸고 모순이 풀려 질서를 찾게 되고 무질서가 멈춰 버린다." 카뮈가 스승 그르니에에 대해 한 말을 음미하는 아침. 카뮈에게 "섬세한 스승"이었던 그르니에 같은 분이 그리운 시간. 아침 한 일간지에 이원 시인이 조용미 시인의 '침묵지대'를 설명한 기사가 실렸다. 시인은 침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침묵을 위대하다고 말하면 수다가 되어 버린다/ 침묵을 고요하다 말해 버리면/ 즉시 언어의 이중구조 안에 갇혀 버린다".. "침묵 예찬, 침묵의 소리, 위대한 침묵, 침묵의 세계/ 모두 다 침묵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바 "침묵을 그냥 침묵이게 놔두자".. 침묵을 비유로 말하지 말자는 의미이니 이 부분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수잔 손탁의 '은유로서의 질병'이란 책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시인이 같은 '나의 다른 이름들'이란 시집에 '침묵 장전'이란 시를 썼다는 사실이다.
침묵을 "용암 같은" 것, "얼음 같은" 것 등으로 표현한 시이다. 침묵을 장전했다는 표현 자체가 비유이고, 침묵을 용암 같은 것, 얼음 같은 것으로 표현한 것 역시 비유이다. 손탁은 사람들은 은유 없이 사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제하고 피하려 애써야 할 은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모든 사유가 해석이라 해서 해석에 반대하는 것이 언제나 옳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한다. 맞는 말이지만 시에서 은유는 풍성해야 한다. 때로 모순으로 보일지라도. 침묵을 그냥 침묵이게 놔두자는 것도 수사(修辭)이고, 용암/ 얼음 같은 침묵이 장전되어 있다는 표현도 수사이다. 시인은 침묵을 용암처럼 뜨거운 것으로도, 얼음처럼 차가운 것으로도 표현한다.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사유들이 결국 시를 풍요롭게 하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