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 다이어리 - 세종 33년 간의 기록
김경묵 지음 / 새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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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李裪)라는 이름을 가졌던 조선 4대 임금 세종(1397- 1450)33(1418-1450)간의 재위 기록을 담은 책이다. 중국은 정치 제도를 우선시하는 발정시인(發政施人)의 정치를 택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은 사람을 먼저 헤아리는 시인발정(施人發政)의 정치를 택할 수 있었다. 세종은 그것을 했는데 그렇지 않은 임금들이 많았다. 정조는 시인발정과 발정시인의 면모를 모두 갖춘 인물이다.

 

세종이 아내 소헌왕후의 공식 이름을 검비(儉妃)라고 정하려 했으나 부왕 태종이 반대해 공비(恭妃)라 정했다는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이는 하나의 예이다. 태종은 세종의 길을 만들어주는 과정에서 세종에게 스승 같은 존재였던 한편 세종을 고뇌케 한 존재이기도 하다. 악역을 자임한 것이다. 세종은 장인 심온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을, 바른 말을 습관처럼 하는 자신의 입버릇에서 시작되었다고 자책했다. 장인이 자신에게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전한 것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15, 16 페이지)

 

고뇌 또는 자책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왕이 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밖으로 돌아다니지도, 병이 들지도 않았을 것이어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고 말한 것이다.(31 페이지) 이는 태종이 충녕대군(세종)을 마음에 둔 반면 원경왕후는 양녕대군(폐세자된 아들)을 깊이 아낀 데서 비롯된 일이다. 세자(世子)란 왕의 자리를 잇는 사람을 말한다. 세종은 아버지는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희생했다고 말한다.(17 페이지)

 

세종은 "나는 지금까지 책 읽기를 좋아하는 선비와 같이 살아오지 않았는가...", "내가 아는 것은 책에서 익힌 지식이 전부이기에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해서 배우고 또 익히고 있다.." 같은 말을 했다. 책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매일 아침 조회를 마치고 나서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는 어김없이 경연을 연다. 신하들과 함께 책을 읽으며 공부하고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현안 이슈를 토의한다. 경연(經筵)을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장소라고 부르는 이유다.

 

태종은 아들 세종에게 국방이 최우선이라고 가르쳤다. 태종은 유련(流連)을 경계할 것을 가르쳤다. 유는 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 것을 말하고, 연은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세종은 수령에게 지배당하는 소민(小民)을 사랑하라고 지시했고, 정부에는 국민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책을 최우선으로 마련하라고 매일 같이 닦달해 왔기에 수령들이 왕에게 거짓 보고를 하는 상황이 오랫동안 누적된 것만 같다고 여겨 마음 아파했다.

 

자식의 신분을 노비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종부법과 종모법을 보자. 종부법은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는 것이고, 종모법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것이다. 종부법에서 종모법으로 지금 당장 바꿔야 한다고 역설한 사람이 이조판서 허조였다. 이는 허조뿐 아니라 다수의 신하가 여종을 첩으로 들여서 아이를 낳고 노비 즉 재산을 늘리고자 한 수법이었다.

 

강무(講武) 이야기도 나온다. "3월에 경기도 연천으로 군사훈련을 다녀오며 메마른 논과 밭을 직접 보고 왔다."(87 페이지) 강무란 왕이 직접 전국의 군인을 모아서 사냥하며 훈련시키는 제도로서 농사일 전의 초봄과 추수를 마친 늦가을, 이렇게 두 번 한다.(111 페이지) "왕은 국민의 배고픔을 보고 지나칠 수는 있어도 국민의 목숨을 지키는 일은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임무를 부여받은 왕의 태도다." 이 말은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한 말이다.

 

태종은 세종에게 이 한마디를 전해주기 위해서 군사훈련을 할 때면 언제나 세종을 모질게 다루었다. 세종이 그토록 싫어하던 돌 싸움을 맨 앞에서 지켜보게 했고 군대의 기강이 해이해 졌다고 판단되면 바쁜 농사 철에도 군사훈련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처럼 훈련 중에는 냉정한 왕이었지만 훈련을 마친 뒤에는 다친 군인을 치료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세종이 지켜보게 했다.(143 페이지)

 

재위 13년인 1431년 세종은 18세의 세자 향과 함께 첫 군사훈련을 했다.(149 페이지) 조선의 농부는 꽤 어려운 위치의 사람들이었다. 농부가 가을에 추수를 마치면 정기 군사훈련과 성을 쌓는 중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때로는 무기 창고에 보관된 무기를 수리하는 일도 해야 하고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해야 한다. 이처럼 농부는 나라에서 부르면 노동자가 되기도 하고 군인이 되기도 하는, 고단한 신분의 사람이다.(223 페이지)

 

자책을 많이 한 세종은 군사훈련 중 추위에 얼어 죽은 군인들이 나온 것에 대해서도 자책했다. 재위 8년인 1426년 세종은 강원도에서 한창 군사훈련을 하던 중 서울에 큰 불이 났다는 긴급 보고를 받는다. 화폐개혁이 방화의 원인이라고 말해줬다. 전년도부터 나라에서 하루아침에 조선통보로만 거래하라고 명령해 법을 어기고 물물거래를 하다 적발되면 재산을 몰수하고 감옥에 가둔 결과 가족까지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는 거지로 전락했기에 국민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황망한 일들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벌어진 것이어서 그 가족들이 명화(明火) 강도를 본떠 화적 집단으로 뭉친 것으로 짐작된다.

 

명화란 횃불을 밝혀 들고 다니던 것을 말한다. 세종은 군대를 통솔하는 것은 명령으로 가능하지만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반드시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달았다고 말한다. 곡식의 생산량이 늘면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먹고 남은 곡식을 화폐로 바꿨다가 필요할 때 곡식으로 다시 바꾸게 될 텐데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화폐개혁을 서두른 것이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세종은 이 사건으로부터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 그것을 알아채면 빨리 돌아올 줄 아는 사람이 왕이어야 한다는 태종의 유언을 되새겼다. 세종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군사훈련을 위한 사냥터 몇 곳도 농경지로 개관하도록 허가 했다. 다만 군사훈련을 할 때도 있으니 사냥을 금지하는 것은 유지했다.(123 페이지) 세종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노는 것을 즐기는 젊은 사람들을 상대로 국가고시에서 공부와 말, 활로 구분되는 문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다.(125 페이지)

 

재위 12년인 1430년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지진이 발생했다. 4월말인데 서리만 내리고 비는 내리지 않고 햇볕만 쨍쨍한 날이 이어져 농작물 파종에 지장을 주는 이상기후 이야기도 전한다. 세종은 "우리나라에는 지진이 없는 해가 없고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에 매우 많다"는 말을 했다. 새롭게 알게 해주는 사실이 많은 것이 [이도 다이어리]의 특징 중 하나다. 국가 고시 시험에 노비 신분은 응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 중 하나다.

 

이 사실 자체는 세운 것이 아니다. 노비의 자식이 국가 고시에 합격해 고위직까지 승진하면 노비가 양반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렇다.(161 페이지) 세종은 금수저 청년은 자유분방하게 살지만 가난한 부모를 만난 청년을 평생 흙수저로 살게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방법으로 범죄자의 자식이라도 재주가 있거나 착한 청년이면 권리로 채용할 수 있게 법을 보완한 것이다.

 

조선은 중국이라는 나라를 빼놓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나라다. 여진족과 생존을 위한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당장이라도 오랑캐 무리를 몰살시킬 군대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지만 중국 땅에 조선 군대를 들여보내는 것은 황제와 사전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는 것이 대표적이다.(171 페이지) 두 여진족 부족인 오랑캐는 강가의 사람이라는 뜻이고, 우디 캐는 숲속의 사람이라는 뜻이다.(189 페이지) AI는 둘 다 숲속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오랑캐는 몽골, 퉁구스족 계열의 부족인 우량카이에서 유래했다.

 

세종은 변역(變易) 방식의 정치를 지향했다. 내가 먼저 바뀌는 것이 변이고 남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행동이 역이다. 여기저기가 다 문제다. 북쪽 국경을 넘나드는 여진족 만큼 남쪽의 항구를 드나드는 왜인(倭人)의 상황 또한 좋지 않다.(194, 195 페이지)

 

세종은 정초(鄭招; ? - 1434)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62일 나보다 더 나를 닮았고 언제나 왕을 사랑으로 돌봐주던 신하 정초가 죽었다. 내가 왕이 되고 가장 좋아하는 것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경연이고, 정초가 없는 경연은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정초는 내게 특별한 사람이다. 정초는 내가 왕이 된 해에 장인이 역모에 몰려 죽임을 당할 때 경연에서 지금은 보고도 못 본 듯 행동해야 한다며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새로 임명한 수령은 반드시 가까이 불러서 소민을 사랑하라고 당부하라고 알려주었던 인물이다.“

 

소민은 지배당하기만 해서 힘이 없고 움츠러드는 작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197 페이지) 정초는 문학, 농업, 천문, 과학, 음악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기틀을 닦는 모든 핵심 사업을 주도한 세종대왕의 핵심 참모이자 만능 천재 학자였다. [농사직설]의 저자이기도 한 정초는 이천, 장영실 등 기술자들이 과학 기구를 만들 수 있도록 과학적 이론을 정립하고 작업을 총지휘한 인물이기도 하다. 정초는 언제나 배우고 묻기를 좋아한 인물이었다.

 

세종은 세자 향을 어떻게 대했을까? 다음의 구절을 보자. "328일 이른 아침에 세자 향을 데리고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에 가서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아버지와 추억이 많은 광진구에 있는 낙천정에 들러서 점심을 먹고 강을 건너서 송파구의 나루터 부근 편평한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저녁을 먹고 불을 쬐며 아들에게 선대왕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음 날 돌아오는 길에 부모가 잠들어 있는 서초구에 있는 헌능에 들러서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이틀 동안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나라가 탄생하고 유지되는 기본을 일러줬다. 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것에는 못 미치지만 나도 내 방식으로 아들에게 전해주고 있다"(199 페이지)

 

흐뭇한 정경이다. 세종은 대다수의 집현전 학사들이 언론, 감찰, 인사, 국방을 다루는 힘 있는 기관으로 옮겨가고자 한다고 말한다. 세종은 태만한 마음을 잡고 종신토록 집현전에서 공부하고 경연을 준비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러나 세종은 최악의 가뭄이 닥치자 집현전 인원을 32명에서 20명으로 줄이는 결단을 내렸다.(229 페이지)

 

세종의 책 이야기는 계속된다. 예전에 아버지가 방에 틀어 박혀 지내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해 아들 주변에 있던 책을 모두 치웠던 적이 있는데 그때 구소수간(歐蘇手簡) 책 한 권만 방에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205 페이지) ()과 무() 또는 중앙과 변방의 갈등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다. 부모가 죽어도 아내가 죽어도 장례를 치르러 집에 다녀오기가 쉽지 않은 것이 국경을 지키는 장수의 숙명임에도 국경을 지키는 장수가 조그만 사건 사고라도 저지르면 서울의 관리들은 트집을 잡고 죄인처럼 대하기 일쑤였다.(211 페이지)

 

해괴(駭怪)한 일을 없애기 위해 해괴제(解怪祭)를 지냈다고 한다.(219 페이지) 세종은 시스템이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세종은 왕이 되고 나서 신하에게 한 첫 말이 "더불어 의논하자"였는데 세 정승이 자신의 뜻을 읽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고 마침내 그들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어서야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갖췄다고 말한다.(234 페이지) 물론 세종은 법을 바로 세우는 것은 결국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324 페이지)

 

재위 18년인 1436년 세종은 국민 한 사람이 1년에 내는 세금이 쌀 70석에 이르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계속되는 흉년에 세종은 처음으로 왕으로서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말한다.(231 페이지) 무엇이 문제일까? 산업, 기술이 부족한 때문일까? 이때 세종은 눈병이 심해져서 문서를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나빠졌다고 말한다. 수개월 동안 적지 않은 문서를 읽어가며 일하고, 밤에는 잠을 줄여가며 자치통감훈의 책 원고 작업을 하며 눈을 혹사시킨 후유증인 듯하다고 말한다.(234 페이지)

 

본문에 오랑캐 이만주 이야기가 나온다. 세종과 세조 시대에 조선 북방을 끊임없이 위협했던 건주여진의 대추장이다. 46진을 개척하도록 촉발한 인물이다. 재위 21년인 1439년 이런 기록이 있다. 국경에서 성을 쌓고 있는 소민에게 밥을 가져가면 물고기가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로 모여드는 것 같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그것을 지켜보기가 괴롭다는 평안도 군사령관의 편지글이다. 세종은 밥이 배고픔을 해결하지만 성은 목숨을 지켜줄 것이라고 말한다.

 

평안도 벽단, 함경도 원성 등지에 행성과 바리케이트 공사를 했는데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여름 장맛비에 휩쓸려 많은 곳이 허물어졌다. 현장을 조사하고 온 관리가 주먹으로 내리쳐도 허물어졌을 정도였다고 보고했다. 눈에 보이는 성의 바깥만 돌로 쌓고 보이지 않는 곳은 모래와 흙으로 대충 메운 부실공사였기 때문이다. 세종은 문제의 핵심이 성을 쌓는 기술 차원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목표를 달성하려고 재촉했던 데에 있다고 말한다.(300 페이지)

 

다양한 여진족들이 귀화해왔다. 대부분은 국경 가까운 지역의 좁은 땅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세종이 당뇨병을 비롯한 여러 병으로 인해 작은 일처리는 세자가 맡는다라고 통보하자 신하들은 왕이 아직 젊어서 병이 곧 나을 것이라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를 보며 세종은 요즘 신하들의 말과 행동은 지금까지 왕에게 당했던 것을 되갚아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동안은 자신이 늙고 병이든 신하를 퇴직 시키지 않았던 것처럼 왕도 죽을 때까지 일해야 마땅하다고 압박하는 듯하다고 말한다.(317 페이지)

 

신하들은 세자로 하여금 군사훈련을 지휘하게 하려는 세종에 극구 맞서기까지 했다. 세종은 찬바람이 불면 온천이 간절해진다고 말한다. 이런 구절이 있다. "144233일 아내와 세자를 포함한 온 가족이 강무를 겸해서 강원도 이천(伊川) 온천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고 보니 강무장에 아내와 함께 온 것도 처음이다. 강무는 세자가 지휘하게 했고 나는 틈틈이 세자와 더불어 사냥을 하며 아이들과 정을 쌓았다. 아홉 살 막내 이염(영웅대군)은 여행이 지겨운가보다."(319, 320 페이지)

 

세종은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어떤 사건의 현상이 아닌 배경을 헤아리는 데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가령 고의 방화 사건에 대해서도 세종은 해당 지역의 수령을 처벌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며 문제의 핵심은 왕 때문에 주민이 길을 내고 건물을 짓는 등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재위 25년인 144347세의 세종은 12월 마지막 날 우리나라 사람의 말을 듣고 글자로 적을 수 있는 훈민정음이라는 세상에 없는 새 문자를 만들었다고 세상에 알렸다.(335 페이지)

 

세종은 오랫 동안 비밀리에 새 문자를 만들어 왔다. 온천에 가서 틀어박혀 지낸 이유도, 군사훈련을 취소한 이유도 모두 훈민정음 연구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감정과 소통에 섬세했다. 요즘 말로 정동(情動)의 사람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정동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몸들과 만나며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한다. 정동 이론의 핵심은 의식 이전의 거친 감각들이 어떻게 구체적인 언어와 의미로 전환되느냐에 있다.

 

세종은 자신이 한창 젊었을 때는 신하의 보고를 받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너의 말이 아름답다. 그러나"라고 말하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차근히 설명하는 열정이 넘쳤었다라고 한다. 그런데 몸이 약해지자 자신의 지시대로 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내뱉을 때가 있다고 말한다.(354 페이지) 세종은 몸이 낫기 전까지는 이런 마음의 병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다.

 

재위 28년인 144650세의 세종은 아내를 보내야 했다. 세종은 "아내 이름은 소헌(昭憲)이라 정했다. 아내가 살아서 불리던 이름이 공비(恭妃)였다. 겸손하고 예의 바른 아내의 모습을 보고 태종이 지어준 이름이다. 죽은 뒤에 불릴 아내의 이름을 내가 직접 정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소헌은 밝음을 일깨워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실제로 아내는 왕인 나보다 더 아랫사람을 믿어주던 왕비였다."(373 페이지)라고 말한다.

 

"99일 세자가 영릉(英陵)에 가서 어머니 제사상에 밥 한 그릇을 올렸다. 그리고 띠로 벽과 지붕을 이은 한 칸 넓이의 임시 거처에 들어가서 밥을 먹다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목이 메이도록 울었다고 한다. 나도 그립고 보고 싶은데 큰아들이 오죽했을까? 어머니와 함께했던 날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났을 것이다. 내가 추억하는 아내는 평소에 믿음을 주는 말로 정을 쌓으며 살았고 나에게 모범을 보이던 사람이었다. 잔소리도 잘난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왕이 처신하는 도리의 바탕이 되는 정을 아내에게 배웠다'라고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374, 375 페이지)

 

세종은 정()이란 글자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뜻을 가진 글자라 말한다. 세종은 훈민정음이 백성의 한()을 풀어내고 정()을 쌓는 글자라고 말한다. "왕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아야 하늘이 준 기쁨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병이 들고 늙으니 쉽게 피곤해지고 게을러진다. 내가 지금 그렇다."(390 페이지)

 

재위 32년 즉 마지막 해인 145054세의 세종은 소민(小民)과 더불었던 소여왕(小與王)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태종은 신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통치하는 권도의 왕이었고 세종은 신하와 대화하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즐겼던 정도의 왕이었다.(421 페이지) 부모를 잘 만나서 자신의 이성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세종의 이성은 감성을 잘 헤아리는 바탕 위에 세운 이성이다. 여주 영릉(英陵)에서 해설을 하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세종 시대의 과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싶다. 정초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더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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