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과 사람의 과학 -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우리 과학 이야기
김연희 지음 / 이음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연희의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과학]은 우리 전통의 3()인 천지인(天地人) 즉 하늘, , 사람이라는 이슈에 담긴 과학을 분석한 책이다. 서두부터 흥미로운 개념을 만나게 된다. 치윤법(置閏法)이 그것이다. 이는 윤달을 끼워 넣는 것을 말한다. 재이론(災異論)은 재이를 하늘이 집권자에게 보내는 경고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아라가야 고분에 남두육성이 그려져 있다. 남두육성은 천구의 남쪽에 위치할뿐 우리나라에서도 여름에 남쪽 밤하늘에 있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북반구에서 남십자성은 보이지 않는다. 조공(朝貢) 책봉(冊封) 관계에서 조공의 조는 제후국의 국왕 또는 대행자가 중국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는 일을 의미했고 공은 공물을 바치는 일을 뜻했다. 조공책봉 관계란 제후국이 황제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황제국이 제후국의 통치권을 인정해주는 외교체제를 의미한다.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중국과의 교류를 도모했으나 의도하지 않은 변수들이 발생해 추세 유지가 쉽지 않았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936년 후삼국을 통합했을 무렵 중국 대륙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사]는 군주의 통치 기록인 본기(本紀), 신하들의 전기인 열전(列傳), 제도와 문화를 담은 지(), 연표(年表)로 구성된다. [고려사]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책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편찬된 책이다. [고려사]는 조선 태종 대에 편찬이 시작되어 문종 대까지 무려 57년에 걸쳐 완성되었고 이는 조선인에 의해 고려의 역사가 서술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는 서술의 관점과 공정성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정삭(正朔)은 한 해의 시작과 한 달의 첫날인 초하루를 의미하는 말이다. 정삭을 준수하는 것은 조공 책봉 관계를 확인하는 상징적 실천이었다. 관상수시(觀象授時)는 하늘의 별자리와 움직임을 관측하여 백성에게 농사에 필요한 절기와 시간을 알려주던 고대 동아시아의 통치기법을 의미한다. 동아시아에서 황제는 하늘의 움직임 즉 천체의 운동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간 체계를 정한 뒤 역서를 만들어 배포하는 일을 중요한 책무로 여겼다. 이처럼 관상 수시의 이념은 유교적 통치질서 속에서 더욱 체계화되었다.

 

관상의 주체는 천자인 황제다. 조선은 형식적으로 명나라의 제후 국이었지만 나름대로 왕천하자(王天下者) 즉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었다는 독자적인 왕도 정치사상을 견지했다. 천자국 중국의 제후국이면서도 스스로는 독립적으로 천명을 받은 나라라고 여겼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왕조 특히 세종은 독자적인 관상수시 이념을 전개하며 천문학 활동을 적극 발전시켰다. 중국이 관상수시 이념을 실행하기 위해 흠천감(欽天監)을 운영했다면 조선은 서운관(瑞雲觀)을 두었다. 서운관은 세조 12년인 1446년 관상감(觀象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관상감이란 관상수시에서 나온 말이다.

 

일부 유학자들은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 조선이 천문학 활동을 하고 그 결과물인 역서(曆書)를 간행해 배포하는 일을 그릇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조선의 국왕은 명나라의 제후로서 천자나 황제를 자처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스스로 천명을 받았다고 믿었고 더 나아가 이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인식은 세종대에 만들어진 최초의 한글 시가인 [용비어천가]에 뚜렷이 나타난다. 세종은 조선왕조가 왕천하자가 세운 나라임을 강력히 표명하며 그에 걸맞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수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핵심 가운데 하나가 천문학 활동을 바탕으로 한 관상수시였다.

 

조선은 스스로 천명을 받은 왕조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천문학 활동을 수행했고 자체 역서를 꾸준히 가능했다. 그러나 황제국이 아니었던 만큼 이 활동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65 페이지)

 

세종의 관상수시(觀象授時)와 강무(講武)는 유교적 왕도정치의 핵심인 천명(天命)을 완수하기 위한 표리일체(表裏一體)의 행위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본문에 혼효중성(昏曉中星)이란 말이 나온다. 이는 해가 질 무렵(황혼)과 해가 뜰 무렵(새벽)에 남쪽 하늘의 자오선을 지나는 별자리를 의미한다.

 

혼효중성을 고쳐야 할 만큼 고구려의 구본 천문도와 조선의 실정은 맞지 않았다. 고구려의 천문도는 평양(북위 약 39) 중심이었으나 조선의 실정에 맞춘 천문관측은 한양(북위 약 37.5)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위도가 다르면 남중하는 별자리의 위치와 시간이 달라지므로 수정이 불가피했다.

 

왕조가 바뀔 때 역법을 새로 제정했다. 이에는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형식적인 개정(차이 없음)과 관측 기술과 수학의 발전에 따른 근본적인 계산법의 혁신(차이 큼)이 공존했다. 왕조 시대의 일월식 예측은 단순한 별자리 관측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란을 막고 국가 예산 낭비를 방지하며 외교적 자립을 이루고 농업 경제를 지탱하는 최고의 국가 통치 수단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의 시헌력 도입 노력을 저지하거나 방해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조선 학자들의 유학은 허용했다. 이는 겉보기에는 모순적이지만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체제라는 정치적 문맥에서 보면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통치 전략이었다. 청나라가 조선의 자체적인 달력 제작(시헌력 계산법 독자 개발)은 견제하면서도 북경으로의 천문학 유학을 허용한 실질적인 이유는 독자적인 중심이 되지 말고 청나라가 구축한 중심(천자) 체제 안에서만 움직이라는 철저한 길들이기 방식이었다.

 

책에 반가운 이름이 나온다. 1795년 정조가 관상감 최고 책임자에게 새로운 택일서 제작을 지시했는데 책임자란 바로 서유방(徐有防)이란 인물이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해 진행된 을묘년 화성원행시 행렬의 가장 맨 앞에 섰던 경기감사다.

 

고대 및 전통사회의 천체 연구를 점성이나 제의 해석 같은 영역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들이 수행한 정밀한 천문 관측과 운행 예측을 위한 수학적 노력은 비록 오늘날과 다른 이론과 체계를 바탕으로 했더라도 자연을 체계적 질서로 이해하고 예측하려 한 지속적인 지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지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가진 매체라 할 수 있다. 물론 길을 찾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실용성을 부각시킨 지도도 그려졌다.

 

지도에는 인류 문명의 역사는 물론 인류가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던 근원적인 궁금증 그리고 장소에 대한 인식론의 변화 과정이 담겨 있다. 더 나아가 오늘날의 지도를 갖기 전까지 땅에 대한 인류의 상상력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펼쳐졌는지도 나름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양택 풍수는 명당에 사는 사람이 직접 생기를 받는 구조인 반면 음택 풍수는 생기를 받은 유골이 자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음택 풍수는 현대적 관점에서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양택 풍수는 지역 공동체의 안정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수분합(山水分合) 논리란 산과 물을 대칭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음양의 구조로 이해해 서로 분리하지 않고 인식한 것을 말한다. 인지의(印地儀)는 원근측정기로 세조가 직접 고안했다. 세조는 인지의를 이용해 아버지 세종의 영릉(英陵)에서 측량한 기록을 남겼다. 인지의는 원근측정기, 나침반은 방위측정기, 기리고차는 거리측정기, 규형은 높이측정기다.(98 페이지)

 

조선왕조는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도를 제작했다. 건국 이후 조선은 고려 시대보다 영토를 확장했고 이 지역에 대한 정보를 새로 수정해야 했다. 특히 압록강 상류의 사군(四軍), 두만강 하류의 육진(六鎭)은 국방상 요지였기에 이에 대한 정보의 필요성은 더욱 컸다.(111 페이지) 조선이 취한 사대정책(事大政策)은 국가주도로 제작된 16세기의 세계지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일대로 지도 범위가 축소된 것이다.(113 페이지)

 

조선의 지도 제작은 성리학적 이념의 강화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 구축이라는 국가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되었다. 국제적으로 화이관(華夷觀)이 강화되었고 주변국에 대한 관심은 건국 초보다 줄어들었다. 반면 국내 지역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반영한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지도의 도입은 곧 땅은 둥글다라는 개념의 도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천원지방의 개념이 확고했던 조선에서 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서양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는 극히 일부였다. 당시 조선에 유입된 서양지리 지식에 대해 대부분은 판단을 유보하거나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지전도(輿墬全圖)의 지()는 지()의 옛 글자다. 견딜 감, 수레 여를 쓰는 감여(堪輿)는 만물을 포용하여 싣고 있는 수레라는 뜻으로 하늘과 땅을 의미한다. 풍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한편 혼천설(渾天說)의 혼()은 둥글다는 의미다. 혼천(渾天)은 둥근 하늘이다. 혼천은 하늘의 운행 방식을, 천원(天圓)은 하늘의 생김새를 나타낸다.

 

두 번의 전란을 겪은 조선은 지도의 개인 소유를 금지했던 전기와 달리 사대부를 중심으로 지도 소유도 허용했다. 정교한 지도를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국방에 대한 관심이 전례 없이 고조된 17세기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새로 조성되거나 복구된 성곽이나 산성 등 각종 군사시설을 그려놓은 군사용 지도가 여럿 제작되었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조선 후기 지리지의 백미(白眉). 여지(輿地)는 땅의 정보를 의미한다.

 

고산자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하고 백두산을 오르내리며 지도를 제작했다는 설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한다. 전국 답사설은 전통적 지도 제작법과 근대적 측량 기반 제작법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나온 오해일 수 있다. 실제로 전통 사회에서 국토 전체를 실측해 전국 지도를 완성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국가의 대대적 지원을 받지 못한 개인이 전국을 홀로 답사하며 [대동여지도] 같은 정밀 지도를 제작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김정호는 이런 한계를 알고 있었기에 당대까지 축적된 조선 지도학의 성과를 종합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할 무렵 조선의 지도 제작 전통은 매우 두터웠고 특히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종 지리서가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173 페이지) [대동여지도]의 형식상 가장 큰 장점은 탁월한 휴대성이다. 이는 이용자 관점에서 지도를 설계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되었다. 필사본 지도와 달리 대동여지도는 목판 인쇄본으로 제작되어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기획했으며 각층이 이어지도록 구성했다. 나아가 이를 순서대로 맞추면 조선 전도가 되도록 고안되었다.

 

[대동여지도]는 산맥 중심의 지형 인식을 강하게 드러낸다. 무엇보다 모든 산맥의 시작점을 백두산에서 이어지게 그린 점이 눈에 띈다. 조선시대 국가 주도 제작 지도 가운데 군사적 목적을 지닌 것이 많았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외적의 침입을 막아 국토를 수호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지형 지세를 파악하고 적절한 장소의 군사시설을 설치하기 위한 지도는 필수적이었다. 이런 용도의 지도를 관방 지도라 하며 이는 곧 군사 지도다.(138 페이지)

 

고산자 김정호가 국가 기밀 누설 죄로 흥선대원군에 의해 옥에 갇혀 죽었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이야기는 1925108, 9일 동아일보에 실린 '고산자를 회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토대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173 페이지)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고산자를 처벌했다면 군사 지도도 제작하지 않아야 말이 된다. 군사 지도야말로 가장 민감한 내용을 담은 정보이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 사회의 의약 생활을 이해하는 데 독보적인 기록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다. 퇴계 이황은 주희 이후 주자학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 대학자로 주희의 자연관과 자연 과학 분야에 대해서도 관심이 적지 않았다. 그는 혼천의를 제작해 그 이치를 따졌고 상수학의 깊은 내용도 일일이 공부했다. 성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어려운 공부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천문학과 수학 역시 깊은 수준에서 이해했다.(231 페이지)

 

이황은 건강 유지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활인심방]이라는 양생술 책을 필사해 몸소 실천했다. 의학과 의술, 병에 대한 이황의 태도는 단지 자신의 삶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가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 인정받고 제자들이 그를 추종하며 학문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1599년에 간행된 그의 문집이 널리 읽히게 되면서 [퇴계집]에 남긴 병과 의학에 관한 수많은 언행과 실천이 후대 사대부에게 귀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직접 필적으로 남긴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 즉 활인심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유배당하기 전 정약용은 어떤 병을 앓았을까? 그가 냉혹한 자연조건 즉 절반 이상이 죽는 두 창이나 홍역 같은 역병을 큰 피해 없이 극복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두창은 누구나 앓는다고 해서 조선 초에 백세창이라고도 불렸을 만큼 전염력이 컸다. 정약용 역시 2살 되던 해인 1763년에 두창을 알았다. 다행히 병을 무사히 치러냈으며 얼굴이 얽는 후유증도 남지 않았다. 오른쪽 눈썹 위에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뉜 것처럼 보였고 이에 따라 7세 때인 1768년에 삼미자(三眉子)라는 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다산은 몽수(蒙叟) 이헌길(李獻吉)의 치료 덕분에 홍역에서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났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몽수전]을 지어 그의 행적을 찬양했으며 그의 마진학(痲疹學)을 확장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썼다. 마진(痲疹)은 홍진(紅疹) 또는 홍역이라 불린다. 정약용이 1798년 앓은 여질(沴疾)은 오늘날의 인플루엔자로 추정된다.

 

흑산도에 유배된 형 정약전은 동생이 건강을 돌아보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일에 대한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을 꾸짖으며 당장 연구를 중단하고 수양에 힘쓸 것을 권했다. 특히 온몸을 펴고 뻗치며 구부리고 호흡을 가다듬는 도인술을 권했다. 하지만 정약용은 도인술이 분명 유익하다는 점을 잘 알지만 자신은 게으르고 산만하여 소용이 없다고 답했다. 고요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려 하면 세상의 온갖 잡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어지럽게 일어나 오히려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지경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저술할 때 마음이 더 집중되고 안정된다고 했다. 정약용의 몸과 마음을 지탱해준 원천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매일 규칙적으로 행한 연구였다.

 

정약용의 삶에서 정조를 빼놓을 수 없다. 다산이 1797년 완성한 [마과회통(麻科會通)]1790년 한양에서 마진이 유행하자 민간에 처방집에 관한 의견을 물은 정조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1790년은 정조가 경술년 각과를 시행한 해로 다산은 이에 역시 응했다.

 

노년의 정약용을 힘들게 한 것은 조정에서 그를 정치가로 부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의약으로만 그를 찾고 그의 의술만을 칭송했다. 심지어 10년 후 조정이 그를 두 번째로 부른 것도 그가 그토록 고려하던 승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의학 동참 부호군인 무관으로서였다.의약은 정약용에게 양면적인 존재였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병을 다스려주고 세상의 칭송을 받도록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질병을 완전히 치료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그에게 원치 않는 명성을 씌어준 것이기도 했다. 결국 의약은 그의 인생에서 신체적으로는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으로는 부담이 되는 이른바 계륵(鷄肋) 같은 존재였다.

 

정약용은 나이가 들면서 의약에 매달리기보다 벗어나려고 했다. 고칠 수 없는 병은 천명에 순응하는 자세로 받아들이려 했고 정치적인 역경 역시 운명이라니 여기며 미련을 두지 않으려 했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더 이상 세상의 부름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과 학문 속에서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