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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평점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2017년 출간(원서 기준)된, 양자중력을 연구하는 이탈리아의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책이다. 로벨리는 이 책보다 3년 먼저 나온(원서 기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저자에 의하면 공간의 양자들의 극도로 작은 규모에서 볼 때 자연은 보편적인 시간을 지휘하는 단 한 명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 리듬에 따라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는 독립적으로 그 자신의 리듬에 따라 춤을 추는 각각(各各)이 있을뿐이다.
저자는 양자중력을 연구하는 물리학은 극단적이지만 너무 아름다운 풍경 즉 시간이 없는 세상을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때로는 번뜩이지만 때로는 혼란스러운 아이디어들이 펄펄 끓는 용암이 될 것이라 말한다. 물체가 떨어지는 것은 시간 지연 때문이다.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곳, 가령 행성 사이의 공간에서는 물체가 추락하지 않고 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구의 표면에서는 사물이 자연스럽게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르는 쪽으로 향한다.
세상은 사령관의 구령에 맞춰 움직이는 군부대의 대형처럼 균일한 것이 아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차이가 나타날 때마다 열(熱)이 관여한다는 글을 보자. 이 글이 가장 핵심일 수 있다. 공이 이동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추는 것은 마찰 때문이고 이 마찰이 열을 생산한다.(34 페이지) 그리고 열이 있는 곳에서만 과거와 미래가 구분된다. 시간에 대한 책답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는 클라우지우스, 볼츠만 이야기가 나온다. 엔트로피가 매개가 된 결과다.
루돌프 클라우지우스가 말한 바는 열은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열은 분자들이 일으키는 미세한 동요(動搖)다. 자연의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의미로 언제 어디서나 친숙하게 일어난다. 궁금한 것은 ‘과거에는 왜 엔트로피가 낮았을까?‘다. 저자는 우주 곳곳에 잘 정의된 지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환상이자 우리 경험의 부적절한 외삽(外揷)이라 말한다.(53 페이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요 속에서 아무런 신체적 경험이 없지만 우리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생긴다면 우리는 즉시 어떤 시간이 흘렀다고 가정한다고 말했다.(73 페이지) 뉴턴은 사물이나 사물의 변화와 상관없이 진짜 시간은 흐르고, 모든 사물이 멈추고 우리 영혼의 움직임마저 얼어붙어버려도 진짜 시간은 냉정하게 그리고 동일하게 계속 흐른다고 보았다.(74 페이지) 라이프니츠는 시간은 사건이 발생한 순서일뿐 자율적인 시간 같은 것은 없다고 보았다.
뉴턴 이전에는 누구도 사물과 상관없는 시간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뉴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위에 있는 것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정의한 공간이 상대적이고 겉보기이며 통속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공간 그 자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도 존재하는 공간이 절대적이고 참되며 수학적이라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과 뉴턴의 시간은 아인슈타인의 보석 같은 연구로 통합되었다. 갑자기 머리에 섬광이 번쩍이듯 아인슈타인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의 생각이 모두 옳았음을 알게 된다.
저자의 전공은 시간의 양자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을 양자중력이다. 아직까지 과학 사회의 승인을 얻고 실험을 통해 확인된 양자중력 이론은 없다. 양자중력의 주요 세 관점은 물리적 변수의 입자성, 미결정성, 관계적 양상이다. 입자성은 자연에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빛은 광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 속 전자들의 에너지는 특정 값 외에 다른 값은 취할 수 없다. 밀도가 아주 높은 물질처럼 아주 깨끗한 공기도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
양자역학의 두 번째 발견은 불확정성이다. 전자는 한 번 나타났다 곧이어 다시 나타나는 동안에 정확한 위치를 가지지 않는다. 확률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듯 하다. 이를 위치의 중첩이라 한다. 시공간도 파동처럼 흔들리며 다양한 형태로 중첩될 수 있다. 시공간이 중첩되면 한 입자가 공간에서 널리 퍼질 수 있듯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흔들릴 수 있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전과 후 모두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요동이 아무것도 결코 결정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특정한 순간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정된다는 의미다. 이러한 미결정성은 하나의 양이 다른 양과 상호작용할 때는 해소된다. 상호작용 중에 전자는 어떤 한 지점에서 구현돼 나타난다. 예를 들어 전자는 스크린에 충돌해 특정 지점에 놓여 있던 입자 검출기에 잡히거나 광자와 충돌한다. 이럴 경우 전자는 그 특정 지점에 놓임으로써 구체적인 위치를 얻는다.
그러나 이런 전자의 구체화에는 묘한 측면이 있다. 전자는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다른 물리적인 물체와의 관계하에서만 구체화된다. 물리적인 물체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과의 상호작용은 미결정성을 확산시킬 뿐이다. 전자가 특별한 형태로 구체화되는 것을 확률구름이 붕괴한다고 말한다. 시간은 더 이상 일관성 있는 하나의 캔버스가 아니라 관계들의 느슨한 망이 된다. 현재라는 개념은 효력이 없다. 광활한 우주에 우리가 합리적으로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다. 실제로 잘 살펴보면 매우 사물다운 사물들은 장기간의 사건일 수밖에 없다. 아주 단단한 돌의 경우 우리가 화학과 물리학, 광물학, 지질학, 심리학에서 배운 바로는 양자장의 복잡한 진동이고 힘들의 순간적인 상호작용이다.
돌은 짧은 순간 동안 자신의 형상을 유지하고 다시 먼지로 분해되기 전 자체적으로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사물이 아닌 변화를 연구하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프톨레마이오스에서 갈릴레오, 뉴턴, 슈뢰딩거에 이르기까지 물리학과 천문학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사물이 아니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헨리 넬슨 굿맨(1906-1998)의 말을 인용한다. "사물 자체도 잠깐 동안 변함이 없는 사건일 뿐이다." 시간이 그저 사건을 뜻하는 것뿐이라면 모든 사물은 시간이다. 시간 속에 있는 것만 존재한다. 우리가 이 우주를 통일된 단 하나의 시간 순으로 정리할 수 없다고 해서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여러 변화들이 단일한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되지 않을뿐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은 허상이 아니다. 이 세상의 일시적 시간 구조다. 하나의 세계적인 질서에 따라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에너지와 시간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엔트로피는 임의의 주관적인 양이 아니라 속도처럼 상대적인 양이다. 물체의 속도는 물체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다른 물체와의 관계 속에서 맺어진 물체의 성질이다.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뛰어다니는 아이에게 엄마가 "가만히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아이에게 기차 창문으로 뛰어내려 지상과의 관계 속에서 그곳에 멈추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기차와의 관계 속에서 아이가 멈추어야 한다는 뜻이라 말한다.(153 페이지)
저자는 아주 먼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은 것은 우리가 세상과 상호작용하면서 세상을 설명할 때 기술하는 거시적 변수들의 수가 너무 적은 관계로 극적인 희미함이 발생하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저자는 우주 초기의 낮은 엔트로피 즉 시간의 화살은 우주보다는 우리로 인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주의 수많은 변수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과 상호작용을 하며 그 안에서 우주를 관측한다. 우리가 본 것은 희미한 이미지다. 이 희미함은 우리와 상호작용하는 우주의 동역학이 희미함의 양을 측정하는 엔트로피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저자는 에너지가 보존된다면 굳이 에너지를 더 만들 필요가 있을까?라고 묻는다. 답은 세상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낮은 엔트로피라는 것이다. 에너지는 열에너지 즉 열로 전환되어 차가운 사물로 이동하는데 여기서부터는 특별한 조치 없이는 에너지를 이전 단계로 되돌릴 수 없고 식물을 자라게 하거나 모터를 돌리기 위해 재사용할 수도 없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는 동일하게 유지되지만 엔트로피는 상승하는데 이 역시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 불은 나무가 높은 엔트로피 상태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과정이다. 나무 더미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가 아니다. 탄소나 수소 같은 구성 성분들이 아주 특별한(질서 있는) 방식으로 결합하여 나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이 특별한 조합이 깨져야 성장한다. 나무가 불에 타면 이 결합이 깨진다. 나무를 형성한 특별한 구조에서 나무의 구성요소들이 분열하고 엔트로피가 맹렬하게 증가한다. 저자는 간혹 생명이 특별히 질서화된 구조들을 만들어낸다거나 국소적인 영역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라고 말한다. 그저 낮은 엔트로피의 음식을 분해하고 소비하는 과정이다. 나머지 우주에 존재하는 스스로 구조화된 무질서 그 자체다.(171 페이지)
우주적 존재가 되는 것은 점진적으로 무질서해지는 과정이다. 우주를 섞는 거대한 손은 따로 없고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우주의 각 부분들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스스로 조금씩 섞일뿐이다.(172 페이지) 우리는 과정이자 사건들이며 구성물이고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제한적이다.(180 페이지) 저자는 내면적 성찰이 아닌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자아에 대한 개념이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기억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를 형성한 프로세스들은 도처에 깔려 있고 기억은 이 프로세스들을 함께 단단히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은 생존의 기회를 늘린다. 진화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뇌 구조를 선택해 왔다. 우리가 바로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이 선택이 우리 정신 구조의 핵심이다. 이 선택이 우리에게는 시간의 흐름이다.(186 페이지)
시간의 특성을 다룬 최고의 책 중 한 권으로 꼽히는 ’시간의 방향‘에서 한스 라이엔바흐(1891- 1953)가 제시한 것처럼 파르메니데스는 시간이 초래한 불안을 피하기 위해 시간의 존재를 부정하려 했고, 플라톤은 시간의 존재를 초월해 존재하는 이데아의 세계를 상상했으며, 헤겔은 정신의 덧없음을 초월하여 그 충만함 속에서 자신을 아는 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불안에서 탈출하기 위해 우리는 영원의 존재를 상상했고 다수의 신들 또는 하나님 또는 불멸의 영혼들이 거주하기를 바라는 ’시간을 초월한 이상한 세상‘을 상상했다.(205, 206 페이지)
저자는 시간에 대한 반대의 태도를 보인 헤라클레이토스나 베르그송과 같이 시간에 찬사를 보내는 태도도 많은 철학을 낳은 데 기여했지만 시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많은 이해를 주지는 못했다고 말한다.(206 페이지)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를 비교하는 것도 좋겠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을 했다. 이는 동어반복이 아니라 세계에 무엇인가 존재하고 무(無)는 아니라는 말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흐른다‘라는 명제로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으로서의 생성(生成)을 제시했다.(이정우 지음 ’세계철학사 1‘ 101 페이지) 저자는 우리는 더 많은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제대로 공식화할 수 없는 질문들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을 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것은 60세가 된 시점이다.
저자는 “예순이 된 지금도 두려움이 찾아오지 않았다. 내 삶을 사랑하지만 인생은 피곤하고 힘들고 고통스럽다. 나는 죽음이 포상 휴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흐는 56번 칸타타(나는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노라)에서 죽음을 잠의 자매라고 불렀다. 죽음은 내 두 눈을 감겨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려 곧 오게 될 친절한 자매다.”라고 말한다. 저자의 책은 물리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는 책이다. 물론 실존적 이야기에도 비중이 실린 책이다. 추천한다.